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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너의 목덜미가 좋고' 천재시인 이상이 썼다는 연서는 여성이 여성에게 보낸 편지였다

“나는 진정 네가 조타(좋다). 웬일인지 모루겟다(모르겠다). 네 적은 입이 조코 목들미(목덜미)가 조코 볼따구니도 조타….” 2014년 7월 제목만으로도 단박에 주목을 끄는 기사가 보도됐다. 당시 25살이던 이상(1910~1937)이 당시 23살 소설가였던 최정희(1912~1990)에게 보냈다는 핑크빛 연서였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1910~1937)이 23살 젊은 이혼녀이자 동료소설가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처음 발견됐다’는 것도 핫뉴스일텐데, ‘네 입과 목덜미까지 좋다’는 편지 내용까지 일거에 대중의 시선을 빼앗을만한 소식이었다,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연서로 소개된 편지. 그러나 편지 끝부분의 서명이 ‘이상(李箱)’이라 했지만 이상이 아니라 이제(李弟)이며, 이제는 다름아닌 이현욱이 자신을 낮춘 표현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편지지 오른쪽 끝에는 1940~41년 8월 사이에 존재했던 오문출판사 용지라 되어 있다. 그러나 이상은 1937년 4월 타계했으므로 이 편지를 보낼 수 없다.  |김주현 교수 제공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핑크빛 연서?

이후 이 편지는 의심할 바 없이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연서’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빛바랜 편지에서 풍기는 인간미, 그리고 왠지 모를 낭만 때문일까. 이후 잇달아 출간된 작가들의 편지모음집에 ‘최정희에게 보낸 이상의 연서’가 실렸다. 어떤 편지모음집은 박인환·이광수·김동인·이효석·노자영·임화·김유정·최서해·채만식·현진건 등의 편지를 묶으면서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를 프롤로그는 물론이고 본문의 첫번째 아이템으로 소개했다. 심지어는 이 연서를 이상의 편지로 직접 언급한 학위논문까지 나왔다. 

이제 ‘이상이 두 살 연하의 최정희를 연모했지만 최정희가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때문인지 이상이 2년 뒤인 1937년 일본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는 이야기 구조가 사실로 굳어졌다. 

①②는 육필편지의 봉투 앞뒷면. ①앞면에는 ‘받은이=최정희’이고, ②뒷면에는 ‘보낸이=이현욱’이라 적혀있다, 그리고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보낸 또다른 편지(③)에는 ‘이제 현욱(李弟 現郁)이라 했다. 이재(李弟)는 이현욱 본인을 스스로 낮춘 표현이다.  ④는 편지 앞면에 있는 우편 소인. 소화(昭和 15년) 12월26일, 즉 1940년 12월26일이라고 되어 있다. ⑤는 이상이 동생 운경에게 보낸 엽서이다. |김주현 교수 제공

■별 싱거운 남자의 편지? 

그런데 최근 기자는 한국문학언어학회가 펴내는 학술지(<어문론총>) 9월호(제81호)에 실린 논문 한 편을 접했다. 김주현 경북대 교수(국문과)의 논문(‘이상 육필 원고의 진위 여부 고증’)이었다. 문학 담당도 아닌 시쳇말로 ‘문알못’ 기자였지만 김교수의 논문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지랖 넓게 소개하려 한다.

이 ‘육필편지=이상의 연서’로 공개한 이는 평론가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였다. 

그렇다면 권교수는 왜 이 편지를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것’으로 판단했을까. 당시 기사에 따르면 편지의 글씨체가 영인문학관에 보관된 이상의 친필유고와 일치하고 편지 끝부분에 ‘이상(李箱)’이라는 한자 사인이 있으며, 최정희가 생전에 ‘이상에게서 편지를 여러통 받았지만 모두 찢어버렸다’고 말한 점 등을 들어 이상의 친필편지로 판단했다. 권교수는 편지 본문에 시골생활 등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상이 25살이던 1935년 12월에 편지를 쓴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때는 23살의 이혼녀인 최정희가 잡지사 <삼천리>에서 만난 편집자이자 발행인인 파인 김동환(1901~?)과 사귀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냈다는 육필편지의 맨 끝 ‘서명’(표본). 김주현 교수는 “이상의 ①②③④⑤⑥ 서명 필체와 확인히 다르다 ”고 밝혔다. |김주현 교수 제공   

■편지봉투의 소인과 편지지가 알려준 진실 

그러나 김주현 교수는 거두절미하고 “이 육필편지는 이상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물증을 보여준다. 

