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경호처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그 가족의 경호업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틈을 내어 펴낸 책이 두 권이 있으니 그것이 <청와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2007년 초판·2019년 증보판)과 <청와대의 나무와 풀꽃>(2019년)이다.
청와대와 그 주변이 어떤 곳인가.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습격사건(1·21사태) 이후 청와대 앞길을 물론 인왕산과 북악산의 통행도 철저히 통제됐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부터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 등의 통행이 허용되고, 개방의 폭도 점차 확대됐다. 요즘은 매주 화요일~금요일, 둘째·넷째 주 토요일(공휴일 제외)에 청와대 내부관람(총 1시간 30분)까지 가능해졌다.
북악산도 2006년 성곽로에 이어, 2020년 북측 둘레길까지 개방되더니 이 기사가 신문지면을 탄 5일 오후 청와대 뒤쪽 북악산 남측면까지 완전 개방됐다. 그처럼 서서리 달려져온 분위기가 반영된 것일까.
매의 눈이 트레이드 마크인 경호원들이 굳은 얼굴을 풀고 역사동호회를 결성했다는 것도 익숙한 뉴스가 아닌데, 한발 더 나아가 청와대 내외부 곳곳을 답사한 결과물을 책으로 펴냈다. 다른 이들도 아닌 경호처 요원들이 청와대 가장 깊숙한 곳까지 공개하고 사진까지 찍어 스토리텔링했으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이 든다. 발간자료를 보니 올해(2022년)를 목표로 북악산의 완전 개방을 추진해왔단다. 그러고보면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는 것과 관계없이 청와대와 그 주변은 시민의 품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 썩어 1000년
이 두 책에서 필자의 눈길을 잡아끈 ‘살아있는 역사적인 상징’이 있다. 청와대 옛 본관터에 서있는 주목이다.
줄기가 붉어 ‘주목(朱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나무의 수령이 744년이라 한다.
그렇다면 1278년(충렬왕 4) 무렵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다는 뜻이다. 경호처의 의뢰로 이 나무를 진단한 학자들의 말을 빌면 ‘살아있는게 기적’일 정도로 부실하다.
줄기 대부분이 죽어버렸다. 극히 일부의 줄기 만이 한뼘 남짓한 폭으로 세로 띠를 이루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은 그리 호락호락한 나무가 아니다.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 썩어 1000년, 합해서 3000년’이라는 속설이 있다.
지구상엔 3억년 전부터, 한반도에는 200만 년 전부터 자리를 잡았다. 추위에 잘 견뎌서 극한의 고산 지대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꼴은 이래도 500년을 버텨온 나라(조선)요.”
그렇다. 지금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740여 년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지켜본 나무가 아닌가. 그 세월동안 제 잘났다고 설치던 뭇 인물을 가소로운듯 바라보았을 것이다. ‘100년도 못사는 주제에 잘난체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집무실 따로, 관저 따로’의 결과
주목이 서있는 청와대 옛 본관터는 조선 말~대한제국시기의 건물인 수궁터이기도 하다.
‘수궁(守宮)’은 경복궁 후원, 즉 지금의 청와대터를 지키는 군사(금위군)들을 위한 건물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다른 건물과 함께 훼철되었고, 조선총독부가 이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1939년)
해방 후에는 미군정 최고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재임 1945~1948)의 숙소였다가 ‘초대 이승만(경무대·1948~1960)~윤보선 대통령(청와대로 개명·1960~1962)’을 거쳐 1990년까지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집무실이 좁다면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관저도 따로 조성했다. 그러나 ‘집무실 따로, 관저 따로’ 조성의 배경에는 풍수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사를 끝낸 당시의 청와대 홈페이지는 “새로 완공된 본관은 옛 기맥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북악산정(山頂)-경복궁-광화문-관악산을 잇는 축선에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옛 본관은 빈집이었다가 1993년 일제 잔재의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철거됐다. 경호처의 발간자료(<청와대의 역사문화유산>도 “옛 청와대 본관 자리는 주변 지형을 따라 흙으로 돋우어 훼손된 명당·길지의 회복을 도모했다”고 썼다. 풍수를 고려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집무실 따로, 관저 따로’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지독한 불통’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난리법석을 지켜보았을 주목이 혀를 끌끌 찼지 않았을까.
■1000년의 수도
이쯤에서 주목이 처음 뿌리를 내린 740여 년 전(1270~1280년대)으로 돌아가본다.
