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최대의 사찰이던 경주 황룡사터 남쪽에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대규모 ‘광장’이 존재했다는 조사성과가 정리되어 발표됐다. 이 광장은 담장과 함께 황룡사에서 동궁 및 월지 방향으로 500m 가량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동궁 및 월지(서쪽)와 명활산성(동쪽)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의 존재도 확인됐다.
동궁과 월지까지 이어진 동서도로와 광장을 표시해놓았다. 동서도로와 후에 조성한 광장은 황룡사 남문 앞에서 월지 및 동궁까지 이어진다. |신라문화유산 연구원 제공 ·그래픽 김덕기 기자
2016년부터 황룡사 남쪽 구역(3만1000㎡)을 조사중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이민형 연구원은 지난 24일 경주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황룡사 남쪽 광장 정비 및 활용을 위한 학술대회’에서 2만5000㎡(7600평·동서 500m×남북 약 50m)에 이르는 광장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민형 연구원은 이 논문(‘황룡사 남쪽광장과 도시유적 조사성과’)에서 “맨먼저 조성된 광장의 배수로를 채운 유물 중에 ‘의봉 4년명’ 기와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 터 남쪽 구역에서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1600년전 신라 광장이 확인됐다. 동궁 및 월지까지 500m(폭 50m)가량 이어진 이 광장의 규모는 2만5000㎡(7600평)에 달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의봉’은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의 9번째 연호(676~679년)이며, 따라서 ‘의봉4년’은 679년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광장의 첫번째 조성시기는 늦어도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지름 0.002mm 이하, 점토분이 12.5% 이하인 입자로 된 토양)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이후 1차 정비된 광장은 처음의 광장 위에 마사토와 사질점토를 덮고 자갈을 전면적으로 깐 모습이었고, 2차 정비된 광장은 20~30㎝의 냇돌을 자갈과 함께 깔아 조성했다. 광장의 동쪽 경계부에서는 길이 30.4m, 너비 280㎝ 정도의 넓은 배수로가 남북방향으로 연결된채 노출됐다. 1차로 조성된 광장으로 유입되는 물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시설이다.
조사구역에서 드러난 신라시대 광장. 높이 60㎝ 정도의 담장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폭은 50m 가량이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밖에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 이민형 연구원은 “너비 1.5m의 담장은 동궁(월지)까지 500m 정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팀장은 “광장의 규모는 도로를 제외한 광화문 광장(약 600m×60m) 보다는 약간 작지만 1300~1400년 전의 경주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규모”라고 설명했다. 물론 신라인들이 이 넓은 광장에서 무엇을 했는 지는 알 수 없다.
황룡사에서 월지 및 동궁까지 500m가량 이어진 대규모 광장의 세부구조.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다만 “서라벌에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삼국유사>‘원조흥법염초멸신’)는 기록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521년) 불교를 수용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에서 꽃을 피워 신라에서 결실을 맺었다.
17만8936호가 살았다는 왕경에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던 절과 탑을 상상해보라. 특히 월성 동북쪽에 우뚝 서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서라벌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탑 높이가 자그만치 80m나 됐다.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서라벌 백성들이 황룡사 앞에 조성된 광활한 광장에 모여 우뚝 솟은 목탑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과 개인의 화복을 빌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 광장에서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팔관회는 가을의 추수를 천신에 감사하기도 하고, 전사한 장병들의 명복을 비는 종교 행사였으며 문화제였다. “572년(진흥왕 33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7일간 팔관연회가 열렸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진흥왕조’ 기록이 있다. 898년(효공왕 2년)에도 “팔관회를 시작했다”는 기사(<삼국사기>)가 등장한다. 이민형 연구원은 또한 “발굴지역에서 동서도로와 남북도로 1·2호 등 도로 3곳이 확인됐으며, 시차를 두고 조성된 十자 교차로도 찾아냈다”고 밝혔다.
광장의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도 확인됐다. 가옥군은 남북도로와 작은 도로로 4개의 공간으록 구분됐다. 경주 도시계획의 치밀함을 보여준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동서도로와 1호 남북도로가 교차되는 도로는 시차를 두고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동서도로는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7세기 후반 만든 광장은 이 도로 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민형 연구원은 “폭 15~19m의 동서도로는 조사구역 전체(동서 316m)로 뻗어있었으며, 서쪽으로는 경주 동궁 및 월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도로 양쪽 가장자리는 광장을 조성할 무렵 의도적으로 매립한 흔적이 보이며 그 안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목제 도장 등의 유물과 복숭아씨, 밤껍질, 가래씨, 잣 등 자연유물이 출토됐다.
이민형 연구원은 “발굴성과 중 하나는 광장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주택단지)의 확인”이라고 밝혔다. 주택단지는 남북도로 2기와 작은 도로(小路) 2기에 의해 4개의 공간으로 구분됐다. 조성윤 팀장은 “신라의 공간은 140~160m 간격의 바둑판 모양처럼 구획되는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결과 그 사이 70~80m 간격의 작은 도로로도 나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황룡사 9층목탑과 금당이 있었던 자리. 13세기 몽골침입 때 소실됐다.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만 80m 가량 되었다. 17만8000호가 넘는 서라벌 주민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항룡사 앞에 조성된 광장에서 나라와 개인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밖에 황룡사는 연약한 습지 위에 흙을 성토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민형 조사원은 “특히 이 넓은 대지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크고작은 구획으로 나눠 45도 경사지게 성토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원활한 배수를 위해 굵은 돌과 자갈, 그리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았다”고 전했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 건립된 사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은 “진흥왕이 처음엔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 조영으로 계획을 바꿨으며 17년 만인 569년(진흥왕 30년) 절(황룡사)을 완성했다”고 기록했다. 이 절에는 신라의 세가지 보물(三寶·장육존상, 9층목탑, 천사옥대) 중 두 가지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지만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됐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황룡사 광장과 담장, 동궁 및 월지까지 이어진 도로 등을 연결하는 유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하면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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