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로타리(회전교차로) 같은데….” 지난 2016년 몽촌토성의 북문터를 발굴하던 조사단(한성백제박물관)은 재미있는 도로유구를 확인하게 된다. ‘평평한’ 대지를 가운데 두고 삼국시대에 조성된 포장도로(노면 폭 10m)가 빙 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이 도로는 북쪽으로 700m 떨어진 풍납토성과 이어지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백제의 도성(북성)을 7일 만에 빼앗고 (개로왕이 몸을 피한) ‘남성’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북성이 풍납토성이고, 남성이 몽촌토성임을 암시하는 자료가 바로 몽촌-풍납을 잇는 도로였던 것이다.
■1500년전 회전교차로(로터리) 확인
조사단은 처음 보는 로터리형 도로가 신기했다. 한가운데 조성된 평탄지는 요즘 로터리에 조성해놓은 잔디밭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조사해보니 이 평탄공간에는 물을 모아두는 집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3m 깊이에서 확인된 집수지는 정사각형 형태를 띠었고, 면적이 60평(14×14m) 정도이니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1600년 전 한성백제인들은 연못처럼 조성한 집수지를 한가운데 둔 로터리를 돌아 풍납토성-몽촌토성을 왕래했을 것이다.
도로와 집수지를 본격 조사하면서 의미심장한 자료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먼저 백제가 조성한 도로를 고구려와 통일신라가 증·개축해서 사용했다는 증거가 나왔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의 수레바퀴 흔적이 보였다.
집수지의 경우는 달랐다. 백제가 만들고, 고구려가 다시 쌓아 활발하게 활용한 것은 도로와 같다. 그 안에서는 한성백제시대 유물도 섞였지만 고구려 유물들이 다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유물은 없었다.
집수지는 백제에 이어 이곳을 점령한 고구려가 증개축해서 활발하게 사용하다가 어느 시점에 폐기했고, 이후(통일신라시대)에는 평탄대지로 남겨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가장 오래된 고구려 목간?
무엇보다 한성백제의 도성체계에 속하던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유구와 유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2013년부터 이뤄진 몽촌토성 북문터 조사에서 도로와 집수정 외에도 고구려가 수리하거나 개축한 건물터와 구덩이가 계속 확인되었다. 또 원통형 세발토기·두 귀 달린 항아리·시루·바리·화살촉 등 전형적인 고구려 유물들이 다수 출토됐다.
급기야 근자에는 지난해(2021년) 4월 집수지에서 고구려가 제작한 명문 목간이 확인됐다는 조사단의 발표가 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목간의 연대측정 결과 469~541년 사이에 제작됐다는 것이다.
조사단(한성백제박물관)은 “집수지를 개축할 때 쓰인 벽면 목재의 연대측정결과도 비슷했다”면서 “이 목간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475~551년 사이 몽촌토성을 장악·운영했음을 알리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이게 맞다면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고구려에서 처음 발견된 획기적인 목간자료가 된다. 지금까지 출토된 목간은 560년 이후 7세기까지 신라와 백제에서 작성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목간의 명문내용은 아직 판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산’으로 확정짓기는 어렵다. 목간이 공개되자 “집수지라는 특수성에 따라 백제 목간이 쓸려 들어간게 아니냐” “목간 형태로 보면 신라목간(함안산성)과 흡사하다”는 등의 갖가지 이견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명문해독이 뒤따라야 할 것 같다.
■고구려가 대전까지 남침했다?
필자는 명문 목간의 발굴을 계기로 새삼 들여다 본 자료가 있었다. 그것은 ‘475~551년 사이의 역사’였다.
간단히 보면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475년(백제 개로왕 21·고구려 장수왕 63)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고 웅진(공주)으로 밀려 내려갔다. 그랬다면 당연히 고구려가 나제 연합군이 밀고 올라온 551년까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어야 옳다.
마침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의 <고구려 고고-유적 편>에 게재된 최종택 고려대 교수의 논문(‘남한의 고구려유적’)은 지금까지 조사된 남한내 고구려 유적의 현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1988년 몽촌토성 발굴에서 전형적인 고구려토기(광구장경사이옹·입이 넓고 목이 길며 받침귀가 4개 달린 항아리)가 확인되고, 한강 북안지역인 구의동·아차산 보루(22곳) 등이 고구려 유적임이 밝혀졌다.
또 임진·한탄강 유역~경기 양주 분지에 50곳 가까운 고구려 보루가 집중되어 있다. 이뿐이 아니다.
경기 남부인 안성천·미호천 유역(안성 도기동 산성·진천 대모산성)은 물론 금강유역(세종 남성골 산성 및 나성)과 심지어는 대전(월평동산성)까지 고구려의 흔적이 속속 확인되었다. 비단 산성·평지성 뿐이 아니다.
