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이었습니다. 경북 영천 은해사 부주지였던 지봉스님(현 용화사 주지)이 한 인터넷 고서 경매사이트를 검색하다가 출품된 어떤 고서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스님은 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직도 겸하고 있거든요. 스님이 본 책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이었는데요.
■책표지에 인성왕후의 흔적이…
그러나 <성리대전> 책의 표지는 이미 낡아서 떨어져 나갔고, 그래서 다른 종이를 붙여 딱딱하게 새 표제지를 만들어 놓았는데요. 이 종이에 쓰여진 글자들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중 ‘공의전’이라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공의전’은 조선조 인종(재위 1544~1545)의 부인인 인성왕후 박씨(1514~1577)를 가리킵니다. 공의전은 지봉 스님도 잘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남편인 인종의 태실(태를 묻은 곳)이 바로 영천 은해사 뒷산에 있기 때문이죠. 이 고서는 4차례나 유찰된 끝에 지봉 스님의 품에 들어갔는데요. 출품자가 경매를 위해 써붙인 설명서에 ‘조보(朝報·조선 시대 관보)’라고 했지만 믿는 이가 없었던 겁니다.
4개월간 자료를 검토한 지봉 스님은 더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김영주 경남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게 ‘발굴 조보’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발굴 ‘조보’ 8쪽 가운데 7쪽은 번역 가능했고, 그중 발행일자를 알 수 있는 것은 5쪽이었는데요. ‘1577년(선조 10년) 11월6·15·19·23·24일자’였는데요. 그 ‘1577년 11월’이라는 발행날짜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김교수는 <선조실록>나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율곡 이이(1536~1584)의 <석담일기>에서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냅니다. ‘1577년 11월 28일’ 선조(1567~1608)가 분기탱천했다는 대목인데요.
이날 선조는 “어떤 자가 내 허락 없이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발행했는가. 인쇄·배포한 자와 그것을 허가해준 자 모두를 색출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 때문에 관련자 30여 명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선조가 그토록 화를 내고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했을까요.
■국왕 비서실이 작성한 관보를 민간에 유료배포
조선시대 관보인 조보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정 7품) 2명과 가주서 1명이 담당했습니다. 기사작성 같은 실무는 주서 및 가주서가 담당했고, 총책임자인 도승지가 감독했죠.
모든 소식을 다 담을 수 없었으니까 나름 취사선택을 했겠죠. 조보는 원래 중앙 및 지방 관청에서만 필사본으로 돌려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손으로 쓴 ‘필사조보’는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기별서리가 속기로 필사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해득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런데 1577년 8월 획기적인 제안서가 의정부에 들어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표현대로 ‘서울의 직업없는 식자’들이 “우리도 중국처럼 조보를 활자로 대량인쇄해서 경향 각지의 사대부들에게 유료로 배포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낸 겁니다. 해독하기 어려운 ‘필사조보’가 아니라 깔끔한 활자로 찍은 ‘인쇄조보’를 민간에 유료 배포하겠다는 거였죠. 이런 제안을 받은 의정부도 시쳇말로 청년실업률을 고려했는지 덜커덕 허가증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의정부의 품의를 받은 사헌부 역시 쿨하게 허락했어요.
조정의 허락을 얻은 민간 조보 인쇄·배포업자들은 100여일간 승정원이 편집한 조보를 열심히 인쇄해서 각 관청과 지방 수령들이 서울에 파견한 경주인들에게 구독료를 받고 팔았습니다. 조보를 받아본 사람들(사대부)은 만족감을 표시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100일 천하로 끝난 조선의 언론자유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이 선조 임금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선조는 “누가 감히 이 따위로 일을 처리했느냐. 국가기밀이라도 새어 나가면 어쩌냐. 맨처음 주장한 자들를 색출해서 극형에 처하라”고 길길이 뜁니다. 허가를 내준 신료들은 쩔쩔 맵니다.