이 편지를 담은 편지지와 봉투가 증거라는 것이다. 우선 김교수가 내민 편지지(원고지)의 왼쪽 귀퉁이를 보면 ‘오문출판사 용지’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다. 그런데 오문출판사는 1940년 설의식과 김춘동이 설립했고, 1941년 8월 쯤 문을 닫은 출판사다. 김교수는 “이미 1937년 작고한 이상이 어떻게 1940~41년 8월 무렵 존재했던 (오문)출판사의 용지를 편지지로 썼단 말이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봉투에 찍힌 발신자의 이름과 소인이다.

사실 문제의 육필편지는 김동환의 셋째아들(김영식씨)이 2001년 ‘김동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펴낸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에 실려있다. 이 서한집에서는 편지의 필자를 ‘이현욱’이라 못박고 있다. 즉 이 육필편지의 봉투 앞면에는 ‘최정희’라는 수신자가 있고, 뒷면에는 ‘이현욱(李現郁)’이라 분명히 적혀있다. 편지의 ‘받은이’는 ‘최정희’가 맞지만 ‘보낸이’는 ‘이상’이 아니라 ‘이현욱’이라는 얘기다. 또 봉투에 찍힌 우체국 소인은 ‘15년(소화·昭和) 12월 26일)’, 즉 1940년 12월 26일’이다. 그렇다면 1937년 4월 17일 타계한 이상이 최정희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봉투와 소인을 토대로 정리하면 이 편지는 ‘1940년 12월26일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일 수밖에 없다.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보낸 또다른 편지. 편지 첫머리에 ‘정희씨(貞熙氏)’라 했고, 맨 뒤에는 ‘이제 현욱(李弟 現郁)’이라 했다. |김주현 교수 제공 

■이상의 필체가 아니다

그리고 <작고문인 48인의…>에는 문제의 육필편지 외에도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보낸 다른 편지’도 실려있다. ‘정희씨(貞熙氏)’에서 시작해서 ‘이제현욱(李弟 現郁·이현욱)’으로 끝나는 편지다. 김교수는 이현욱 자신을 낮춘 표현으로 ‘이제(李弟)’ 혹은 ‘이제현욱(李弟 現郁)’을 쓴 것을 권교수가 ‘이상(李箱)’으로 오독했다고 분석했다. 

김교수는 “이상이 여러군데에 남긴 서명을 비교해보면 이 육필편지의 서명이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단정했다. 김교수는 “이상의 필체는 글자를 강하게 긋는 특성이지만 문제의 육필편지에는 그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육필편지 내용의 글씨체도 이상의 다른 육필(동생 김운경에게 보낸 편지 등)과 사뭇 다르다. 문체도 문제의 육필편지는 전반적으로 국문체를 썼지만 이상의 다른 편지들은 한자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표기법도 다르다. 이상은 많은 편지에서 인명을 한자로 적었지만 이 문제의 육필편지는 한글인 ‘정히’로 시작된다. 

김주현 교수는 또한 “문제의 육필편지에는 ‘닷시’, ‘모루나’, ‘슬품’, ‘처름’, ‘헛전하고’라는 독특한 표현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이현욱의 글(<편지>, <일기> <결별>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렇게 이름과 필체가 똑같은 발신자의 이름이 분명 ‘이현욱’이었는데 13년이 지난 2014년 ‘이상의 편지’로 바뀐 것이다. 


■이상의 <종생기> 때문에 생긴 오해 

왜 그런 오류가 나왔을까. 김주현 교수는 “아마도 이상이 1937년 발표한 단편 <종생기(終生記)>의 내용이 한몫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작품은 ‘이상이라는 작가 실명의 주인공 서술자가 등장하는 고백체 소설이다. 죽음의 인식과 예감이 서술의 심층을 이룬다. 소설은 냉소주의 지식 청년 이상이 바람둥이 소녀 정희(貞姬)로부터 R과 S와 모두 헤어졌으니 3월3일 오후 2시에 만나자는 속달 편지를 받는다. 바로 소설 속 여주인공 이름이 ‘정희’(한자는 다르다)라는 것 때문에 <종생기>가 최정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여성>(1940년 10월)에 실린 이현욱(아래사진)과 남편 임화(윗사진). 이현욱(필명 지하련)은 이현욱은 해방 이후 남편과 함께 월북했으며, 남편 임화가 1953년 숙청된 이후 거리를 헤매다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하지만 김교수는 “문제의 육필편지는 이상이 아니라 이현욱의 여러 글과 일맥상통한다”고 밝혔다.