고구려인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성남 판교동, 용인 보정동 및 신갈리, 화성 청계리 등에서 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남한지역 고구려 고분은 67기에 이른다. 또 용인(마북동) 등에서 고구려인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취락유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성곽과 고분, 취락유적(추정) 등의 특징이 하나 있다.
몽촌토성을 거점성으로 해서 대부분 고구려군의 남하루트를 따라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강 이남~공주 사이에서 웅진 백제의 유적·유물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475년 이후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폭넓게 차지했다는 또 다른 증거로 꼽히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내용이다.
‘지리지’는 아산만에서 경북 일부까지 남한지역 48개 군현을 고구려 명칭으로 기록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고구려 강역도’도 현재 행정구역상 경기와 충북, 강원 전역과, 경북 일부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포함시켰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취 이후 남한 지역을 영토화하여 고구려의 행정편제에 편입시켰다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얘기인가.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오류 투성이다?
그렇지만 좀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지금도 숱한 논쟁을 자아내는 ‘475~551년 사이’, 즉 76년의 역사이다. 만약 고구려가 고고학적인 성과 등을 토대로 475년에서 551년까지 한강 유역과 이남을 차지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삼국사기> ‘본기’의 내용들이 전부 새빨간 거짓말로 바뀌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국사기> ‘백제본기·개로왕조’를 보자.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은 아들(문주)을 신라에 보내 구원병을 청한다. 그러나 문주가 신라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성은 함락된 상태였다.
<삼국사기>는 “문주가 돌아왔을 때, 고구려군은 비록 물러갔고, 성은 파괴됐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는 급히 왕위에 오른 문주왕이 그해 10월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고 썼다. <일본서기> 476년조의 내용도 비슷하다.
“백제 멸망 뒤 고구려의 장수들이 ‘백제의 잔당이 언제 다시 살아날 줄 모르니 끝까지 쫓아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장수왕이 만류했다”는 것이다.
이후의 <삼국사기> 본기의 기록도 심상치 않다. 웅진 천도 이후 정변(문주왕·475~477)으로, 요절(삼근왕·477~479)로 두 임금을 잃은 뒤 왕위에 오른 동성왕(479~501)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동성왕은 495년(동성왕 17) 치양성(황해도 백천)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무찌르는 등 웅진 천도 후 추락했던 백제의 국세를 어느 정도 추스른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501~523)은 백제의 중흥군주였다.
무령왕은 수곡성(황해도 신계) 등 고구려와의 변경지역을 공격했고(501년), 쳐들어온 고구려(말갈 연합군)와 고구려·말갈군을 마수책(포천)·고목성(연천)과 횡악(삼각산) 등에서 쫓아냈다.(503~507) 이어 가불성·원산성(위치 미상)을 침공해온 고구려군을 대파한다.(512년) 그런 다음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갱위강국’을 선언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523~554)도 초기에는 패수(황해도 예성강)까지 올라갔다가 오곡(황해도 서흥)에서 패했다. 그런데 이런 기사는 ‘백제본기’ 뿐이 아니라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475년 이후 한강 유역은 물론이고 금강 유역까지 쳐내려왔다는 고고학적인 성과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연구자들은 백제가 웅진천도 후 한성시대 때의 지명을 그대로 갖고와 남쪽 지방에 사용했다는 이른바 ‘지명이동설’을 주장했다. 미국이나 호주에 이민온 영국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영국 지명을 쓴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럼 천도 후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싸웠다는 곳의 지명은 모두 웅진 이남이라는 건가. ‘견강부회’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어떤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역사기록들이 편년상 오류일 가능성이 짙다고 주장한다.
한성백제 초기에 나올만한 ‘말갈’이 뜬금없이 무령왕조에 등장한다든가,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대에 고구려와 각축을 벌인 황해도 성(치양성과 수곡성)이 갑자기 5세기 후~6세기 초인 동성왕과 무령왕 시대에 나오는 게 수상하다는 것이다.
눈여겨 볼 견해이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삼국사기> ‘본기’ 기록 전부를 믿기 어려워진다.
과연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가장 중요한 본기’를 쓰면서 ‘가장 중요한 편년’을 두고 한번도 아니라, 그처럼 여러 차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일까.
필자는 전공자는 아니지만 ‘상식적’이라는 수식어를 쓴다면 ‘편년상 오류’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고고학 성과와 역사자료의 간극
그렇다면 역사기록과 고고학적 성과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상당수 연구자들은 절충을 시도하고 있다.
