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사람들은 칠중성이라 했다. 그후 1300년 가까이 흐른 1951년 4월,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은 캐슬고지(일명 148고지)라 했다. 경기 파주 적성 구읍리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148m의 야트막한 고지. 벌목으로 시야를 확보한 고지엔 군부대의 참호 및 군사시설이 설치돼 있다.
해발 148m 야트막한 칠중성(캐슬고지)에서 바라본 임진강변 이북. 북한땅이 손에 잡힐듯 하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의 각축장이었고, 6·25때는 영국군과 중공군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일만큼 쟁탈의 요소였다. 적성/이상훈기자
# 교통의 요처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아시겠죠?”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이우형 연구원이 “앞 뒤의 전망을 보라”고 한다. 과연 그랬다. 좀 ‘초를 쳐서’ 저 멀리 스멀스멀 기어가는 개미 한마리까지 관측할 수 있는 확 트인 공간. 구불구불한 임진강 북쪽으로 황해도가 손에 잡힌다. 눈길을 뒤로 돌리면 감악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설마치 계곡을 따라가면 의정부와 서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황해도~한강을 잇는 교통 요지이자 지름길이다. 그랬으니 예로부터 쟁탈의 요소일 수밖에….
칠중성(캐슬고지)의 팔자는 그야말로 사연 많은 한국사를 쏙 빼닮았다. 삼국·남북간은 물론 신라-당나라간, 심지어는 외국군대(영국-중국)끼리의 처절한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1년 온조왕이 말갈의 추장을 잡아~나머지 적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은 곳이 바로 칠중하”라는 기록으로 보면 2000년 전에는 필경 백제의 땅이었을 터. 5세기 후반부터는 고구려 영역이었다가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553년) 6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7세기부터 이곳은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이 놀라 혼란해져 산골짜기로 들어갔다.”(삼국사기 선덕여왕조)
“660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쳐서 필부가 전사하였다.”(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
# 필부의 전사
‘필부’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칠중성 현령 필부는 고구려군의 침략에 맞서 20일이나 성을 지킨다. 고구려 장수는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다. 그런데 반역자인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 군에 사람을 보내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치라’고 내응했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반역자 비삽의 목을 친 뒤 군사들을 독려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功)으로 성을 핍박했으며, 필부는 빗발 같은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죽을 때까지 싸웠다.”(삼국사기 열전)
신라는 고구려 멸망(668년)을 위해 당나라와 연합작전을 폈는데, 그때도 칠중성은 요처였다. 신라는 667년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지원하려고 우선 칠중성을 공격해서 ‘길을 통하게’ 할 참이었다. 이것을 보면 필부의 전사(660년)로 칠중성은 최소한 667년까지 잠시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백제통합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틈을 타 고구려가 임진강을 넘어 쟁탈의 요소인 칠중성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뒤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공략에 전념했는데, 칠중성은 고구려 멸망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교통의 요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번에는 신라의 국경이 되어 당군의 저지선 노릇을 해냈다.
“675년, (당) 유인궤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깨뜨리고 돌아갔다.… 당군이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삼국사기 문무왕조)
# 인해전술
그후 정확하게 1276년이 흐른 1951년 4월. 칠중성은 남북분단의 ‘칼날의 끝’이 되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선다. 이번엔 외국군대끼리, 즉 영국군과 중공군이 혈투를 벌인다.
22일, 캐슬고지(칠중성)엔 영국군 29여단 휘하의 그로스터 대대가 따사로운 한국의 기운을 맞이하면서 전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영국군 안소니 파라-호커리 대위(당시)의 회고.
“4월의 싱그러운 향기가 묻어난 임진강 북안엔 정적이 흘렀다. 정말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
“저기 건널목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적을 깨는 병사의 고함소리. 하나 둘, 아니 많은 중공군이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면서 임진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습격자들이 등장했다. 연카키색 군복을 입고 허름한 싸구려 면모자를 쓰고 고무창을 댄 신발을 신고 가슴과 등에는 탄띠를 교차되게 멘 수백명의 중공군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 명이 쓰러지면 두 명, 세 명, 네 명의 중공군이 자리를 메웠다.”
인해전술이었다. 1276년 전 당나라 유인궤 부대가 그랬듯, 중공군 3개사단이 서울행 직행로인 바로 그 칠중성(캐슬고지)을 친 것이었다. 성(고지)은 불과 6시간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낫으로 풀을 베듯’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만사휴의.
영국군은 후퇴하여 감악산 설마치 계곡, 즉 서울행 계곡 쪽으로 빠졌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신라 선덕여왕(638년) 고구려의 침략에 놀란 사람들이 산곡(山谷·산골짜기)으로 도망갔다”는데, 바로 이 산골짜기가 영국군이 후퇴한 설마치 계곡이겠지.
유인궤 부대는 성을 함락시키고는 돌아갔으나 이번 중공군은 달랐다. 순식간에 계곡의 양쪽을 점령한 뒤 계곡을 따라가는 영국군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단한 전과였을 것이다. 아편전쟁 때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당한 치욕을 되갚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 대검의 칼날
3일간의 격전 끝에 그로스터부대 800명 가운데 불과 50여명이 살아 남고, 포로가 되었을 정도로 궤멸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백병전까지 벌였던 그로스터 부대는 훗날 영웅으로 남았다. 중공군의 공세를 3일 지연시켜 서울의 재점령을 막은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그때 포로가 된 파라-호커리 대위는 무려 일곱번이나 탈출을 감행했다.
1953년 8월31일, 포로귀환 때 풀려난 대위는 1년 뒤 ‘대검의 칼날(The edge of the sword)’이라는 회고록(번역판은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한국언론인협회 간)을 펴냈다.
‘대검의 칼날’은 바로 칠중성과, 그곳에서 불가능한 싸움을 벌였던 영국군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파라-호커리 대위는 훗날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며, 북유럽연합군사령관(대장)에 올랐다.
2007년 4월. 그로스터 부대가 전멸한 계곡의 입구(적성면 마지리)엔 영국군 전적비가 있다. 고구려·신라·당나라군, 그리고 영국군과 중공군의 함성과 단발마의 비명이 귓전을 때린다.
아니,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파라-호커리 대위를 숨겨주다가 중공군에 들켜 죽도록 구타당한 우리네 할머니, 그리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죽어간 백성들의 넋을 잊어서는….
〈이기환 선임기자|적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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