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불모의 한국 고고학, 선진발굴기법에 눈뜨다
“저기에 해동여인숙이 있었는데…. 횟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어디갔노?”
10월15일 가을 한낮. 더위 먹은 가을인가. 햇살이 따가웠던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전시관. 전시관 직원 최정혜씨의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기자가 밖으로 나왔다. 조 관장이 스물여덟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1999년 부산박물관의 발굴현장 설명회 모습.
어느 고고학자의 회상
“1969년 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잡은 것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었지. 그런데 7개월 만인 8월 초년병 햇병아리 학예사인 나는 동삼동패총 발굴을 ‘명’받고 내려왔어요.”
조 관장의 추억담을 들으려는데, 급경사가 진 전시관 밖에 웬 젊은이들이 긴 줄을 선다.
“저 친구들은 뭐지요?”
“국립해양대 학생들인데, 저기 학교에 가는 왕복버스를 타려고 하는 겁니다.”(최정혜)
그러고 보니 전시관 왼쪽으로 기다란 길이 통했고, 그 끝에 국립해양대 건물이 보인다.
“원래는 저기가 조도(朝島)라고 해서 섬이었는데 74년 해양대가 저곳으로 이전하면서 연륙되었어요.”
다시 조 관장의 옛이야기가 계속된다.
동아대가 찍은 발굴현장 항공사진.
“여기 동삼동 패총 유적은 보시다시피 해변에 있잖아요. 당시 유적 앞바다에서는 이상한 물고기가 낚싯대에 걸렸는데…. 주둥이와 머리가 꼭 쥐처럼 생겼고, ‘찍찍’하는 소리를 내며 올라왔어요. 꼭 쥐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못먹겠더라고…. 나중에 들으니 그걸 쥐고기, 즉 쥐치라 해서 쥐포를 만들어 맥주 안주로 먹는다고 하더군.”
“숲도 나무도 없는 8월의 뙤약볕에서 얼마나 더웠는지…. 바닷물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는데 그럴 수는 없었고…. 그렇지만 흙으로 빚은 완형의 각배(角杯)와 석기, 패천(조개로 만든 팔찌)을 내 손으로 발굴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런데 조 관장의 회고담은 파란만장했던 동삼동 패총 발굴의 역사에서 하나의 가십거리일 뿐이다. 이 동삼동 패총에는 당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원로와 그리고 당대 고고학계의 자화상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조 관장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 고고학계를 주름잡는 1세대 고고학자들의 ‘젊은 날의 초상’도….
이 패총은 1929년 동래고보(현 동래고) 교사인 오이가와 다미지로(及川民次郞)가 처음 발견했다. 이듬해인 1930년과 32년 두 차례씩 모두 4차례 시굴조사를 벌여 빗살무늬 토기와 흑요석 등 신석기 유물들을 발굴했다. 일본인에 의한 발견과 조사. 여기까지는 일제시대 때 흔히 있었던 발굴 역사의 레퍼토리일 뿐이었다.
어느 미국인 부부가 밝혀낸 한국 신석기 문화
그런데…. 해방이 되고도 17년이 지난 62년, A. 모아와 L.L 샘플이라는 미국인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부부는 좀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남편인 모아는 대학 졸업 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40대 초반의 나이로 고고학에 눈을 떴는데, 관심 분야가 바로 한국 선사 고고학이었던 것이니….
미국인 모아·샘플 부부가 발견한 토기들.
“모아가 일본을 둘러보고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었어요. 이미 일본 선사시대 관련 연구는 차고 넘쳤지만 한국 선사시대, 그것도 신석기시대는 연구의 불모지라는 걸 알았던거지. 그래서 한국 신석기를 전공으로 택한 거지.”(정영화 전 영남대 교수)
‘늦게 배운 고고학에 날새는 줄 몰랐던’ 모아부부는 미국 과학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했고, 급기야 2만달러라는 거금을 받고 한국에 온다.
“서울 집 1채 값이 달러로 쳤을 때 한 900달러 정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2만달러라면 집을 20채 이상 살 수 있는 거금이었어요.”(정영화교수)
1969년 국립박물관의 1차조사때 출토된 융기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
어쨌든 부부는 곧바로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을 찾아 “동삼동 패총을 한 번 발굴해보고 싶다”면서 도움을 청했다.
잠깐 참고사항 하나. 당시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두가지 큰 변화(진전)가 있었다. 하나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61년 서울대에 고고학과를 개설한 것이고, 두번째는 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법에 따르면 유적 발굴은 반드시 문화재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김재원 관장은 당시 김원룡 서울대 주임교수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달았다.
“모아씨. 단독발굴은 안됩니다. 하려면 서울대와 공동으로 하십시오.”
하지만 김원룡 교수는 모아의 발굴을 묵인했다. 도리어 모아 부부에게 방까지 만들어주고 서울대 고고학과 1기생(당시 3학년)인 정영화와 임효재 등 두 사람을 아르바이트 겸 조교로 붙여주었다.
“김원룡 선생은 이 기회에 걸음마 단계였던 고고학 발굴 기술을 배우자는 뜻도 있었을 겁니다. 동삼동 패총 발굴은 이 때문에 사실상 모아 부부의 단독발굴이었어요. 임효재나 저(정영화)나 영어도 배우고 외국의 선진 발굴기술도 배우고…. 남들이 부러워했죠. ‘저 친구들은 유학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정영화 교수)
미국인 모아·샘플 부부가 발견한 토층도.
하지만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만다. 모아가 동삼동을 파고 있다는 소식이 돌고 돌아 김재원 관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김 관장은 삼불(김원룡 교수의 호)을 불러 “왜 외국인에게 단독발굴을 시켰느냐”고 호되게 꾸짖었고, 불똥은 모아에게 떨어졌다.
