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전투 졌지만 심리전선 ‘대승’
1968년 1월말 베트남은 모처럼 구정(舊正·Tet)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월맹(북베트남)측이 구정을 맞아 1주일간의 휴전을 선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월맹군의 기만전술이었다.
1월31일 미명(未明)을 기해 월맹의 대공세가 불을 뿜었다. 월남(베트남) 전역의 14개 성(군) 주요 도시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물론 이 구정대공세는 월맹의 완패로 끝났다. 월맹은 참전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3만5000여명이 사살됐고 5800여명이 생포됐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전사자 534명, 부상자 2547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를 기획한 것은 물론 월맹의 지도자인 호찌민과 국방장관 보응 우엔 지압이었다. 1967년에 이르러 월남은 군사력이 미군과 월남군, 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등을 합쳐 13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월맹은 일거에 전세를 뒤집을 도박을 감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정대공세였다.
그런데 승전을 했는데도 미국내 여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미국 언론이 월맹군의 손실은 치지도외하고, 미군의 손실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미국내 반전 분위기는 급격히 고조됐다. 급기야 린든 존슨 대통령은 3월31일 월맹에 대한 북폭을 중지시키는 한편, 다시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월맹의 입장에서는 ‘패배한 전투’였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대승’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2006년 10월. 부시 미 대통령은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세와 1968년 월맹의 구정대공세가 같다는 비유가 맞다”고 언급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이는 곧 (월남에서와 같이) 이라크에서도 곤욕만 치른 채 패배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승리는 군사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월남이나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부패하여 민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호찌민은 ‘이공위상(以公爲上), 즉 “나보다 우리를 섬겨야 한다”는 철학으로 승리했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은데,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는 순자(荀子)의 가르침을 평생의 사표로 삼았다. 힘만으로는 절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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