“저 저…의정부 내에서 ‘조보의 민간발행이 허가사항이 아니니 발행해도 무방하다’는 등의 의견이 많아서 허가해주었습니다. 이게 그렇게 큰 죄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선조는 “관련자들을 끝까지 추궁해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결국 조보를 인쇄·배포한 자 30여명이 체포됐는데요. 이들은 사경을 헤맬 정도로 혹독한 고문에 시달립니다.
급기야 민간인쇄업자 30여명은 죄질에 따라 유배형에 처해졌는데요. 율곡 이이는 이 대목에서 조정대신들의 책임회피를 통렬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조보의 인쇄를 허락해준 죄를 자수하지 않고 지금까지 머뭇머뭇거려 애꿎은 백성들만 형벌을 받았다. (의정부 및 사헌부 관리들은) 겁도 많고 의리도 없구나.”(<석담일기>)
이것이 100일간의 언론자유를 탄압한 조선 최초의 ‘언론탄압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궁궐 어른의 위독소식까지 알려
발굴된 조보가 ‘1577년 11월치’라는 건 매우 중요한 시사점입니다. 민간인쇄신문은 1577년 8월에서 11월27일까지 발행됐습니다. 선조가 철퇴를 내릴 때가 11월28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발굴된 조보는 선조의 폐간명령을 받기 직전에 활자로 발행된 민간인쇄조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굴 조보의 내용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나의 예를 볼까요. 우선 공의전의 병환 소식을 살펴볼까요.
“공의전의 약방 제조가 (공의전께) 안부를 여쭙고 (임금께) 글을 올렸다. (공의전 왕대비가) ‘밤부터 아침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답했다.”(1577년 11월6·19일 조보)는 내용이 실려있네요. 공의전 인성왕후는 남편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승하한 뒤 32년간 자녀없이 왕대비로 살았던 인물인데요. 그런데 1577년 10~11월 사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됩니다.
이번 발굴 조보에는 ‘공의전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기사가 두 번(6일·19일)이나 조보에 실렸어요. <선조실록>을 보면 공의전은 11월 29일 64세를 일기로 승하합니다. 아니 왕실어른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보도해버렸네요. 궁궐의 비밀로 쉬쉬했을 것 같은데….
■조선판 구제역의 창궐과 흔들리는 민심 다뤄
지금으로 치면 구제역 같은 소전염병이 창궐했다는 일종의 사회면 기사도 등장합니다.
“서울에 우역(牛疫)이 크게 돌아…수레와 연결된 멍에를 걸친 채로 길에 쓰러져 죽은 소가 600마리나 됩니다. 뜰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슬피 울부짖고 있으니…. 능음(凌陰·빙고)에 (왕실용 얼음을 저장하려면) 수레 1000량은 써야 하는데….”(1577년 11월 15일 조보)
이 기사는 한겨울(음력 11월) 왕실에서 쓸 얼음을 빙고에 옮기는 공역과 신궁 공사가 강행되고 있는데, 수레를 끌 소들이 전염병 때문에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죠. 조보의 기사가 이어집니다. 조보는 “공사판 일꾼들을 닦달하고 매질을 가한다 해도 사람 어깨에 멍에를 메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반문한 뒤 “만약 이대로 공역를 강행한다면 백성들의 원성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조보는 한성부(서울시)가 선조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옮겼지만 당대 사회의 상황과 여론을 고스란히 담고 있죠. 결국 조보는 소가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얼음 운반 공역과 신궁 공사를 강행하던, 그래서 민심이 흔들리던 1577년 겨울의 서울 풍경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겁니다.
■임금의 자아반성도 가감없이
날씨 기사도 어김없이 보입니다. 조보에는 성변(별의 위치나 빛에서 생긴 변화)과 천변(기상이변) 등을 기록한 ‘성변측후단자’를 토대로 한 날씨기사가 보입니다.
“(1577년 11월) 14일 밤은 구름이 짙게 끼어 치우기(혜성의 일종)를 관측할 수 없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22일 밤 초경(밤 7~9시)부터 이경(밤 9~11시)까지는 구름이 끼어 (치우기를) 볼 수 없어….”