“지금도 생생해요. 삼불 선생님 성격이 불 같으시거든. 저희가 옆방에 있는데, 선생님이 모아에게 뭐라 큰소리치고 모아 역시 지지않고 대들고…. 잠시 후 보니 두 사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더라고….”(정영화 교수)
이 일로 삼불과 모아는 결별하고 만다. 화가 난 모아는 동삼동에서 발굴한 유물보따리를 들고 연세대를 찾는다.
“서울대 고고학과 입장에서는 사실 안타까운 일이었지. 만약 모아가 계속 있었으면 서울대가 주도적으로 동삼동 패총을 발굴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별로 서울대로서는 또 한번 쓰라린 일이, 연세대로서는 뜻하지 않은 ‘기화(奇貨)’를 얻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모아는 동삼동 패총을 조사하던 도중 틈틈이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했는데, 공주 석장리에서 첨두기(尖頭器) 같은 구석기 유물들을 수습한다. 정영화 교수의 회고.
“동삼동 패총 조사 도중에도 모아는 우리들에게 석장리에서 수습한 후기 구석기 유물들을 보여주었어요. 한국에 구석기 유적이 있다고…. 우리들은 무슨 구석기냐고 일축했어요. 한국 구석기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모아가 그래요. ‘왜 너희들은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고 부정하느냐’고…. 난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학문을 하는데 부정적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평생 교훈으로 삼았어요.”
어떻든 모아는 이 석장리 구석기 자료 역시 연세대로 가져갔다. 당시 손보기 연세대 교수는 그 자료를 토대로 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했다. 손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구석기 유적을 확인함으로써 구석기 발굴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모아는 66년 일본 덴리대(天理大)가 발행하는 한국학 관련 학술지(조선학보)에 동삼동 패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여 중간보고 형식으로 발표한다. 이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동삼동 패총 맨 밑바닥에서 채취한 목탄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가 BC 3000년 전후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충격 그 자체였지. 획기적이라고 했던 리비의 탄소연대측정 방법이 소개된 게 50년대였거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개념도 잘 몰랐던 때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연대가 그때만 해도 가장 첨단의 측정 방법으로 BC 3000년까지 올라간다는 결과를 얻었으니….”(조 관장)
발굴의 기초를 배우다.
사실 모아 부부가 남긴 유산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발굴기법을 잘 모르던 당시, 우리는 선진 발굴의 기법을 고스란히 배웠습니다. 깊이 20㎝의 2m×4m짜리 피트를 두 곳 파서 층위를 구분하는 방법을 찾고…. 토기편 등을 넘버링하면서 분류하는 방법, 유적 명칭을 정하는 방법 등등…. 당대 선진발굴 기법의 ABC를 모아에게 배웠다고 봐야지.”(정영화 교수)
모아의 발굴로 비상한 관심을 끈 동삼동 패총의 가치는 69~71년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와 공동발굴)의 3차례 발굴로 더욱 구체화한다.“동삼동 패총 발굴은 유적의 가치뿐 아니라 한국고고학계에도 엄청난 획을 그은 조사였어요. 현재 한국 고고학계를 이끄는 분들이 한결같이 동삼동에서 배운 발굴 기법으로 저마다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거든.”(조 관장)
김원룡 당시 박물관장을 단장으로 박물관에서 윤무병·김정기·한병삼·김종철, 서울대 고고학과 출신인 김병모·임효재·정영화·조유전·지건길·최몽룡·이종선·전경수, 그리고 동아대 김동호 등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71년 3차 발굴에 참여한 부산대 출신 정징원 교수(부산대 명예교수)의 일화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전 당시 부산대박물관 조교였는데요. 얼마나 동삼동에 가고 싶은지 몸살을 앓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여의치 않았죠.”
스승인 김정학 부산대 교수와 서울대가 주도한 국립박물관 쪽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정학 교수만 해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명망있는 학계 원로였다. 당시 김원룡-손보기-김정학 교수 같은 이들은 한치의 양보 없이 자존심 싸움이랄까 하는 경쟁구도로 이른바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학 교수의 텃밭인 부산에서 진행 중인 발굴에 부산대가 참여하지 못했으니….
“발굴에는 참여하고는 싶은데 (스승 눈치보느라) 갈 수는 없고…. 묘안을 냈어요. 국립대학 박물관 조교니 공무원 신분이잖아요. 그래 휴가원을 내고 동삼동으로 뛰어간거지. 스승님(김정학 교수)이 가끔씩 출토유물을 보러 동삼동 현장에는 오셨는데요. 그때마다 저는 선생님 눈에 띌까 숨어버리고….”
그렇게 어렵게 배운 패총에 대한 발굴 기법은 정징원 교수의 학문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이렇듯 부산 앞바다의 한적한 영도에 자리잡고 있는 동삼동 패총은 우리 고고학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고학자들의 영욕과 애환을 담고 있는 동삼동 패총이 주는 고고학적,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정징원 교수가 정리한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유적 연대가 모아의 탄소연대측정 연대, 즉 BC 3000년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발굴 결과 연대는 계속 올라갔고, 결국 이 유적은 BC 6000년, 즉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무려 4500~5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는 고고학적 자료가 나온거지. 말하자면 동삼동 패총은 신석기 문화의 전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 동남부 끝자락인 부산에서 이른바 중국 발해연안인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과 한반도 동부 고성 문암리 유적과 동시대라 할 수 있는 신석기 유적이 나온 것이다. 또한 이 동삼동인들은 4500~5000년간 지금으로 치면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잡은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그 증좌를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자.
<부산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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