그중 상식적인 해석을 위주로 검토해보자. 즉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475년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을 점령한 고구려 장수왕은 돌아간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곧 몽촌토성을 거점성으로 확보한 뒤 웅진으로 쫓긴 백제군을 따라 남하했고, 대전(월평동)까지 밀고 내려온다. 남하 루트의 요충지에 쌓은 산성 및 평지성, 제법 확인되는 고구려 고분, 그리고 취락유적일 가능성이 있는 거주의 흔적 등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언제까지 한강 이남을 점령했는지, 또 통치방식은 어땠는지는 아직 설왕설래 중이다.
먼저 고구려군의 점령기간이 짧았다는 견해도 있다. 우선 한강 이남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의 연대폭이 475년을 기준으로 그리 길지 않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컨대 몽촌토성의 유물(5세기 후반)과 강북에 있는 아차산·구의동 보루 출토품(6세기 전반)의 연대에 시기차가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남하루트상에 있는 진천의 대모산성과 세종 남성골 산성 및 나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이 몽촌토성과 비슷한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따라서 475~500년 사이 몽촌토성을 거점성으로 삼고 계속 남진했던 고구려가 500년 무렵부터는 한강 북변인 구의동과 아차산 보루로 거점을 옮겼다는 것이다. 또 고구려군 남하루트에 조성된 성들은 극히 일부를 빼고는 비교적 규모가 작고, 고분 또한 대부분 1~2기씩 조성되어 있다는 것도 주목거리다. 이 또한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지배가 짧았다는 반증이 된다.
■‘선(線) 지배’인가 ‘면(面) 지배’인가
그렇다면 짧든 길든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접수한 한강 이남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기간이 짧았다 해도 고구려가 영역지배를 시도했다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은 물론이고, 고구려군의 남하루트상에 있는 성 가운데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성곽(안성 도기동 산성 및 세종 남성골 산성)은 영역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고구려의 보루와 산성 및 평지성들이 남하루트를 중심으로 비교적 작은 규모로 점점이 조성됐고, 그것을 이어보면 ‘선(線)’을 이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구려는 점령지역을 ‘선(線) 지배’했지, ‘면(面) 지배’는 하지 않았다는 견해이다.
따지고보면 고구려가 점령지역을 행정적으로 관리했다는 증거는 없다. 영역화의 핵심은 세금 수취라 할 수 있는데, 고구려가 점령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세금을 받았다는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궁금증에 생긴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경선이 지금처럼 칼 같이 나뉘어졌을까. 지금의 잣대로 삼국의 국경을 긋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여러 연구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고구려가 475~551년 사이에 76년간 한강 이남을 점령했다고 치자. 그런 상황에도 백제군이 고구려군의 주둔지역을 우회한채 북상해서 경기 북부~황해도 지역까지 올라가 그곳의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고구려가 475~500년 사이 즉 20~30년간 한강 이남을 점령한 뒤 강건너로 철수했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고구려의 점령지역이던 곳은 일종의 공지(空地)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한강 이남에서 웅진 백제 시기의 유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준다. 이 지역은 백제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며 뺏고 뺏기는 양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백제와 고구려간의 전투가 아니었을까.
얼마전 필자는 몽촌토성에 조성된 백제시대 로터리(회전교차로) 앞에서 고민에 빠진 바 있다. 로터리 한가운데 조성된 집수지의 조성주체는 누구며, 거기서 나온 목간은 과연 어느 나라 것인지 조사 요원들과 열띤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각종 논문을 읽어보고 연구자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불현듯 지금의 잣대로 ‘475년 이후 한강 이남의 영역논쟁’을 벌이며 ‘내가 맞다 네가 틀리다’고 핏대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어떤 연구자의 언급이 귀에 와닿았다. “백성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쟁탈전 와중에 어느날은 고구려군에, 어느날은 백제군에, 또 어떤 날은 오전은 백제군에게, 오후는 고구려군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세금을 빼앗겼겠죠.”
아차! 그 생각은 안해보고 메마른 논쟁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연구자라면 몰라도 명색이 역사스토리텔러하는 자가….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이 기사를 위해 최종택 고려대 교수,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 권오영 서울대 교수, 박현숙 고려대 교수,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 정재윤 공주대 교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김재홍 국민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박중균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발굴조사팀장, 최진석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학예연구사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최종택, ‘남한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 고고-유적 편>(고구려통사 8),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연구소편, 동북아역사재단, 2021
강종훈, ‘5~6세기 국경변동에 관한 제설의 검토’, <대구사학> 116호, 대구사학회, 2014
심광주, ‘고구려의 관방체계와 경기지역의 고구려 성곽’, <경기도 고구려유적 종합정비계획>, 경기도 문화재단, 2008
김기섭, ‘서울의 선사시대·고대사 연구현황’, 서울역사편찬원, 2018
안신원, ‘최근 한강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고분’, <고구려발해연구> 36권, 고구려발해학회, 2010
양시은, ‘남한지역 출토 고구려 토기의 현황과 특징, <호남고고학보>46권, 호남고고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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