‘치우기(蚩尤旗)’는 꼬리가 굽어 깃발처럼 나부끼는 형상의 혜성을 가리킵니다. 치우는 알다시피 옛 동이족의 전설적인 수령이자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죠. 그래서인지 예부터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가 밤하늘에 나타나면 병란이 일어난다”(<사기> ‘천관서’)고 했습니다. 전염병 창궐과 불길한 혜성의 출현 등 천재지변이 잇다르자 신료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사직을 청한 것 같아요. 11월 날짜미상의 조보에 등장하는데요. 그러나 선조는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면서 신료들의 사직서를 반려합니다.
“어리석은 과인이 외람되게 임금의 보위를 받잡았다. 그러나 권력의 기강을 다잡지 못했고, 정사도 잘 처리하지 못했다. 경들은 사직하지 마라. 화합해서 바로 잡아달라.”
■“승지를 파면해야” “이런 장수가 전쟁터에서 어떻게…”
승정원을 비판하는 기사도 등장하는데요.
“승정원의 근무태도가 영 불성실하고 태만합니다…일찍 퇴근하는 일도 많아 물의를 빚고…임금의 전교를 늦게 전하는 바람에…. 청컨대 담당 승지를 파직시키십시요.”(날짜 미상의 조보)
승정원이 어딥니까. 조보를 작성하는 이가 승정원 소속 주서(7급공무원)이라고 했죠. 7급 공무원이 자신의 부서를 탄핵하는 상소문까지 여과없이 조보에 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는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를 비판하는 기사도 보입니다.
“말이 끄는 호화 수레를 타는 병마절도사(지역사령관)들이 있다. 이런 장수가 전쟁터에서 적군을 마주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쌩쌩 달리는 군마를 타고 활을 쏘며 창칼을 휘두를 수 있겠느냐.”
병마사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그대로 실은 거죠.
조보가 관보인만큼 관리들의 인사·동정도 주요기사로 처리됐는데요. 발굴 조보가 5~8일치 기사에 불과했는데 조정에 휴가를 신청한 관리의 동정이 여럿 등장합니다. 병든 어머니를 만나려고, 자식 혼사 문제로, 혹은 본인의 지병을 이유로 휴가를 신청한 관리들입니다.
■최초의 활판인쇄 일간신문
어떻습니까. 1577년 8~1월 사이에 유통된 민간발행조보 중에서 이번에 발굴된 5~8일치, 그것도 판독가능한 극히 일부만 살펴봤는데요. 물론 기자(승정원 주서)가 직접 취재한 기사를 쓰지는 않았죠.
따지고 보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각 지방이나 일선 부서에서 올린 장계나 서계 등 보고서를 보십시요. 당대의 사회상을 생생한 필치로 고발한 르포기사와 다를바 없습니다.
그 뿐입니까.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올리는 상소문은 임금과 권력가들을 혹독하게 비판했죠. 게다가 국왕의 자아비판까지 여과없이 게재했잖습니까. 비록 직접 취재하지는 않았지만 내용과, 내용이 전하는 의미는 지금의 신문에 견줘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궁궐의 내밀한 소식 뿐 아니라 임금의 자아비판 내용까지 가감없이 ‘보도’되었으니 선조로서는 분기탱천했겠죠.
흥미로운 사실은 민간인쇄조보에 사용된 활자는 목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금속활자(초주 갑인자)도 10~15% 정도 섞여있답니다. 활판으로 찍어낸 최초의 일간인쇄신문은 1650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된 ‘아인코멘데차이퉁’이라는데요. 또 중국에서 송나라 시대부터 발행되었다는 조보(‘통보’)는 목판인쇄로 찍은 것이라 하고요. 김영주 교수는 “따라서 1577년 조선의 민간업자가 찍어낸 ‘조보’는 세계최초의 활판인쇄 일간신문일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조보의 민간인쇄시대가 선조의 혹독한 언론 탄압 속에 ‘100일 천하’로 끝났다는게 안타깝기만 합니다. 만약 선조가 금하지 않았다면, 더 나아가 한글 형태로 배포되어 일반 백성들까지 볼 수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너무 비현실적인 바람이겠죠.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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