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675m 감악산 정상(파주 적성 객현리).


감악산에서 바라본 임진강 이북땅. 언제나 그렇듯 답답한 건물들이 없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바라보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70~80도쯤 돼 보이는 가파른 경사면에서 위태롭게 사진을 찍고 있다. 곁에 권순진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가 씩 웃는다.

“막 성벽을 찾아냈는데요…. 아마도 처음 확인하는 걸거예요.”

그러면서 “이거 기삿거리 아닌가요?” 하고 농을 건다. 이번 기획을 위해 고고학자들과 문화유산 현장을 다니는 즐거움이 바로 이거다. 파닥파닥한 생선을 건져 올리듯, 바로 현장에서 생생한 유물이나 유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군사보호지역, 그리고 민통선, 비무장지대 등으로 묶이는 바람에 사람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던 ‘덕분’이겠지.

감악산 정상, 군부대가 주둔해있는 이곳엔 수수께끼 같은 옛 비석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비석은 저 멀리 개성 송악산을 바라보고 있고, 삼국시대부터 요처였던 칠중성을 품에 안고 있다. 굽이굽이 사연을 담은 임진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고….

# 설인귀 장군?

1976년쯤. ○○사단 정보과장인 윤일영 소령은 작전구역인 감악산 정상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정상에 나홀로 서있는 이른바 ‘몰자비(沒字碑·명문이 마멸된 비)’를 보고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속전에 따르면 이 비석과 비석이 있는 감악산 주변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고려사 지리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사료를 종합해보자.

“감악산은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였다. 봄, 가을로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했다. 1011년 거란병이 장단악에 이르렀는데 감악신사에 군기와 군마가 있는 것처럼 보여 거란병이 두려워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이에…(설인귀)신에게 감사하였다. 민간에 전하길 신라사람이 당 장군 설인귀를 제사하여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 세조실록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권람이 감악에서 기도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쳤다. 권람이 신(神)에게 말하길 ‘감악산 신(神)은 당나라 장수(설인귀)라는데, 나는 일국의 재상이니 맞먹어도 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무당이 ‘그대가 감히 나와 서로 버티는데 돌아가면 병이 날 것’이라고 신어(神語)를 해댔다.”

왜 뜬금없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이곳에 등장하는가. 속전에는 설인귀가 감악산 인근인 주월리 육계토성에서 태어나 맹훈련하여 당나라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분명하게 당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생이라고 중국사서에 돼 있는 설인귀가 신라땅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니….

# 영험한 땅

하지만 감악산 정상은 신라 때부터 국가가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 따르면 감악산은 상악(고성)·설악·부아악(북한산) 등과 함께 소사(小祀)를 지낸 곳이다. 신라는 대사(大祀)와 중사(中祀), 소사를 지냈다. 신라는 강역의 확대에 따라 제사 역시 늘려갔다. 감악산의 소사 역시 부아악(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추가한 제사일 것이다. 결국 설인귀와의 관련설은 그야말로 ‘속전’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감악산은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윤일영씨의 회고.

“정상의 비석도 원래는 묻혀 있었는데 누가 똑바로 세운 뒤 갓(개석)까지 새로 만들어 얹어 놓았다고 합니다. 영험하다는 소리가 있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여인네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네요.”

그런데 심상치 않은 점이 많았다.

“육사 허선도 교수님이 ‘관방지리’를 가르치면서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곳은 한결같이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떠올랐어요.”

이곳 감악산은 칠중성이 눈앞에 보이는, 삼국시대부터 그야말로 요처 중 요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몰자비’는 진흥왕 순수비가 아닌가? 순수비가 확인되는 곳을 곱씹어보자.

# 진흥왕 순수비

창녕비(진흥왕 순수비) 인근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의 의령과 함안으로 통하는 길목을, 마운령비 인근의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의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통로를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물론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또한 이 감악산 비석은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와 너무도 흡사했다. 감악산비는 높이 170㎝, 너비 74㎝, 두께 15㎝이다. 북한산비는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5㎝다. 감악산비는 해발 675m, 북한산비는 해발 556m 비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석재도 화강암으로 똑같다. 나중에 얹어놓은 덮개석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동시대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북한산이나 감악산은 신라시대부터 제사(소사)를 지냈던 곳이다.

윤일영씨는 북한군 게릴라의 침투로와 관련된 군전술 세미나에서 칠중성과 감악산의 중요도를 밝혔다. 예나 지금이나 도섭(물을 걸어서 건넘)할 수 있는 임진강의 칠중성 인근이 전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사(戰史)의 개념에서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이 원고는 1981년 1월30일 ‘임진강 전사 연구초’라는 책자에 소개됐고, 군내부에만 알려지게 되었다.

비석에 대한 정식학술조사는 82년 동국대 박물관이 맡는다. 당시 황수영 동국대 총장도 75년 이래로 감악산 고비(古碑)를 찾으려 양주군청 공보실을 자주 왕래했던 터였다. 당시만 해도 비석의 정확한 위치가 양주군 황방리로 알려져 있었다.

# 조사하면 다 나올텐데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고비(古碑).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크다. 적성/이상훈기자


여하튼 당시 황수영 총장·이기백 서강대 교수 등이 참여한 학술조사에서 이 고비가 삼국시대의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용범 당시 동국대 박물관장이 남긴 ‘칠중성과 감악산 고비 조사’(불교미술·1983년) 특집기사를 보자.

“…진흥왕대의 순수비를 염두에 두고 감악산 고비를 살펴보면 외관과 규모가 이상하리만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흡사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임창순·고병익·황원구·남도영·이병도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비문을 판독하려 애썼다. 하지만 12~13자의 자흔(字痕)만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감악산비를 친견하고, 북한산비와 비교한다면 깊은 친연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2007년 4월. 따사로운 햇볕이 감악산 정상 군초소를 지키는 초병의 얼굴을 비춘다. 정상에 마련된 헬기장 인근 땅을 살피던 이우형씨(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가 “이리와 보라”고 손짓한다.

“(땅에) 건물의 흔적이 보이네요. 건물선이 이렇게 이렇게 이어진 것 같아요.”

“조사하면 다 나와” 하고 우스갯 소리하는 개그맨의 말처럼 금방이라도 땅을 파보고 싶다.

〈이기환 선임기자|적성에서〉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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