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가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요지경(瑤池鏡)은 확대경 속에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그림을 돌리면서 구경하는 장치나 장난감 상자’라 풀이했다. 천태만상의 세태라는 뜻이지만 ‘요지경 속 세상’이라는, 약간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하지만 ‘요지경(瑤池鏡)’의 유래를 안다면 쉽게 그런 뜻으로 쓸 수가 있을까. ‘요지’는 신선들의 땅이라는 중국의 곤륜산(崑崙山) 정상에 있었다는 연못이다. 중국 주나라 목왕이 신선들의 우두머리인 서왕모를 만났다는 곳이다.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 정상의 연못인 요지에서 펼쳐진 화려한 연회모습을 그린 ‘요지연도’ 8폭병풍. |이화여대 박물관 제공
“서쪽에서 선경 떠나 하늘에서 내려와(西離仙境下雲宵) 천년의 신령스러운 복숭아를 드립니다(來獻千歲靈桃). 임금의 보령 하늘 같기를 축수 올리며(上祝皇齡齊天久)….” 중국의 당악곡에 등장하는 서왕모와 주목왕의 이야기다. 서왕모가 주목왕에게 3000년만에 한번씩 열매가 열린다는 선경(仙境)의 복숭아(반도)를 선물했다는 내용이다. 인간이 이 복숭아를 먹으면 1만8000년을 산다고 했으니 주목왕은 서왕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간세계의 임금 임에 틀림없다. 서왕모는 왜 주 목왕에게 이 신령스러운 복숭아를 주었을까.
‘요지연도’에서는 연회의 가장 중요한 초청손님인 주 목왕이 서왕모 옆에 앉았다. |이화여대박물관 제공
서왕모는 신들의 땅인 곤륜산에 살았다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 최고의 여신이다.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산해경>에서는 반인반수의 존재로 묘사됐다가 기원후 3세기 무렵부터는 주 목왕과의 에피소드 등을 통해 인간의 신으로, 급기야는 불로장생의 약을 주는 여신으로 탈바꿈한다.
주 목왕은 서주(기원전 1043~771년)의 5대 임금(재위 기원전 977?~922?)이다. 55년의 재위 기간 중 견융과 서융 등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알려져있다.
‘요지연’에 속속 도착하는 신선들. 향아와 수성노인, 왕자교, 소사와 농옥 등이 보인다. |이화여대박물관 제공
<죽서기년>과 <사기> ‘주본기’ 등에 따르면 주 목왕은 나라가 평안해지자 천하를 순행했다. 서왕모-주 목왕의 에피소드는 이 순행 과정에서 탄생한다. 사실과 신화가 혼합된 일화는 서진 시기(기원후 265~316)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목왕의 전기소설(<목천자전>)에 자세히 등장한다.
기원전 10세기 음력 3월3일 어느 날 서왕모는 팔준마를 타고 서쪽을 순행하던 주 목왕을 곤륜산 정상의 연못(요지·瑤池)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했다. 이날의 연회는 서왕모의 생일잔치였다. 목왕은 초대장을 받은 유일한 인간이었지만 서왕모의 곁에 앉는 영예를 누린다. 이때의 연회를 그린 ‘요지연도’를 비롯한 서왕모 관련 그림들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면서 전해졌다.
‘요지연’에 속속 도착하는 신선들. 향아와 수성노인, 왕자교, 소사와 농옥 등이 보인다. |이화여대박물관 제공
그 중 19세기 조선에서 그려진 ‘요지연도’가 12일부터 12월31일까지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열리는 ‘19세기 조선의 풍경’ 특별전에 출품된다. 작품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서왕모와 주 목왕의 특별한 만남을 3분30초간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김주연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은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목왕과 신선들 뿐 아니라 19세기에 유행한 소설(<구운몽>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잔치의 흥을 돋우는 풍경을 연출한다”고 밝혔다.
‘요지연도’를 보면 주나라 목왕이 팔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하루 1만리를 달려 서왕모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곤륜산 정상의 요지에 도착한다. 초청자 중 유일한 인간인 목왕은 착하고 인자한 인품으로 나라를 다스린 태평성대의 임금을 대표한다. 연회에는 항아, 수성노인, 왕자교, 그리고 소사와 농옥 등이 참석한다. 항아는 화살로 하늘에 떠있는 10개의 태양을 떨어뜨린 예의 부인이다. 남편이 갖고있던 불사약을 훔쳐먹고 달로 도망가서 달의 신이 됐다. 항아의 발 앞에 옥토끼가 있다.
1897년 거행된 명성황후의 발인 행렬도. 명성황후의 발인은 시해된 뒤 2년만에 거행됐다. |이화여대 박물관 제공
수성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을 인격화한 신선이다. 장수를 의미한다. 왕자교는 주나라의 왕자였는데, 도사와 함께 사라졌다가 30년만에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나타났다. 피리를 잘 불었던 소사·농옥 부부는 봉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신선들이다. 신선들과 함께 있는 동자는 순진무구하고 티없는 순박함으로 선(善)을 상징하는 존재다.
또 가난, 부귀, 귀족, 평민, 늙음, 젊음, 남성, 여성 등 다양한 모습을 상징하며 무병장수와 기복적 소원들 들어준 팔선(八仙)도 등장한다. 이밖에도 노자와 이백(701~761), 장지화(732~774) 등 신선처럼 살았던 인물들도 등장한다.
