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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황룡사 9층목탑, 콘크리트로 복원할 뻔 한 사연


경주는 1000년을 버틴 신라 왕국의 서울이었습니다. 실로 장구한 세월이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무려 18만호에 이르는 사람들이 경주에 살고 있었으며 35채의 ‘금입택’, 즉 황금이 드나드는 저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880년 헌강왕 때는 “서울 백성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이었고, 그 기와집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밥을 짓는데 장작이 아니라 숯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53년 뒤 신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경주, 특히 834년 동안이나 궁성이 자리잡고 있던 월성 지역은 금단의 땅이 되고 맙니다.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상징건물이자 랜드마크였던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는 덩그러니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몽골군 침략 때인 1235년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후 700여 년이 지났을 때 큰일날 뻔한 일이 벌어집니다. 80미터의 위용을 자랑했던 황룡사 9층목탑을 콘크리트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기자는 경향신문 70주년 기획인 ‘70인과의 동행’에 참여했습니다. 고고학자 조유전 박사와 함께 경향독자 35명를 모시고 경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지난주 감은사와 대왕암 기행에 이은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 주 주제는 월성과 황룡사터 기행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9회는 ‘황룡사 9층탑, 콘크리트로 복원될 뻔 했던 사연’입니다.

 

고고학자라 하면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것은 그저 낭만일 뿐이다.

모험을 찾아 흥미진진한 여행을 떠나는 따위는 필자가 십수년간 지켜봤던 고고학자의 모습이 아니다. 30도가 넘는 뙤약볕에 앉아 구슬땀을 흘리며 트롤(발굴용 손삽)로 흙을 감질나게 파내는 이들이다.

 

땅속에 묻혀있는 역사의 편린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 바로 그것이 고고학자의 몫이다. 뭔가 나올 때까지, 아니 끝내는 허탕을 치는 한이 있어도 끈질기게 기다려야 하는 이가 바로 고고학자이다.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74)과 떠나는 경주여행 역시 화려하지는 않다. 하고 많은 경주의 볼거리 중에 왜 하필 감은사요, 월성이요, 황룡사요, 분황사였을까. 모두 번듯한 건물도 없는 ‘터’이며, ‘흔적’일 뿐인데….

 

그렇다. 터를 찾고, 흔적을 찾아 자기만의 눈으로 1000년 고도 경주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 바로 조유전 선생이 추천하는 경주 고고학 여행의 콘셉트였다.

“고고학요? 흔적을 찾아가는 학문이지요. 저는 발굴자료를 토대로 제 시각대로 말할 뿐입니다. 해석요? 그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염원을 담은 감은사 터. 아들 신문왕은 감은사 금당 바닥 밑에 구멍을 뚫어 지하공간을 만들어 용이 된 아버지가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감은사 금당터엔 지하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는 유구가 남아있다. 경주|강윤중 기자

 

객담이지만 조유전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는 특유의 ‘허허 어법’이다.

누가 무슨 주장을 해도 ‘허허허’하며 다 받아들인다.

“고고학자가 자기 주장만 옳다고 고집하면 큰일날 수 있습니다. 땅속에서 새로운 유적과 유물이 새롭게 나오면 어쩌려구요? 자기 주장이 다 거짓이 될 수 있는데….”

■감은사 금당터에 뚫린 구멍
조유전 선생은 첫번째 여정을 감은사 ‘터’로 잡았다. 발굴의 흔적만 남은 금당터, 그리고 마주보는 3층 동서탑 앞에서 무엇을 상상해보란 말인가.

“감은사는 동해로 빠지는 대종천을 통해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요.”
노 고고학자는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에 참가한 35명 답사단의 시계를 1300여년 전, 문무왕의 시대로 돌려놓았다.

 

문무왕(재위 661~681)이 누구인가.

아버지(태종 무열왕)와 외삼촌(김유신)을 따라 백제 정벌전(660년)에 나섰고, 왕위에 오른 뒤(661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군주다. 당나라의 야욕을 꺾고 대동강~원산만을 잇는 남쪽의 영토를 획득했다.(676년) 그런 문무왕에게 끝내 풀지 못한 숙원이 하나 있었다.

 

왜적을 막는 일이었다. 평소 입버릇처럼 “죽은 뒤에도 나라를 지키는 용(護國大龍)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급기야 “왜적을 불법(佛法)으로 막겠다”면서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다.

문무왕의 유해가 묻힌 것으로 알려진 대왕암. |강윤중 기자

그러나 창건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681년)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절을 마무리 지었다.
조유전 선생은 이 대목에서 금당터에 노출돼 있는 돌덮개들을 가리킨다. 이상한 구조다. 덮개돌을 잇대어 마루처럼 올려놓았으니 바닥과의 사이에 지하공간(60㎝)이 생겼다.

