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로 ‘고대사’ 가 꿈처럼 펼쳐지다-
군부대는 철수했으나 여전히 경작지로 남아있는 육계토성의 잔존벽. 성인지 둑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다.
“온조는 한수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溫祚都河南慰禮城)~.”(삼국사기 온조왕 즉위조·기원전 18년)
“‘낙랑과 말갈이 영토를 침략하므로~도읍을 옮겨야겠다(必將遷國). 한수 남쪽의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해야겠다’. 이듬해 정월 천도했다.”(삼국사기 온조왕 13·14년조·기원전 7·6년)
우리 고대사에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남하한 온조세력의 첫 도읍지다.
온조는 첫 도읍지를 도대체 어디에 세웠을까. 즉위연조에는 곧바로 한수 남쪽 위례성에 세웠다고 했지만, 13년·14년조에는 천도사실을 언급한 뒤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전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렇다면 하남위례성 이전에 (하북) 위례성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 고대사의 수수께끼 ‘하북위례성’
그런데 하남위례성의 위치논쟁은 한강변 ‘풍납토성’으로 사실상 결론이 난 상태다. 1997년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발견을 계기로 풍납토성이 본격조사된 덕분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8~기원전 6년까지 백제의 첫 도읍지였을지도 모르는 (하북)위례성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북위례성의 존재조차도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고 비정했다.(여유당전서 ‘강역고’) 이후 대다수 학자들은 다산이 말한 ‘삼각산 동쪽기슭’이라는 표현을 중시,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짚어갔다.
그들은 중랑천변, 즉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일대를 주목했다. 중랑천변을 따라 내려가면 한강과 만나고 그 한강 건너편에 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있으니 그런대로 일리있는 추론이었다. 게다가 이 중랑천변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토루(土壘)의 흔적이 뚜렷했다. 중곡동 일대에서는 백제시대 석실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뚜렷하게 입증시킬 만한 기록도,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93년 윤무병 당시 원광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성곽’이라는 글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슬쩍 얹어놓는다.
“풍납동토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유적이 1곳 있는데 경기 연천 적성읍 서북방에 해당되는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존재가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000 지도에는 육계토성지(六溪土城址)라고 표기되고 있다.”
전체 18쪽의 논문 가운데 반쪽도 안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강 북쪽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임진강 유역에 풍납토성과 비슷한 성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사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육계성은 주위가 7692척인 성~”이라고 언급돼 있다.
어쨌든 윤무병 교수의 언급 이후 육계토성은 서서히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육계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꿈에서도 못할 일이었으리라.
# 꿈처럼 펼쳐진 고대사의 세계
1996년 임진강 홍수로 노출된 주거지 모습. 주월리/이상훈기자
그런데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지 2014년이 흐른 1996년 여름. 이상기후에 따른 집중호우가 한반도, 특히 임진강 유역을 덮쳤다.
7월26일(340㎜)부터 시작된 집중호우는 27일(557.7㎜)과 28일(598.7㎜) 사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부었다. 3일간 내린 강우량은 연평균 강우량의 50%에 달했다.
재앙이 닥친 뒤 한달가량 흐른 8월24일 아침. 당시 향토사학자였던 이우형씨가 행장을 꾸렸다.
“범람한 물이 빠지고, 어느 정도 뒷정리가 끝나면서 혼자 임진강을 따라 나섰습니다. 맨처음 백제적석총이 있는 삼거리(연천)를 찾았는데요. 거기서 홍수로 무너져버린 사구(沙丘) 단면에서 빗살무늬 토기 같은 선사시대 유물들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후 4시쯤 육계토성을 들렀는데….”
눈 앞에 고대사의 세계가 꿈처럼 펼쳐져 있었다.
“홍수가 휩쓸고간 토성 내부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수마가 깊이 1m나 되는 땅표면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엄청난 토기편들과 철제유물들이 노출돼 있었습니다. 홍수가 마치 체질하듯 흙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유물과 유구들이 햇빛에 노출된 것이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우형씨는 급한 대로 구획을 설정한 뒤 곧바로 파주시청에 보고했다. 경기도박물관이 조사에 나섰다. 일단 조사에 앞서 ‘토기 밭’으로 일컬어질 만큼 유물이 널려있는 표토층 수습작업에 나섰다.
그러던 10월12일, 당시 답사차 현장을 들렀던 김기태씨(현 기전문화재연구원 4팀장)가 급한 목소리로 경기도박물관에 연락했다.
“우연히 주민들이 유실된 경작지를 중장비로 복토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유적이 훼손되고 있었어요.”
다급해진 경기도박물관측은 즉각 공사중지를 명령한 뒤 더 이상의 유적 파괴를 막기 위한 긴급 수습조사를 벌였다.
“빨리 조사를 진행하라”는 주민들의 민원 속에 조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파면 팔수록 유구와 유물이 쏟아지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홍수로 마구 떠내려온 지뢰가 유적 전체에 나뒹굴어 있었다. 지뢰는 널려있고, 조사면적은 넓고, 시간은 없고….
한양대박물관까지 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작지를 복구해야 수해에 따른 보상문제가 해결되는 미묘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 어느 여성조사원의 ‘유적사수’
그해 발굴조사가 막바지로 치닫던 12월초, 한양대박물관이 조사를 맡았던 구역에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나타났다.
“지금 복토하지 않으면 내년 농사 망친다”는 게 주민들의 항변이었다. 당시 한양대구역의 발굴을 책임졌던 황소희 연구원(현 한양대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나섰다. 막 복토를 위한 흙을 쏟아부으려던 덤프트럭을 몸으로 막아선 것이었다.
황소희씨는 ‘차라리 나를 묻으라’는 듯 트럭 뒤에 앉아버렸다.
“방형, 여(呂)자형 주거지 바닥면이 잘 남아있는 곳이었는데 흙을 가득 싣고 온 덤프트럭이 막 쏟아부을 참이었어요. 여차하면 흙더미에 깔렸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유적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지정리반도 황소희씨 등 여성 조사원들의 죽음을 무릅쓴 ‘유적사수’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장면에서 ‘풍납토성과 육계토성이 비슷하다’고 쓴 윤무병 교수의 언급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풍납토성 발굴 때도 주민들과의 충돌로 유적일부가 훼손당하는 비운을 겪지 않았던가. 아니 풍납토성도 1925년 을축대홍수로 휩쓸려 나갔고, 일부 유구와 유물이 드러났는데, 육계토성도 96년 홍수로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았나.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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