조선 말기의 서화가인 정학교가 그린 ‘괴석’. 바위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했다. |이화여대 박물관 제공
왜 이 ‘요지연도’ 애니메이션에 19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서유기>와 <구운몽> 등 소설속 주인공들을 등장시켰을까. 김주연 연구원은 “임진왜란·병자호란 같은 참혹한 전쟁을 겪은 뒤의 조선 후기 상황을 반영했다”고 밝혔다. 조선은 물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유교국가였다. 하지만 불사약을 지닌 서왕모는 백성들이 꿈꿔온 낙원을 실현시켜줄 구세주로 추앙받았다. 그런 관념이 유교국가의 왕실에게까지 퍼졌다니 놀라운 일이다. 단적인 예로 숙종(재위 1674~1720)은 궁중에서 그린 ‘요지연도’에 직접 시를 남기기도 했다.
“요지에서 연회 열리니 신관이 몰려오고(瑤池設宴會神官)…전각 안 서왕모는 구룡관(殿中王母九龍冠)…늙지 않는 반도는 옥쟁반에 가득(不老蟠桃滿玉盤)….”(<열성어제> ‘숙종 제요지대회도’)
18~19세기는 대동법의 확대시행 등으로 바닷길과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급증했던 시기였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넘쳐났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1792년(정조 16년) 박제가(1750~1805)는 ‘성시전도시’에서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고 읊었다.
도시와 경제의 발달로 상품경제가 활성화한 19세기에 들어서면 무병장수와 부귀영화의 염원이 일반 백성에게까지 대중화한다. 이때 ‘요지연도’가 더욱 활발하게 제작된다. 김주연 연구원은 “이번 특별전에서 ‘요지연도’를 통해 19세기 사람들이 염원했던 세상을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특별전에는 ‘요지연도’ 외에 변혁의 시기인 19세기 조선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소개된다. 이중 명성황후(1851~1895)가 조카인 민영소(1852~1917)에게 보낸 친필 한글 편지 3통이 흥미롭다.
“여기(궁궐 안)는 상감마마 기후 문안 두루 평안하시고 동궁의 기거동작 태평하시니…나는 한가지다 오늘도 일기가 한랭하며 오응선이는 그리하겠다(네가 말한 대로 관직을 조치하겠다)”.
“글씨(편지) 보고 야간 무탈한 일 든든하며…여기는(=나는) 한가지나(전과 마찬가지나) 늘 몸이 깨끗하지(병이 깨끗이 낫지) 아니하니 답답하고 괴로우며 오늘 일기도 매우 온화하다”.
조희룡의 ‘묵매도’. 조희룡은 여항문인화가로서 용의 모습을 차용해서 매화도의 골격을 삼았다. |이화여대 박물관 제공
편지의 형식은 비슷하다. 상감(고종)과 동궁(순종)의 인부를 언급하는 형식이 명성황후 한글편지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첫번째 편지에서는 ‘오응선’이란 인물의 관직과 관련해서 의견을 전한 조카 민영소에게 “(네가 말한대로) 그리 하겠다”고 동의하는 내용이다. 민씨 일가가 인사 문제에 간여했음을 보여주는 정황을 드러난다. 두번째 편지는 가족에게 “몸이 좋지않아 괴롭다”는 심경을 전하는 명성황후의 인간적 모습이 담겨있다. 장남원 이화여대 박물관장은 “이 편지 3통은 이전에 소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자료”라면서 “청나라에서 수입된 색상과 문양이 있는 시전지에 쓰여있어 19세기말의 시전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밝혔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전체길이가 21m가 넘어서 전시에 한계가 있었던 ‘명성황후 발인 반차도’를 실사 출력해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명성황후 발인반차도’는 시해(1895년) 2년만인 1897년(광무 1년) 거행된 발인행렬을 그린 기록화이다.
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소개된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서화가이자 괴석도의 명인인 정학교(1832~1914)의 ‘괴석(怪石)’과 조희룡(1789~1866)의 ‘묵매도’ 등이 출품된다. 또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1870년(고종 7년) 박규수(1807~1876) 등 20여 명과 함께 운현궁 모임을 연 뒤 이를 기념해서 만든 시화첩(<운계시첩>)도 전시된다.
선교사인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1623~1688)가 1674년(현종 15년) 제작한 세계지도인 ‘곤여전도’의 해동판(1860년)도 출품된다. 또 화가 조석진(1853~1920)이 당대 최고 정책결정기관으로서 갑오개혁을 추진했던 군국기무소의 회의 장면을 그린 ‘군국기무소 회의도’ 또한 19세기 당대의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홍집(1842~1896)을 비롯한 박정양(1841~1904), 김윤식(1835~1922), 유길준(1856~1914) 등의 모습이 보인다. 이밖에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의 수행비서인 강진희(1851~1919)가 부둣가 잔교에 선 2명이 바다로 떠나는 장면을 그린 ‘잔교송별도’도 소개된다. 미국에서 조선으로 먼저 돌아가는 일행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담은 작품이다.
특별전에는 ‘책거리 10폭 병풍’, ‘철제은입사 십장생문 담배함’, ‘수선전도’, ‘노안도 6폭병풍’, ‘화각함’(의류·패물 등을 넣어두는 나무상자). ‘백자 복숭아(도형) 연적’, ‘백자 청채 양각 십장생 육각병’ 등 19세기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출품된다. 장남원 관장은 “관람객들은 가상현실(VR) 기법으로 활용한 온라인 전시관을 통해 전시장을 자유롭게 관람하고 망원경을 이용해 조선의 풍경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 19 유행에 따라 특별전은 ‘예약 후 관람’이 원칙이며 토~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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