금당 바닥에 왜 이런 지하공간을 만들어 놓았을까. 감은사 ‘사중기’(寺中記·절의 내력을 기록한 책)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아들 신문왕이 절을 지은 뒤 금당 돌계단 아래 구멍을 뚫어두었다.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돌아다니게 한 것이다.”

 

조유전 선생은 “감은사는 나라를 향한 문무왕의 충(忠)과,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려는 신문왕의 효(孝)를 담은 사찰이었다”고 해석한다.

1979년 감은사 발굴의 책임자였던 노 고고학자가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는 한이 없다. 높이 14.5m에 이르는 동서탑을 해체·수리·복원한 이야기와, 1959년 당시 지상 10m 높이에서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 사리장엄구를 수습한 이야기, 옥개석 일부가 떨어져 당시 발굴책임자(고 김정기 박사)가 죽을 뻔 했던 이야기….

 

조유전 선생이 불현듯 생각난듯 한마디 덧붙인다. “절터를 보고는 ‘에이, 중국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잖아요. 우리 문화는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잖아요. 규모로 승부하기보다는 자연친화적인 건물이 많잖아요.”

 

■문무왕릉 발굴 포기한 이유

답사단은 문무왕의 뼈를 묻었다는 동해 입구의 대왕암으로 향했다.

해변에서 200m 이상 떨어진 곳이니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다. 자연 “대왕암 사이에 진짜 문무왕의 유골이 있는지 고고학 발굴을 해보면 알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조유전 선생이 특유의 ‘허허’ 웃음을 짓는다.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어요. 1982년 왜구가 훔쳐가다가 바다에 빠뜨렸다는 감은사 종을 찾을 계획이 수립됐어요. 날씨가 흐리면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나 어쩐다나….”

그 참에 문무왕 수중릉(대왕암) 내부구조도 수중 발굴해 보자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대왕암 가운데 놓인 뚜껑돌을 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오히려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겨두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냥 인간의 영역에서 넘볼 수 없는 금기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노트에 답사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가던 답사단 윤재성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호기심 충족 때문에 1300년 간직한 문무왕의 신비를 깨버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

1000년 고도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한창 발굴중이다. 경향신문 답사단은 갓 출토된 기와·토기편을 통해 신라 1000년의 체취를 맡아보았다.|강윤중 기

 

■월성에서 느낀 1000년의 숨결
답사 여정에 나선 18일의 경주는 뜨거웠다.

34도의 무더위였다.

 

가이드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결정적인 이유를 아느냐”는 자문(自問)에 실소를 자아내는 자답(自答)을 했다. “무더위 때문에 백제·고구려가 맥을 추지 못해 항복한 거래요. 삼성(프로야구)도 여름철에 성적이 난다잖아요.”


‘아재 개그’ 한방에 시원한 웃음을 뿌린 답사단은 월성 발굴현장에 닿았다. 월성은 101년(파사이사금 22년)부터 멸망(935년)까지 신라의 왕성이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는 월성 안의 석빙고(조선시대 건물)만 도드라졌었는데….”

 

 답사단의 일원인 민경대씨는 한창 발굴작업 중인 월성의 달라진 모습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속 김동하 신라사찰팀장이 답사단을 맞이했다. 2014년부터 재개된 1차 발굴 결과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월성 발굴은 시작에 불과하다.

“월성은 834년이나 신라의 궁성이었잖습니까. 어림잡아 7층의 문화층이 켜켜이 쌓여있는데요. 이제 겨우 신라 멸망 직전의 문화층만 판 겁니다.”(김동하씨)

조유전 선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절대 서두르면 안된다”는 것이다. 불과 74년간(710~784년) 도성이었던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유적도 50~100년을 목표로 장기발굴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답사단을 이끈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이 심초석만 덩그라니 남아있는 황룡사 9층 목탑 터에서 설명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100년이 걸려도 시원치 않습니다. 절대 선입견 없이 차근차근 조사해야죠. 발굴을 잘못하면 끝장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마디

지난해 8월 월성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이 상반된 해석을 낳았다.

“월성발굴을 체계적으로 철저히 하라”는 말과 함께 “집중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달라”는 당부도 곁들인 게 문제였다.

 

발굴을 서둘러 빨리 복원한 뒤 관광자원화 하자는 측은 후자의 언급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후회없는 학술조사로 제대로 된 역사를 복원하자는 측은 전자의 언급을 강조했다.

