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 넘자 숨어있던 성벽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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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 일원 조사에 잔뼈가 굵은 이우형씨(현강문화연구소장)가 성큼성큼 내딛는다. 이번에는 정말이다. 내색은 정말 하기 싫지만 이번만큼은 그를 따라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녹슨 철책에 걸린 ‘지뢰’라는 빨간색 삼각표지판을 휙 걷어내고 들어가는 것이니…. 사진기자를 쳐다보니 그 역시 뜨악한 표정이다. 취재단 일행을 안내한 ○○사단 정훈장교도 한몫 거든다.

“저도 여기(지뢰 지대)는 처음 들어와요.”

이곳에 근무 중인 장교도 ‘처음’이라는데…. 모골이 송연해 질 수밖에. 그러나 벌써 저만치 걸음을 내딛은 이우형씨가 “괜찮다”며 “내 뒤만 따라오라”고 한다.

# 착잡한 답사

순간 별의별 상념이 다 떠오른다. 이곳은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해발 471m). 이곳에 방치된 채 숨어 있는 성산성을 찾는 길이다.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 가운데 김화 쪽 꼭짓점. 격전지였던 탓에 지뢰와 불발탄이 묻혀있는 이곳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남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조정되면서 조사할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났다.

2000년 3월 이 성을 조사한 육사조사단이 만든 ‘철원 성산성 지표조사 보고서’는 무용담처럼 그 위험했고, 어려웠던 조사과정을 풀어놓았다.

“43일간의 조사기간 가운데 지뢰확인 및 제거작업과 수목제거 작업이 거의 매일처럼 실시됐다. 실제 경험없는 병사들과 함께 실시하는 지뢰제거 작업은 대단히 위험했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작업이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도 않고 또 해서도 안될 위험한 작업이었다.”

지도위원으로 3~4차례 현장을 찾았던 조유전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장(현 토지박물관장)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휴! 말도 말아요. 겨우 한 사람만 갈 수 있을 정도로 통로를 개척하고 부들부들 떨고…. 조사단이나 군장병들이나 죽을 노릇이었을 거예요.”

보고서는 전방지역 조사에 이골이 난 이우형씨의 활약(?)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지뢰 및 불발탄 제거는 김성환(병장), 구정은(상병), 전길호(상병), 김범수(일병) 등 4명이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우형 조사원이 솔선수범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지뢰 혹은 불발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 모두 부들부들 떠는 상황에서 이씨는 미친 듯 수풀을 헤치고 다닌 것이다. 그랬던 이씨가 2007년 초여름 부들부들 떠는 기자 일행을 그림자에 두고 휙휙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지난 번에 다 조사한 곳이니 괜찮습니다.”

# 미확인 지뢰지대서 마주친 멧돼지

빨간 지뢰 표지판을 제치고 한 30m쯤 갔을까. 성벽 위를 따라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선 이씨가 걸음을 멈춘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숨이 멎는데 그가 “저기를 보라”고 한다. 그랬다. 저편에 새끼 멧돼지가 보이는 것이었다.

“멧돼지를 자극하면 안됩니다. 멧돼지가 흥분하면 호랑이보다도 더욱 포악해진다고 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최전방 지뢰지대에 들어가 보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면 행운인데’ 들어가자마자 말로만 듣던 멧돼지와 조우하다니…. 안내 장교도 “나도 처음 보는 장면”이라고 신기해 한다. 새끼 멧돼지였으므로 그다지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불안에 떨면서도 제법 널려있는 삼국·통일신라시대 기와편을 여러점 수습했다. 이것도 직업 의식인가.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성벽 위와 비탈길을 따라 200m 정도 내려갔을까. 이씨가 덤불을 젖힌다. 그랬다. 성벽은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때마침 내리쬐는 햇볕에 우윳빛 색깔을 발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켜켜이 쌓은 높이 5.2m가량의 성벽은 65m 정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얼핏 봐도 우뚝 선 장승처럼 견고한 모습이다. 2000년 조사결과 성산성의 총길이는 982m였으며, 높이는 7m가량이었다. 성내에서 성황당지와 우물지가 확인됐다. 또 5곳의 건물지 또는 추정건물지가 확인됐고, 현문(懸門)식으로 된 서남문지를 포함해서 두 곳의 문지가 보였다. 전문가들은 이 성을 처음 쌓은 것은 최소한 통일신라 때였으며 고려, 조선대에 이르러 증·개축을 했으리라 여긴다.
특히 이 산성은 ‘가등(加藤)산성’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는데 그 악명높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의 주둔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 성산성을 둘러싼 김화 일대는 병자호란 때 2대 승첩인 이른바 김화지구전투가 벌어진 유서깊은 곳이다.

병자호란 2대 승첩이란 이 김화대첩과 함께 전라 병사 김준룡이 지휘한 용인 광교산 대첩을 말한다. 하지만 조선은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그토록 멸시했던 ‘만주족 추장’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당했다. 그런 참담한 패배 와중에서 승첩이 각광받을 리 만무했다.

# 사통팔달의 요충지

기자는 성산성 답사를 마치고 바로 곁에 위치한 ○○부대 본부를 찾았다. 북쪽으로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가 훤히 펼쳐졌다. 저 멀리 북한 땅에 오성산(1062m)이 보였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이 “육사 군번 세 도라꾸(트럭) 하고도 안 바꾼다”고 했을 정도로 중요한 산이다. 동쪽으로는 계웅산(604m)이 보이고 그 가운데 저격능선이 손에 잡힐 듯하다. 능선을 따라가면 저격 받기에 딱 알맞다고 해서 저격능선이라 했단다. 금단의 비무장지대만 아니었던들 오성산 아래 형성된 드넓은 평지 사이로 가는 평강행 도로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탄강으로 이어지는 남대천이 흐르고, 남대천변의 넓은 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성산성과 김화는 서울, 철원, 평강, 화천, 회양, 안변, 개성 등으로 갈 수 있는 사통발달의 요지이며 요충지였다. 바로 그곳 즉 성산성의 남쪽 남대천 변 평지가 병자호란 2대 승첩의 개가를 올린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인조14년) 12월8일. 청나라 태종이 직접 12만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한다. 병자호란의 발발이었다. 청태종은 영악한 인물이었다. 조선의 산성방어전술을 단숨에 깬 것이다. 이미 9년 전 정묘호란 때 후금(청의 전신)의 침략을 받았던 조선은 나름대로 산성을 수축하고 정예병을 평안도에 배치하는 등 산성방어전술을 썼다. 고구려 때부터 수·당을 괴롭혔던 바로 그 작전. 하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청나라군은 조선이 쌓은 산성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한양으로 직행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이기환 선임기자|김화 성산성에서〉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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