1283년(충렬왕 9) 왕과 공주가, 2년 뒤(1285) 왕이 사냥을 했거나 행차했다는 <고려사> 기록이 보인다. 충렬왕(1274~1308) 뿐이 아니었다. 숙종(1095~1105), 예종(1105~1022), 인종(1122~1146), 의종(1146~1170)의 어가가 남경을 오갔다.
“면악(북악산) 남쪽 땅에 도성(남경)을 세운 뒤 임금이 개경, 서경(평양) 등과 함께 1년에 4개월씩 머물면 800년간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술사들의 예언 때문이었다.
<고려사>는 “문종(1046~1083)과 숙종이 남경에 궁궐을 세웠다(1068·1104년)”고 기록했다.
경호처 발간자료의 설명대로 풍수지리가 대유행했던 고려시대부터 청와대터가 ‘명당·길지’로 꼽혔음을 알 수 있다.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1213~1259)은 남경의 임시궁궐에 자신의 옷과 허리띠를 가져다 놓기도 했다.
‘청와대 주목’이 원나라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270년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주목에 눈이 있었다면 원나라의 부마가 된 고려왕(충렬왕)의 어가(1283·1285년)를 보았을 것이다.
이후 고려말 공민왕(1351~1374)과 우왕(1374~1388), 공양왕(1389~1392) 등은 아예 남경 천도를 계획했거나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거나(공민왕) 준비부족 등(우왕·공양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대를 이어 충성하라’
조선 개국과 함께 “좁은 고려 남경의 궁궐터 남쪽에 새 궁을 세운다”(<태조실록>)는 방침에 따라 경복궁이 건설된다. 남경 궁궐터(청와대터)엔 임금이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을 모아 충성서약을 받는 회맹단이 설치됐다.
회맹단은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해당된다. 태종(1400~1418)·세조(1455~1468)·중종(1506~1544) 등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주들과, 전란 등의 책임을 져야 할 선조(1567~1604), 3차례 친위쿠데타로 정국을 주무른 숙종(1674~1720)까지 주로 정변이나 전란, 친위쿠데타의 장본인들이 회맹단에 앉아 신료들의 충성을 저울질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270여년간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도 임금과 공신 및 적장자들의 충성맹세식은 변함없이 회맹단에서 열렸다. 그러나 회맹제가 열릴 때를 제외하면 적막했던 것 같다.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시(회맹단)가 분위기를 일러준다.
“성 북쪽에 하얀 모래 깎은 듯이 평평한데(城陰白沙平如削) 네모진 회맹단 쌓인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네(妥帖方壇自古昔) 나라가 선 이후에는 바로 일(회맹제)이 있었으나(有國由來卽有事) 일 지나고 사람 없어 텅 빈 채로 적막하네.(事過無人空寂寞)”
■경복궁의 후원이 된 경무대
남경 궁궐(고려)→회맹단(조선후기까지)이었던 청와대터는 경복궁 중건(1865~1868)과 함께 궁의 후원으로 거듭난다.
경복궁의 후원이었으니 일반인들의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임금이 드나드는 후원(청와대터)의 정문이 되었다. 후원은 1868년(고종 5) 7월부터 이듬해(1869년) 7월까지 융문당, 융무당 등 모두 488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그중 핵심은 1960년대 초까지 ‘경무대’로 통칭됐던 융문당과 융무당이다. 융문당은 왕 또는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회를 열던 곳이다. 당시 실시하던 과거 시험의 중심건물이었다. 융무당 역시 과거 시험의 무과와 활쏘기 시합, 군사들의 교체훈련 및 사열 때 사용됐다. 그러나 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는 운명을 맞는다.
조선총독부는 1928년 8월 13일 무렵 두 건물을 일본 불교 종단(진언종)에게 무상으로 대여했다. 헐린 재목은 일본 사찰인 고야산 용광사(한강로)의 본전과 부속전각 건립에 쓰였다.
경무대로 통칭되던 융문당·융무당 자리에는 녹지원(청와대)이 들어섰다.(1968년) 이곳에는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를 포함, 120여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해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의 행사가 열린다. 1983년 청와대 의전 행사를 위한 시설로 지은 상춘재 역시 융문당 자리에 세웠다.
■천하제일복지와 천하제일복지천
옛 융문당의 북쪽 절벽 밑(현 대통령 관저 뒤편)에는 왕의 휴식공간인 오운각과 옥련정이 있었다. 특히 오운각 일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과 관련되어 참담한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고종실록>은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일본인들에 의해 불태워진 시신을(황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수습해서 오운각 서봉 밑에 매장했다”고 기록했다.
