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이념에 얼룩진 ‘올림픽 정신’
1979년 12월27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전격 침공했다. 78년 수립된 공산정권이 이슬람 세력의 무장봉기에 따라 궁지에 몰리자 소련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80년 2월20일까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올림픽에 불참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내렸다. 하지만 요지부동. 최후 시한인 80년 2월20일이 되자 카터 미국 대통령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을 공식 선언했다. 베트남에서, 이란에서 곤욕을 치른 미국으로서는 가장 손쉽고도, 파급 효과가 큰 올림픽 보이코트 운동을 무기로 내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우방국들이 보이코트 운동에 동참하리라는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실패작으로 끝났다. 영국 정부는 미국의 보이코트 운동에 적극 동조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올림픽위원회(BOA)는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돼야 한다”면서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대처 총리가 군인 선수들의 대회 참가를 금지시키는 등 갖가지 제재조치로 BOA를 압박했다. 하지만 올림픽 정신을 내세운 BOA의 뜻을 막지는 못했다. 이밖에도 프랑스·이탈리아·덴마크·호주 등이 선수단을 보냈다.
결국 모스크바 올림픽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147개 회원국 가운데 80개국만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미국으로서는 우방의 전폭적인 지지도, 아프가니스칸에서의 소련군 철수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놀음에 피눈물을 흘린 이들은 물론 선수들이었다.
미국의 서슬에 아무런 힘없이 올림픽에 불참한 한국 선수 가운데 최대 희생양은 양궁 스타 김진호. 그는 79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를 싹쓸이했고, 올림픽 금메달을 예약했지만 올림픽 불참에 눈물을 뿌리고 말았다.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서향순에게 여왕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아프리카 콩고까지 머나먼 원정길에 올라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에 배당된 한 장의 티켓을 따낸 여자 핸드볼 선수들도 좌절감을 맛봤다. 돌이켜보면 아이들 장난 같은 소련의 복수가 4년 뒤 벌어진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성화 주자가 뉴욕시청을 통과한 84년 5월8일. 소련은 올림픽 공식 불참을 선언, 축제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스포츠 강국인 동독·불가리아 등 14개국이 소련의 뒤를 따른다. 하지만 그런 소련 역시 그토록 집착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으니(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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