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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kg은 왜 옷에 묻은 얼룩이 되었을까

“질량(㎏)은 옷에 묻은 얼룩 같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통용되는 국제단위계는 길이(m), 질량(㎏), 시간(s), 전류(A), 온도(K), 광도(cd), 물질량(mol) 등 7개다.

그런데 무결점을 추구하는 과학계의 입장에서 가장 주먹구구식으로 통용되는 단위가 질량(㎏)이다.

예컨대 빛이 진공에서 2억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길이를 ‘1m’로 정의한 것처럼 다른 6개 단위는 불변의 물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정의됐다.
그러나 ㎏ 단위는 130년 가까이 임의 기준이 통용돼왔다.

 

1889년 처음 제작되어 프랑스에 보관중인 kg원기. 시간이 흐르면서 질량의 차이가 나타났다고 한다.|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제공

19세기 과학자들은 1기압 섭씨 4도의 순수한 물 1ℓ를 ㎏으로 정의했다.

과학자들은 1889년 백금 90%, 이리듐 10%의 합금으로 ‘㎏ 표준원기(原器)’를 제작, 프랑스의 국제도량형국 비밀금고에 보관해두었다.

세계 각국은 이 ㎏ 원기의 복사본을 자국에 가져가 1㎏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원기의 눈금이 외부자극에 흔들린다면 전 세계의 저울 기준이 바뀔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우려 때문에 ㎏ 원기는 복사본 제작과 질량값 비교 점검을 위해 단 3차례만 꺼낸 바 있다.
1989년 점검에서 이상기류가 흘렀다. 복사본에 비해 ㎏ 원기의 질량이 1㎏의 50㎍(1㎍은 100만분의 1) 줄어든 것으로 측정됐다.

비밀금고에 보관된 ㎏ 원기의 백금과 이리듐 원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떨어져 나가 질량이 줄어든 것일까, 아니면 복사본의 질량이 늘어난 것일까.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신약개발 등 극미세 분야를 다루는 과학기술이나 산업 분야에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사안이다.

이광철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의 말마따나 과학계로서는 19세기 유물을 최첨단 시대인 지금까지 정밀측정의 단위로 써왔다는 자체가 자존심 상한 일이었다.

㎏을 ‘옷에 묻은 얼룩’이라고 찝찝하게 여길 만하다.
해결책이 나왔다. 5개국 국제연구팀이 불안정한 ㎏ 원기 대신 플랑크 상수를 이용해서 ㎏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원자와 원자 간 거리를 레이저로 정밀 측정해 무게 1㎏짜리 규소 구체(球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불완전한 인간의 제품이 아닌 영영 변치 않는 ‘상수(常數)’를 동원해서 흔들림 없는 단위를 완성한 셈이다. 정확히 128년 걸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