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3000년전 청동기마을’ 정밀한 사회구조 갖췄다
BC12세기부터 1000년이상 지속된 대규모 취락
31평형 대형 주거지·선반·벤치·침상생활 흔적
마을행사 회의하고 석기공장·석기수리점 구비
"어! 여기 토기편이 있네. 어! 돌도끼도 보이네.”
2001년 1월. 강원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일대를 둘러보던 지현병 당시 강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의 눈이 반짝했다.
북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용암리 청동기 타운. 이 일대 전체가 선사시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수상한 곳이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들러본 겁니다. 바로 윗동네에 있는 위라리 적석총도 조사할 겸 해서 왔던 것이고….”
수상한 충적대지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자. 이곳은 북한강변. 용화산(해발 878.4m)이 빚어낸 많은 지맥 가운데 북서로 향하는 구릉의 끝이 북한강과 맞닿은 곳에 펼쳐진 충적대지다.
“화천군은 고산준령으로 유명하잖아. 우리 옛날(1960~70년대)에 겨울철 일기예보를 들을 때 꼭 나왔던 전방과 강추위의 상징. 대성산(1073.1m), 백암산(1179.2m), 사명산(1197.6m), 화암산(1468m) 같은 10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니….”(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부연하자면 화천군에서 논과 밭의 비율은 8%에 불과하고, 그것도 밭이 논보다 3배가 더 많을 정도다.
“화천군 전 지역을 통틀어 개발할 곳을 찾는다면 이곳 용암리 충적대지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화천군은 이곳 일대에 생활체육공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연히 지표 조사가 수반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대학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는데, 지표상에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연히 화천군은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102.5㎡(31평)에 이르는 대형 주거지. 3000년 전 이 마을을 다스린 수장의 집일 가능성이 높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서는 ‘인접한 고고학적 양상과 지형적인 특성으로 보아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은 높으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여운을 남겼어요. 그래 이상한 기분이 들어 찾아온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강변의 충적대지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물이 있고, 어로활동을 할 수 있으니 먹을 거리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 걱정 없는 요즘 사람들도 강변에 터전을 잡아 마을 이루고, 또 전원주택을 짓네, 아파트를 짓네, 위락시설을 만드네 하잖아. 화천군의 생활체육시설 조성도 같은 맥락이고…. 삶의 방식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겠죠.”(조 관장)
그러니 이런 충적대지를 만난다면 예외없이 옛 사람들의 흔적, 즉 유적이 남아있다고 보아도 좋다. 어쨌거나 선사유적의 존재를 확인한 지현병은 즉시 화천군청에 공사중지를 요청했다.
“유적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공사중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31기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곧 대규모 발굴이 이뤄졌다. 그 결과 BC 12세기부터 조성된 주거지 170기와 수혈(구덩이)유구 35기, 굴립주 유구 13동, 추정 토광묘 12기 등 230여기의 청동기시대 유구가 쏟아졌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정리한 유물만 1350점에 이를 정도다. 발굴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었다.
홍수에 잠긴 ‘청동기 타운’
“홍수로 인해 조사 중이던 유적지가 물에 잠기기 일쑤였어요. 특히 2003년 8월이었는데요.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대비가 2박3일 동안 내리더군요.”(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북한강으로부터 물이 범람해서 차기 시작합디다. 걷잡을 수 없었어요. 3000평에 이르는 유구밀집지역은 순식간에 수심 1m50㎝가량의 물바다를 이뤘어요.”(지현병)
이미 노출된 유구를 완전히 뒤덮은 물 위에는 물새들이 한가로이 둥둥 떠다니고….
◀벤치 혹은 침상, 아니면 선반의 흔적(양쪽에 직사각형 형태로 표시해놓은 곳)이 있는 19호 주거지 모습이다.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는데, 정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물론 유구 전체에 두꺼운 커버를 씌워놓기는 했지만…. 애써 조사한 유구가 물 때문에 모두 붕괴되거나 씻겨져 내려갔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사단은 양수기 4대와 경운기 1대를 동원,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물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선사시대에도 그랬을까. 이런 홍수와 범람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오랜 시간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런 범람의 원인 또한 사람 때문이라고 봐야지.”(조 관장) “무슨 소립니까?”(기자)
“바로 사람이 만든 ‘댐’이라는 녀석 때문이지요. 가뜩이나 손바닥만한 충적대지인데, 화천댐(1941년)과 춘천댐(1965년)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북한강 유역엔 물이 차기 시작했어요.”(김권중)
천신만고 끝에 물이 빠졌고, 유구에 남긴 상처는 비교적 가벼웠기 때문에 조사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마철을 예상하고 유구노출을 깊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구의 윤곽만 잡아놓고 여름철이 끝나면 바닥을 깊게 조사하려 했는데…. 장마철을 고려해서 작업했기 때문에 유구손상은 거의 없었습니다.”(지현병)
여름엔 장마와 폭염, 겨울철엔 북한강의 매서운 바람과 강추위….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발굴은 그야말로 ‘대박’ 그 자체였다.
