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개봉된 영화 ‘밀정’을 기억하십니까. 영화에는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원들이 중국에서 서울로 폭탄을 반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923년 실제로 일어난 ‘황옥 경부 사건’이라 합니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인 황옥(1885~?)은 의열단원 김시현(1883~1966) 등과 중국에서 서울로 폭탄을 반입합니다. 영화에서 ‘황옥’ 역은 송강호씨가, ‘김시현’역은 공유씨가 맡아 열연했습니다.
■할아버지 테러조직
그런데 말입니다. 2015년 5월 깜짝 놀랄만한 사진 한 장이 공개됩니다. 사진은 미국 뉴저지에 거주하는 수집가(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가 미군 첩보부대(CIC)가 소장한 사진을 공개한 건데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25일에 찍힌 사진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2주년을 맞아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 중인데요. 사진을 잘 보십시요.
이승만 대통령의 뒤에서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인물이 보입니다. 호호백발 노인이죠. 범인은 당시 예순 두살 된 ‘유시태(1890~1965)’라는 분이었는데요. 그런데 그 분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던 독립투사였답니다. 이 저격사건은 미수에 그쳤는데요. 방아쇠를 두 번이나 당겼지만 발사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허투루 넘기면 안됩니다. 사진 밑에서 타이핑 된 설명문을 읽어보십시요.
“62세인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 하고 있다. 이번 암살 시도는 김시현 의원이 이끄는 12명의 반정부 조직이 선동했다.’
무슨 말일까요. 범인 유시태의 배후에 반정부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이끈 사람이 ‘김시현 의원’이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 ‘국회의원 김시현’이 바로 공유씨가 역할을 맡은 ‘의열단원 김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연세도 69살이었습니다. 방아쇠를 당긴 이도 62살(유시태), 배후 인물도 69살(김시현)이었고, 두 분 다 의열단원 출신이었다는 얘기죠. ‘할아버지 테러조직’이라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시 암살미수사건을 보도한 신문을 급히 찾아보었습니다.
“현행범 유시태(62)를 취조한 바 전 민국당 국회의원 김시현이 유시태에게 권총사용법을 8회나 교습시켜…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하여 귀빈석에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가…, 대통령 훈화 도중 유시태는 배후 약 3m 거리에서 저격하고자 휴대한 권총(독일제 엘프르트)의 방아쇠를 두번이나 당겼으니 불발로 인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됐다.”(<경향신문> 1952년 6월28일)
■이승만을 처단해야 할 이유
이 사건으로 김시현·유시태 노인 등 13명이 체포됐는데요. 8월 22일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저격사건의 첫번째 공판이 열렸습니다. 김시현·유시태 두 분의 태도는 당당했습니다.
특히 김시현은 “언제부터 죽이려 했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대통령이 할복하기 전에는 대중의 원한을 풀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하면서 당당하게 범행동기를 밝힙니다.
“괴뢰들의 남침도 모르고 있다가 6·25를 당하고는 허위보도만 하고 맹랑한 녹음방송만 하고 저이들만 도망질하고 그후 한마디 사과도 안하고….”
1951년 들어 더욱 분통터지는 사건이 잇달아 터집니다. 고급장교들의 국고금과 보급품 착복으로 50만명에 이르는 제2국민병 중 9만명 이상이 희생당한 국민방위군 사건(1951년 1~4월)과, 공비와 내통했다면서 양민 600여명을 죽인 거창양민학살 사건(1951년 2월 10~11일)이 일어난겁니다.
김시현은 ‘이승만 제거 결심’을 굳힙니다. 동지를 물색하던 김시현 노인은 같은 의열단원 출신인 유시태를 대구 모 여관에서 만납니다. 유시태는 “대통령을 제거해야 겠다”는 김시현의 말에 “내가 하겠다”고 의기투합합니다.
그 무렵 부산의 정치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절대 재선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직선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그러나 직선안이 1952년 1월 18일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됩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개헌안을 일부 수정해서 다시 국회에 제출하는데요. 이것이 발췌개헌안입니다.
당시 야당인 민국당도 대통령의 정권연장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양측이 사생결단으로 맞서죠. 그러나 양측 모두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1950년의 5·30 총선에서 무소속이 62.9%의 득표를 할 정도로 반이승만과 반민국당 세력이 대거 국회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양측은 한 명의 국회의원이라도 확보하려고 혈안이 돼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금품을 살포하고 ‘백골단’과 ‘땃벌떼’와 같은 깡패와 청년단을 동원해서 국회의원들을 협박·포섭합니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친위세력을 요직에 포진시킨 뒤 부산·경남·전라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5월 25일) 다음 날에는 국회의원 50여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끌고가 국회의원들을 구속시킵니다.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거죠. 이것이 ‘부산정치파동’입니다.
정말 한심하지 않습니까. 전선에서는 다른 나라 젊은이들까지 동원되어 피를 흘리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그 알량한 권력을 차지하려고 관제데모와 국회의원 구속·협박과 같은 폭거를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공판에 임한 김시현은 “민의(民意)니 뭐니 하고 데모로 떠들썩하고 그 민의가 하루 3만원~10만원씩 돈에 팔려오고 할 때 거사를 최종 결정했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김시현과 유시태의 거사는 총탄 불발로 미수에 그치고 맙니다.
