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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5) 파주 진동 허준의 묘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7월17일 허준 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글쓴이가 허준이라고? 서지학자는 그만 흥분했다.

“사실확인에 들어갔죠. 허씨 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에서 준(浚)자를 썼던 분을 몇몇 발견했는데요.”

1991년 도굴로 처참하게 파헤쳐진 채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소(이양재씨 제공). 민통선 이북인데도 도굴꾼의 극성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양천허씨족보’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이는 모래 속에서 바늘찾기격. 게다가 민통선 이북지역. 그러나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도도, 지번도 없는 상태에서는 일제시대 때의 토지대장을 찾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미공개자료였다. 무시로 열람시킬 경우 재산권 분쟁이 생길 수 있기에 군청이 공개를 거부했다. “허준 묘만 찾으면 된다”고 지역 지주회장 등을 통해 신신당부했다. 간신히 토지대장을 열람할 수 있었다. 샅샅이 옛 지번을 확인하다가 하포리라는 곳에서 주목할만 한 이름이 보였다.

“허준의 13대 종손인 허형욱의 아버지 이름이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 이제 찾을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죠.”

사실 허준의 종손인 허형욱(1924~?)을 비롯한 자손들은 해방 전까지 황해도 해주 대거면에 살았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남북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인 1947년까지 자손들이 38선을 넘어 제사를 지내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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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인 이윤희씨도 “이 근방인 독정리와 우근리에는 100호가 넘는 양천 허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 지주회장의 운전기사로 신분을 감추고 10년 가까이 옛 허씨 땅을 찾던 1991년 7월 어느 날.

짐작 가던 허씨의 옛 땅을 찾았으나 엉망이었다.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처참하게 도굴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무덤(역시 마구 파헤쳐진)에 눈길을 돌리는 순간 이양재씨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 무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전기충격을 받은 것 같았아요. 바로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들었죠.”

땅 속에서 비석이 나왔다. 그것도 두 쪽으로 동강난 명문비석이었다.

“‘陽平○ ○聖功臣 ○浚’란 명문이었어요. 바로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습니다.”

의성(醫聖) 허준 선생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후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의 자취를 찾기란 이렇게 힘들다.

생몰년도, 출생지도, 유배지도, 사망지도 그야말로 논쟁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선생이 서자였고, 그때만 해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사였던 탓이겠지….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감히’ 최근 드라마 속의 ‘장준혁’과 비교해보자. 한마디로 가장 ‘장준혁’다웠지만, 가장 ‘장준혁’답지 못한 의사였다.

“본성이 총민하고…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 이르렀다”(의림촬요)는 대목은 선생의 천재성을 말해준다. ‘조선사람 허준’을 쓴 신동원은 “선생은 스스로 기회를 개척하여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고 평가한다. 선생은 1590년(선조 23년)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의 두창(마마)을 성공적으로 치료한다. 선생은 드라마 속 장준혁처럼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결단을 내린다.

“왕자가 또 이 병(두창)에 걸렸는데… 모두들 약을 써서 허물을 얻을까 가만히 있어 병이 악화됐는데… 신이 세번 약을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허준의 ‘언해두창집요’에서)

만약 실패했다면 몸을 보전하지 못했을 상황.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처방을 내려 왕자(광해군)를 비롯한 왕가의 병을 고쳤으며 마침내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다. 훗날 죽음을 앞둔 임금(선조)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다른 의관들처럼 후환이 두려워 대충 처방하지 않고, 더욱 센 약을 처방함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광해군 일기)’ 죽어가는 임금을 살리려 했다.

하지만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임금에 대한 계산없는 충성심이 출세의 비결일 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런 말이 퍼지자… 명망 진신(縉紳)들이 보신에만 뜻을 품고… 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이 17인, ‘어의 허준’을 비롯한… 몇몇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명철보신한 사대부와 달리 허준은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다. 선생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어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오르자 질시하는 세력의 상소가 빗발쳤다. 급기야 선조가 죽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선생은 “망령되게 약을 써서 임금이 죽었다”는 탄핵을 받는다.

세자시절 허준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광해군은 할 수 없이 귀양 보냈지만(1608년) 1년8개월 만에 방면한다. 그러나 허준이 귀양 간 곳은 남해 먼바다가 아니라 선대 임금과의 추억이 깃든 의주였다. 광해군은 또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가 죽인 게 아니라)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그랬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대북파와 소북파 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 빠졌지만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허준의 ‘불멸의 업적’은 ‘동의보감’이다. 1596년부터 무려 14년 역작으로 완성된 동의보감. 허준은 86종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 정리함으로써 고급지식을 임상의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더욱 돋보이는 것은 병든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특히 우리 국토에서 나오는 637개 향약(鄕藥)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창과 성홍열, 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이가 바로 허준이다.

“그동안 어린아이의 마마는 약 쓰는 것을 금하고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것을 어의 허준이 약을 써서 살아난 사람이 자못 많았다. 민간 사람들이 어려서 죽은 것을 면한 자가 많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전한 허준 선생의 진면목이다.

2007년 봄, 민통선, 허준 선생의 고즈넉한 무덤. 문득 불후의 역사가 사마천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기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