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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4)파주 백학산 석불

“여기에는 지뢰 같은 것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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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농처럼 묻는다.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빨간 딱지의 표지를 스치듯 지나가노라니 왠지 꺼림칙하다. 수풀을 헤치며 다가가는 발걸음이 섬뜩하다. 그래서 묻노라면 동행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씩 웃는다. 그러면서 되받아치는 농담.

“음, 신문도 아무리 철저하게 교정을 보아도 오·탈자가 생기잖아요. 여기도 마찬가지죠.”

오·탈자의 악몽에 시달려온 기자들에게는 참으로 절묘한 비유다. 지뢰탐사반이 철저하게 훑고 지나가도 간혹 발견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야! 정말 끝내주는 비유네!”하고 박장대소하지만 등짝에 맺히는 식은 땀방울을 어찌할꼬.

6·25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학산 고지(229m·파주시 군내면 읍내리). 사방 ‘미확인 지뢰지대’임을 경고하는 간이철책 사이에 아슬아슬 나있는 교통호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2005년 2월8일, 구정 전날 아침. 1사단 00연대 00대대 주임원사인 임종인씨도 이 교통호를 따라 내려왔다. 눈덮인 전방고지. 병사들과 함께 한창 눈을 치우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저만치 이상한 걸 보았어요. 사람 같았습니다. 미확인 지뢰지대에 사람의 형상이라니….”

자세히 보았지만 ‘그 사람’은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망주석은 아닌 것 같고…. 무슨 불상 같았어요.”

임종인 원사는 지뢰탐사반을 불렀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의 일이었다.

당시 부대 뒷산인 일월봉 진지 위에 큰 돌이 서 있었다. 그때 임원사는 돌이 떨어질까봐 병사들과 함께 돌을 굴려 떨어뜨릴 요량으로 힘껏 밀었다. 하지만 꿈쩍도 안했다.

나중에 보니 그 돌이 마애사면불(磨崖四面佛·나중에 경기도 지정문화재 지정)이었어요. 장정들이 몇 번이나 힘껏 밀었는 데도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다 부처님의 뜻이었겠죠.”

이렇듯 24년 전의 일이 뇌리를 스쳤다. 임원사는 지뢰탐색기를 앞세워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척 보아도 한 5m 되는 엄청난 불상이 떡하니 서 있었어요. 목이 달아난 불상이어서 섬뜩하기도 했고….”

야릇한 흥분감에 젖은 임원사는 불상 뒤를 병풍처럼 두른 바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신문의 오·탈자’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확인 지뢰 때문에 더는 조사하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보고했고, 관할 군내출장소에 알렸다.

다음날 때마침 구정이었으므로 임원사는 과일 등 제사음식을 불상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드렸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임원사가 처음 본 것처럼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있었다. 머리는 불상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6·25 이전에 누군가 떨어진 머리를 수습해서 잘 모셔놓은 것이 분명하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468㎝나 되었다. 머리는 소발이지만 얼굴면과 분명하게 구분되었고, 얼굴에는 높은 코와 가느다란 눈, 작은 입, 길게 늘어진 귀 등이 잘 표현됐다. 최선일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의 평가.

“운주사 석불(전남 화순·사적 312호)이나 대저리 석불입상과 비슷한 수인(手印·부처나 보살의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 가운데,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이었어요. 두 손이 옷자락 안쪽에 놓여있는데, 가슴 부위에서 두 손을 깍지 꼈거나 지권인(智拳印·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는 것)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외롭게 서있지만, 전쟁 전까지는 지역민들의 예불대상이었을 것이다. 이 입상은 백학산 아래 향교동의 드넓은 농지를 바라보고 있다. 향교가 있던 지역이라 향교동이라 했는데 한국전쟁 후 동네 주민들을 모두 민통선 이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동네는 폐촌이 되었다. 한때는 지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을 불상도 전쟁과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엄청난 거석불(巨石佛)을 만들었을까.

연구자들은 고려 광종(재위 949~975년)을 주목한다.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은 “특히 고려시대 대불(大佛)은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건국한 고려시대 전기(918~1170) 사이에 집중 조성됐다”고 말한다.

이때는 왕권 강화를 추진했고, 미륵신앙과 미륵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이 성행했으며, 신라 하대부터 대두된 풍수사상이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끼친 시기다. 불교에도 신이적(神異的)인 요소가 나타났던 시기였다. 특히 왕조 초기에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 세력을 통제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지방 호족들을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고토인 연산과 논산에 개태사와 관촉사를 세우고 삼존불상을 조성한 일과, 광종이 논산 관촉사에 무려 18.12m 크기의 석조보살상을 세운 것이 단적인 예다.

“토목공사는 농사철을 가리지 않았고… 평상시의 1년간 비용이 족히 태조 당시의 10년 비용과 같습니다.”

훗날 최승로(927~989)는 성종에게 바치는 시무28조에서 광종의 숭불정책을 꼬집었다. 왕조 창건에 따른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면서 왕권 강화책을 펼친 광종은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빠졌던 것이다. 유학자인 최승로는 그걸 비난한 것이다.

이때는 또한 어지러운 후삼국 시대를 반영하는 미륵신앙(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이 이어진 시기였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대표적인데, 미륵불 신앙은 고려 창건 이후에도 구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백학산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입상도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세워진 것일까. 박경식 한백문화재연구원장과 최선일씨, 그리고 최선주씨 등은 고려 시대의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위해 작성한 최선일씨의 공식 조사보고서도 ‘고려 시대’라고 시기를 확정지었다.

그러나 이론도 있다. 백학석불의 사진을 본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이 불상은 조선시대, 즉 15세기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문관석(文官石·문관의 형상으로 깎아 무덤 앞에 세우는 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불상”이라고 본다.

“옷 속에 감겨 있는 손 모양은 두 손으로 합장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신체 표현이라든가, 층단식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을 볼 때 15세기 중엽에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문관석 양식을 빼닮았습니다.”

그는 “이런 양식의 조선시대 불상은 처음 확인되는 것이어서 조선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런 시대 확정과 성격 규명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해야 할 몫. 여기서는 한 평범한 직업 군인의 ‘소리 없는 활약’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뢰밭에 방치된 문화재를 찾아낸 주임원사 임종인씨의 활약에….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군인이야말로 참군인이다.

〈이기환 선임기자|파주 군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