청동기시대 31평 아파트, 석기공장, 수리점
“이곳은 BC 12세기부터 3~5번 정도 교체된 청동기 시대 대규모 취락지였음이 밝혀졌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세대가 터전을 잡고 살다가 후손대에 이르면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사는 형식으로 1000년 이상 지속된 청동기시대 마을이라는 것이다. 아니 유적의 규모와 연속성으로 보면 ‘청동기타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크게 보면 3단계였던 것 같아요. BC 12~9세기로 편년되는 초기 청동기시대와, BC 8~5세기를 풍미한 중기, 그리고 BC 5~2세기 사이에 조성된 청동기 후기의 유구로 나눌 수 있습니다.”(김권중)
특별히 기자의 눈에 띈 몇몇 주거지가 있었다. 우선 길이 19.34m, 폭 5.30m, 깊이 40㎝, 즉 102.5㎡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이다. 평수로 따진다면 전용면적 31평이나 되는 중형아파트.
“재미있네요. 지금의 평형으로 치면 38~40평형 아파트 정도는 되잖아요. 신분이 얼마나 높았을까요.”
주거지 구조를 보면 중앙부분에 건물을 떠받친 것으로 보이는 7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주공 열 사이에는 모두 5기의 화덕이 역시 일렬로 설치됐다. 그런데 화덕에서는 불을 땐 흔적, 즉 목탄과 불에 탄 흙이 역력했다. 또 하나, 주거지 안에서는 무엇을 저장한 것으로 보이는 저장공이 27개나 됐다.
“BC 12~9세기 주거지인데 규모가 이 정도니…. 청동기 시대 때부터 계급분화가 이뤄지니까 이 청동기 마을을 지배했던 수장(지도자)의 집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예컨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제도의 흔적으로도 보이고….”(지현병)
또 하나, 조사단을 매혹시킨 구조가 있었으니 바로 19호 주거지로 대변되는 특이한 구조였다.
“19호는 면적이 약 11평 정도인데요.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벽을 따라 요즘의 벤치나 침상, 혹은 선반 같은 구조물이 3곳이나 존재했음을 알리는 기둥구멍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길이 201㎝·폭 57㎝, 길이 197㎝·폭 72㎝, 길이 203㎝·폭 58㎝짜리 등 3곳….”(김권중)
3000년 전 용암리 청동기 마을 사람들이 공회당인 이곳 19호 건물에 모여 벤치에 앉아 마을 행사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용암리 사람들은 일찍부터 침상생활을 즐긴 것은 아닐까. 혹은 선반 위에 물건을 보관해놓는 지혜를 지닌 것은 아닐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또 하나 특징은 이미 이 청동기 마을에서는 분업화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유구가 여럿 확인된다는 점.
“87호 유구를 보면 재미있는데요. 화덕이 보이지 않고, 돌가루와 미세한 석판들이 많아요. 잠을 자지 않았던 곳. 이곳은 바로 석기를 만드는 ‘석기공장(工房)’이었을 겁니다.”
158, 159호 건물지를 보면 더욱 흥미롭다. 즉 이곳에는 끝이 닳아버렸거나 깨진 석촉과 석부, 그리고 숫돌이 확인됐다.
“사용해서 닳아버렸거나 파손된 도구들을 숫돌로 갈거나 다시 만들었음을 보여주는데요. 한마디로 ‘석기 수리점’이었던 셈이죠.”
이 모든 조사성과는 용암리 사람들이 이미 3000년 전부터 지도자가 마을을 지휘하고, 회의를 통해 행사와 의례행위를 결정했으며, 석기공장과 수리점까지를 완비한 하나의 정밀한 사회구조를 확립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청동기 타운에서의 단상(斷想)
2008년 9월. 기자가 조유전 관장·지현병 강원문화재연구원장과 함께 용암리를 찾았을 때…. 이미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초등학교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청동기타운 밀집지역은 지금 국궁장(國弓場)이 되었다. 유적은 바로 그 땅 밑에 그대로 묻혀있고, 인접지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됐다.
석기공장(공방)터. 석기제작 때 나오는 돌가루와 석편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발굴해서 확인된 면적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다. 이곳 용암리~위라리에 걸쳐 얼마나 넓은 청동기 타운이 조성됐는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일행은 용암리와 인접한 위라리로 향했다. 소유자가 우사(牛舍)를 만들려고 했지만, 지난해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시굴조사 결과 용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 정식 발굴이 필요했던 상황.
“당시 예상 발굴비가 5억원 가까이 됐어요. 하지만 대안이 떠올랐어요. 문제의 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이 7000만~8000만원 정도라고 했어요. 그러니 거액의 발굴비를 들이느니, 차라리 8000만원으로 땅을 사서 보존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1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뒷소식이 없는 상태. 조유전 관장이 안타까워 한다.
“얼른 해결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합니다. 땅값이 오르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어요. 천문학적인 보상비가 필요한 풍납토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데….”
고개를 돌리자 용암리~위라리 사이 북한강변 충적대지에 심상치 않은 구릉 하나가 외로이 서있다. 구릉이라고 보기에도 너무 작다. 지현병 원장이 소리친다.
“저것이 바로 위라리 적석총이라 합니다.”
가까이 가보았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와 풀이 적석총을 뒤덮었으니, 차마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미 적석총의 외부벽은 주민들의 경작으로 인해 파먹히고,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위라리 적석총은 북한강변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상류에 있는 적석총이다.
지난 2월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이건무 현 문화재청장은 적석총이 방치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도 이 적석총은 아무런 조치없이 9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냥 그대로’다. 강원도 문화재위원회는 무엇을 하는지, 문화재청은 또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기분으로 출발했던 청동기 마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짜증 지대로’인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화천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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