 

아무렴 박 대통령의 언급이 ‘대충대충 발굴해서 복원하라’는 뜻이었겠는가. 절대 아니리라 믿는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발굴결과 신라 멸망 이후 고려시대의 유물·유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바로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왜일까. 이 역시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

 

“신라 멸망 이후 왕궁인 월성터는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조유전 선생)

답사단은 발굴 구획 별로 잔뜩 쌓아놓은 기와·토기편을 만져볼 기회를 얻었다. 발굴단 김동하씨가 사방에서 터지는 답사단원들의 질문에 족집게 감별사가 됐다.

“이건 토기 손잡이, 이건 시루편, 이건 꼭지, 이건 6~7세기 기와편, 이건 9세기 인화문 토기, 이건 조선시대 백자편입니다.” 젊은 고고학도의 해박함에 “대단하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친구들과 함께 벌써 10번째 경향신문 답사여행을 왔다는 주선미씨는 1000년 전 토기편을 직접 만져보고 “전율이 흘렀다”고 했다.

“신라 토기의 꼭지편을 만졌는데 마치 1000년 전 신라 사람의 손을 만진 듯했습니다.” 고고학도가 보기엔 지천에 깔린 토기편이지만, 대중에게는 1000년의 숨결로 여겨지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것이 바로 고고학의 대중화가 아닐까.

 

■콘크리트로 복원될 뻔한 황룡사 9층탑
“서라벌에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삼국유사> ‘원조흥법염초멸신’)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521년) 불교를 수용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에서 꽃을 피워 신라에서 결실을 맺었다. 17만8936호가 살았다는 왕경에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던 절과 탑을 상상해보라.

특히 월성 동북쪽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서라벌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탑 높이가 자그만치 80m나 됐다.

“서라벌 시민들은 아마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우뚝 솟은 목탑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과 개인의 화복을 빌었겠지요.”(조유전 선생)

선덕여왕이 황룡사 목탑을 조성할 무렵 신라는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642년 대야성을 비롯해 서쪽 40여개성이 백제 의자왕에 의해 함락됐다.

선덕여왕은 이때 당나라 유학파 승려인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9층 목탑을 세운 것이다. <삼국유사> ‘구층탑조’에 나와있다.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 침범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한다.”

 

선덕여왕은  불법의 힘을 빌려 위기를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목탑 공사에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를 초청했고, 가람형식도 고구려의 1탑3금당 양식이라는 게 매우 중요하지요. 절의 조성을 신라인이 기획했으니 신라·백제·고구려의 문화가 응축된 삼국 공동의 작품이라고 봐야죠.”(조유전 선생)

 

그런데 9층탑이 조성된 후 딱 23년 만에 삼국통일이 이뤄진다. 거대한 목탑이 신라인들의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황룡사도, 9층 목탑도, 절 안에 모셨던 금동장육존상도 1238년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화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2008년 숭례문 화재 때 목도하지 않았던가. 신라의 3대 보물(9층 목탑·장육존상·옥대) 가운데 두 가지가 녹아버린 것이다.

멀리서 본 황룡사 터. 높이 80미터에 달했을 황룡사 탑은 신라 경주의 랜드마크였고 경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진흥왕은 원래 이곳에 신궁을 지으려 했지만 계획을 바꿔 사찰(황룡사)을 조성했다. 9층목탑은 선덕여왕 때인 645년 만들었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초청됐다. 9층목탑이 완성된 후 23년만에 삼국통일을 이뤘다.|강윤중 기자 

 

■콘크리트 탑이 될뻔 한 사연
조유전 선생은 답사단을 목탑 터에 남아있는 거대한 심초석으로 이끌었다. 30t에 달하는 심초석 위에는 또 10t에 달하는 방형대석이 놓여있다.

 

목탑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9층 목탑을 복원할 수는 없을까. 조유전 선생은 1979년 1월4일의 기억을 전한다.

“황룡사 발굴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9층 목탑을 콘크리트로 복원해보라’고 지시했어요.”

콘크리트 복원이라니…. 그나마 남은 목탑의 기초마저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9층탑이 선다?

 

발굴단이 ‘불가’의 뜻을 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대통령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으니 예산이 반영되고 설계가 검토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이 콘크리트 9층탑은 10·26 사태로 유야무야 됐다.

바로 곁의 분황사까지 둘러보고 돌아선 답사단의 어깨에 땅거미가 드리워졌다. 광활한 경주 분지에 터만, 흔적만 남은 월성과, 황룡사, 그리고 감은사까지….

 

오히려 그 황량함과 헛헛함이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터마다, 흔적마다 인간의 욕심을 섣불리 채워넣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고고학의 묘미인 상상의 나래조차 마음껏 펼 수 없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는 땅을 해부하고 수술하는 의과의사죠. 한번 망가진 유적은 절대 회복할 수 없어요.”(조유전 선생)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