■의열단의 정신으로
궁금증이 생기죠. 두 분은 왜 노구를 이끌고 가장 과격한 방법인 저격으로 대통령을 처단하려 했을까요.
두 사람은 의열단 출신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김원봉(1898~1953) 등의 주도로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국내외 일제관공서의 파괴와 요인암살 및 테러 등이 주요투쟁활동이었죠.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답니다.
왜냐. 비폭력 투쟁인 3·1운동이 좌절되자 ‘광복을 위해서는 폭력 대응이 필수적’이라고 여겨 암살과 파괴, 테러라는 과격하지만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했습니다. 그에 따라 ‘공약 10조’와 ‘파괴대상 5파괴’ ‘암살대상 7가살’이라는 행동지침을 채택하죠.
‘공약 10조’의 골자는 정의로운 일을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겁니다.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해,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며, 의열단의 뜻을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5파괴’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주요 기관입니다.
‘7가살(可殺)’은 총독부 고문과 군 수뇌, 타이완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神)입니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폭사(1920년 9월 23일)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12월 27일),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청사 폭탄 투척(1921년 9월 21일),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년 1월12일),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습격 사건(1926년 12월 28일) 등은 의열단의 대표적인 의거들입니다.
■“나의 건강관리는 독립운동이다.”
김시현의 사주를 받고 이승만에게 방아쇠를 당긴 유시태는 누구일까요. 1920년대 초 국내에서 활약한 의열단원이었죠. 의열단은 1922년 제2차 국내암살·파괴활동을 계획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국내에서 마련하고자 했는데요. 당시 유시태 선생은 권정필·남영득·유병하 등과 함께 서울 내자동의 부호 이인희 집을 찾아가 권총으로 위협하며 군자금을 요구했습니다. 유시태는 결국 이인희의 밀고로 경찰에 붙잡혀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시현 선생의 의열단 경력은 더할 수 없이 화려합니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나온 김시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6차례 체포와 15년 옥고’를 기록한 전형적인 의열단원이었습니다. 특히 1923년 다량의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시키다가 붙잡혀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영화 ‘밀정’의 주제인 ‘황옥 경부 사건’입니다. 1929년 출감한 김시현은 곧바로 지린(吉林)으로 떠나는데요. “좀 쉬라”는 가족들의 간청에 김시현은 딱 잘라 말했답니다.
“나의 섭생(攝生·건강관리)은 독립운동 뿐이다.”
김시현은 의열단이 추진하던 군사간부학교 설립에 참여하는데요. 국내외 청년들을 모집하는 초모관으로 활약합니다. 김시현은 특히 베이징(北京)에서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던 밀정 한삭평(박준빈이라고도 함)을 처단했다는군요.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는데요. 1939년 출소한 김시현은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에 나서다 체포와 석방을 거듭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는데요.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국가 수립의 노선을 지지하는 민족자주연맹의 간부로 활약했습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김시현은 민국당(민주국민당)에 참여했고, 1950년 5월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6·25전쟁이 발발한 겁니다.
김시현·유시태 선생은 불의를 보면 권총을 빼어들어 쏴버리는 골수 의열단원이었습니다. 특히 김시현은 ‘나쁜 놈 총 쏘아 죽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의열단원’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보다 더 피가 끓었던 의열단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중에 김시현은 틈만 나면 “전쟁처리를 잘못해 젊은 청년들을 다 죽게 한다”고 분개하시면서 “대통령이 죽어야 한다”고 분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무 독선적이야. 전쟁에 지고 부산으로 쫓겨온 대통령이…무슨 군왕처럼 날뛰고, 법을 무시해가면서 대통령을 더 해보겠다는 그 태도가 옳지 않아. 그래서 그만 없애버리는 것일세. 그 자는 해외 있을 때부터 파벌을 조성하고 사욕에 치우친 일이 많았어.”
김시현은 이승만을 선거로 몰아내자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이승만을 전연 모르는 사람”이라고 일축했답니다. 김시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 두 사람 모두 ‘불의 타도’를 위해서라면 암살·테러를 주저하지 않았던 ‘의열단 기질’을 발휘한 겁니다. 하지만 총탄이 불발하면서 계획이 엉클어진 겁니다.
■암살 이후의 계획은?
김시현과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두 사람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석방됩니다. 1960년 4월 28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한 유시태는 “저격사건 당시 경찰관으로부터 구입한 권총을 미리 검사해보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고 저격불발의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김시현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저격 성공 이후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승만을 제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의원들과 힘을 합쳐 내각책임제를 관철시킬 생각이었답니다. 그리고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9~1953)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명실상부한 민주애족정권을 수립한다는 것…. 이것이 암살 이후의 계획이었다고 술회했답니다. 물론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하죠.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유시태가 당긴 방아쇠에서 총탄이 발사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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