오운각과 옥련정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지금의 대통령 관저 뒤, 즉 북악산 기슭의 거대한 화강암벽에 새겨진 명문 표석도 눈길을 끈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즉 이곳이 천하제일의 명당이라고 새긴 바위 글씨이다. 이 표석은 1990년 대통령 관저를 새롭게 지을 때 발견됐다.
그런데 <궁궐지>(1907년)를 보면 “북쪽에는 ‘천하제복지천(天下第福地泉)’이라는 이름을 가진 샘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샘은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의 아래와 대통령 관저 뒤쪽 사이에 있다.
인근지역에 있는 ‘천하제일복지’ 명문표석과 ‘천하제복지천’이라는 샘이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시 청와대 일대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당 혹은 길지로 여긴 이들이 새겼을 것이다.
■미남불상의 행방?
2018년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은 아마 청와대 내부 문화유산 중 가장 유명한 유물일 것이다.
‘미남불상’으로 알려진 이 불상은 원래 경주 이거사터(추정)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1912년 경주를 방문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穀·1852~1919)가 이 불상을 보고 군침을 흘리자 경주 금융조합 이사인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가 잽싸게 상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상은 남산 왜성대(예장동) 총독관저 뒷산 계곡에 모셔졌다가 1939년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진다.
이후 이 불상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졌다가 1993~94년 사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구포역 열차전복·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서해 페리호 침몰·성수대교 붕괴·충주호 유람선 화재 등 온갖 참사가 줄을 이었다. 그러자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관저 뒤편에 있던 불상을 치워버려서 각종 사고가 줄을 잇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급기야 청와대가 이 불상을 공개하는 자리까지 마련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불상은 원래의 자리에서 위치이동되었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관저를 신축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100m쯤 올라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지금의 영빈관 부근에는 1893년(고종 30) 조성된 팔도배미가 있었다. 팔도배미는 임금이 친히 농사를 체험하고 권장하며,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전답이다. 8개도에서 올라온 곡식종자를 8배미(구획된 논을 세는 단위)로 나눠 친히 심어본 것이다.
그 뒤편에는 경농재와, 그 부속건물을 잇달아 지었다. 고종이 농사를 체험할 때 사용한 건물들이었다. 그러나 1937~39년 사이 이곳에 총독관사를 지을 때 철거됐다.
■명승 북악산의 풍치
<북궐도형>(경복궁과 후원의 배치도)에 따르면 후원(청와대 터)에 둘렀던 궁장(궁의 담장)의 길이는 698.5칸(약 1675m)이었다. 현재 청와대 권역을 두른 담장도 고종 때 쌓은 후원의 궁장터를 기초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을 드나드는 문은 정문(신무문)과, 춘생문, 춘화문, 추성문 등이다.
이중 총리공관 쪽 능선과 연결되는 춘생문은 1895년(고종 32) 11월 일어난 ‘춘생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즉 50여 일 전인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반일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틈을 타 친미·천러파가 정권을 잡기 위해 국왕(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했다. 군사 행동을 감행한 당시 옛 시위대 군인 800명이 춘생문의 담을 넘으려 했지만 실패한다.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로 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1867~1946년)이 변심했기 때문이다.
담장을 넘으려던 시위대 군인들은 이진호의 밀고에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의 반격을 받는다. 사건의 후폭풍은 거셌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 중이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주모자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했다. 청와대 앞길 서쪽에 자리잡은 분수대 앞도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4·19 최초 발포의 현장’임을 알리는 표지판(동판)이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쯤 시민을 향해 첫 발포한 현장이다. 이날 첫 발포로 시민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다쳤다. 표지판은 4·19혁명 58주년(2018년)에 맞춰 설치했다.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형태로 제작했다.
■장동팔경의 풍치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해발 342m)은 예부터 서울의 주산으로 대접받았다.
조선 개국과 함께 북악산을 나라를 지키는 호국백(護國伯·나라를 지키는 으뜸가는 산)으로 여겨 이곳에서 국가제사를 올렸다.
도성공사와 천재지변, 이상기후 등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낸 사당의 이름이 백악신사였다.
지금도 북악산 정상에서 발견되는 조선시대 기와편이 백악신사의 존재를 짐작케한다. 북악산 기슭은 왕궁 및 관청과 가깝고 경치가 좋아 왕족과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들은 이 일대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과 시문으로 남겼다.
이중 겸재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부아암’은 멀리서도 도드라지게 보인다.
‘부아암(負兒岩)’은 서로 포개진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해태 바위’라고도 한다. 개국공신 정도전(1342~1398)이 “불의 형상인 관악산의 화마가 걱정된다”는 무학대사(1327~1405)의 주장에 “‘북악산 해태바위(부아암)가 물을 상징하고, 앞에 한강이 흐르니 일(화마)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속설을 안고 있다.
또는 정도전이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이 바위를 옮겨 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겸재 정선은 인왕산·북악산(백악산)의 빼어난 경치 8곳을 <장동팔경첩>이라는 그림으로 그렸다.
장동은 현 효자동과 청운동을 지칭한다. 장동8경은 필운대, 대은암, 청풍계, 청송당, 자하동, 독락정, 수성동, 취미대 등이다. 그중 대은암과 독락정, 취미대가 북악산과 청와대 사이에 존재했다.
대은암은 중종 때의 권신 남곤(1471~1517)이 북악산 기슭에 조성한 집 근처에 있었던 바위이다.
박은(1479~1504)이 승지 발령을 받아 새벽부터 밤까지 근무하느라 통 만나 주지 않던 술친구(남곤)를 겨냥해서 붙인 바위이름이 ‘대은(大隱)’이었다. 엄청 큰데도 잘 보이지 않은 바위와, 통 얼굴을 볼 수 없던 술친구를 빗대 ‘대은(大隱)’이라 풍자한 것이다.(어숙권의 <패관잡기>) 대은암은 남곤·박은의 일화가 전해지면서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정선은 대은암 관련 그림을 3점(‘대은암’ 2점, ‘은암동록’ 1점)이나 그렸다. ‘대은암’은 청와대 서북쪽인 유란동에 살았던 정선이 ‘픽’한 절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은암이 북악산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지금까지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심상치않은 바위가 있기는 하다. 청와대 본관의 북동쪽 계곡에 깊숙히 들어가 잘 보이지 않는 바위가 그것이다.
정선의 ‘독락정’ 역시 청와대 북쪽, 북악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을 보면 ‘독락정’이 대은암 보다 더 동쪽에 있다. ‘취미대’는 그 동락정보다 더 동쪽에 있다. 중국의 고대 자전인 <이아> ‘석산’은 “산에서 비탈진 곳을 ‘취미(翠微)’라 한다”고 풀이했다. 그렇다면 취미대는 청와대 내부 동쪽 일대의 북악산 기슭으로 추정된다.
숙정문 북서쪽 4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촛대바위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가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다. 광복 후 이 바위의 쇠말뚝을 빼내고 한국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이름도 ‘촛대바위’라 했다.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이 콘크리트 기둥으로 마감되어 있다.
■무작정 개방이 능사가 아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집무실 이전을 강행한다면 청와대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당선인은 ‘국민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무작정 개방’에 앞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경호처 역사동호회가 발품을 팔아 답사한 결과물 중에서 필자가 소개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도그럴 것이 청와대터에 서려있는 역사가 자그만치 1000년이 아닌가. 고려 남경-회맹단-경복궁 후원-총독관저-미군정청장 숙소-경무대-청와대로 이어졌다. 과거의 유산 뿐이 아니다. 현재 청와대터에 있는 모든 시설물은 물론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까지 허투루 버려서는 안될 유산이다. ‘청와대’ 그 자체로 만고에 전해질 역사의 한페이지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인 역사 문화의 층위를 한편으로는 제대로 ‘보전’하면서, 또한편으로는 제대로 ‘발굴’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활용’ 방안이 나올 수 있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이웃 경복궁과 칠궁처럼 ‘사적’으로 지정하고 시작하는게 옳다. 청와대 뒤편의 북악산도 ‘명승’(2009)으로 지정되지 않았던가.
이미 740여 개의 성상을 쌓은 청와대 주목은 지금 이 순간도 하루 하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 1000년’이라면 향후 260여년의 역사는 주목의 나이테에 켜켜이 쌓아놓을 것이다. ‘죽어 1000년, 썩어 1000년’이라 해서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몸통의 공간만 넓혀가는 주목이라면 또 어떤가. 그 넓어지는 빈공간 속에 인간의 역사를 잊지않고 차곡차곡 담아 둘 것이다. 과연 주목이 쌓아둔 오늘의 역사는 1000년, 2000년, 3000년 후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
인가.(이 기사는 대통령경호실이 펴낸 <청와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2007년 초판·2019년 증보판)과 <청와대의 나무와 풀꽃>(2019년)을 참고했습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이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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