“당신은 내게 크나큰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점점 당신이 머러지고…돌아오는 거름에 말할 수 없이 헛전하고 외로웠습니다…난 당신에게 긴-편지를….”(문제의 육필편지) 

“희야에게 긴-편지 쓰고 싶소…더 할 수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정을 주는 것인지도 모루겠오”(<삼천리> 1940년 4월 이현욱의 ‘편지-시인 임화부인’) 

“熙에게서도 편지가 없다. 갓가운 이들이 나로부터 점점 머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일이다. 서롭고 외롭다.”(<여성> 1940년 10월 이현욱의 <일기>)

‘쓸쓸함’ ‘외로움’ ‘긴-편지’ 등의 표현이 일맥상통하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남성이 여성에게(혹은 그 반대) 보내는 짝사랑 편지 같다.   

(1940년 10월)에 실린 이현욱(아래사진)과 남편 임화(윗사진). 이현욱(필명 지하련)


■극적인 반전…여성작가가 여성작가에 보낸 편지

여기서 극적인 반전 스토리가 숨어있다. 최정희에게 마치 연애편지 같은 사연을 보낸 ‘이현욱’이라는 인물이 바로 여성, 즉 ‘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활약한 여성소설가라는 것이다. 일본 도쿄(東京) 쇼와(昭和) 여학교와 도쿄 경제전문학교를 나온 이현욱은 당대 프로문학의 대표논객이던 임화(1908~1953)의 부인이다. 1940년 백철(1908~1985)의 추천으로 단편 ‘결별’을 <문장>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 동맹에 참여했고, 1947년 남편과 함께 월북했다. 1953년 남로당 숙청과정에서 남편 임화가 숙청당하자 이현욱 또한 거리를 헤매다가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이현욱은 왜 같은 여성인 최정희에게 연서를 방불케하는 편지를 보냈을까. 최정희는 1931년 김동환이 운영중인 대중잡지 <삼천리>에 기자로 입사하면서 김동환과 인연을 맺었다. 김동환의 셋째아들인 김영식씨는 “최정희는 1943년부터 아버지(김동환)가 납북된 1950년까지 아버지의 동거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최정희는 성격이 사교적이어서 문단의 여러 시인·작가들과 폭넓게 교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일, 궂은 일까지 다 챙겨서 문단 사람들이 흉금을 털어놓았고 심지어는 자질구레한 살림살이 부탁까지 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문단의 어느 유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이념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최정희에게 편지를 보낸 작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효석·이육사·김사량·김동리·이태준·박태원·한설야·황순원·김환기·노천명·모윤숙 등…. 이현욱 역시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존재인 최정희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썼다.

파인 김동환(맨 오른쪽)과 최정희(오른쪽에서 두번째), 모윤숙, 이선희, 이광수 등이 찍은 사진. 김동환은 영향력있는 대중지인 <삼천리> 편집·발행인이었고, 최정희는 <삼천리> 사원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연애편지를 방불케하는 뜨거운 편지를 왜?

특히 1940년 초여름 이현욱이 지병인 십이지장 궤양 때문에 마산 친정집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상경했다. 김주현 교수는 바로 “심신이 약해진 이 무렵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편지를 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40년 12월 26일 보낸 문제의 육필 편지를 보면 “당신이 내게 준 글…두번째인데 한번은 내(이현욱)가 시골에 있을 때”라는 대목이 있다. 이 무렵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삼천리> <여성>)를 보면 최정희는 이현욱에게 ‘행복을 주는 희야’였지만 ‘…희 때문에 서럽고 외로우며,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이었다.

최정희는 당시 문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삼천리>의 사원이었고, 또 <삼천리>의 편집·발행인을 맡고 있는 김동환과도 연인 사이였다. 김주현 교수는 “이현욱은 그런 최정희의 관심을 갖고 싶어했을 것”이라면서 “편지에서 최정희는 이현욱에게 애증의 대상으로 나타나있다”고 밝혔다. 이현욱은 시쳇말로 여자들끼리의 우정·의리·사랑을 일컫는 ‘워맨스(womance)’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육필편지를 보면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난다”면서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해서 쓰려고 한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최정희가 이현욱에게 “함께 글 쓰고…”라 했고, 그래서 이현욱이 “당신(최정희)을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이다. 

문제의 육필편지와 평소 이현욱의 표현과 필체를 비교분석한 표. 육필편지에 나오는 ‘닷시’, ‘맛나’, ‘모루나’, ‘처름’, ‘헛전하고’ 등은 이현욱의 문체적 특성을 역력히 보여준다.|김주현 교수 제공  

■“우린 즐거웠었다. 이제 널 떠나는 슬픔을…”

이현욱은 1940년 12월 초 <문장>에 백철(1908~1985)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결별>을 발표하여 등단한다.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육필편지를 보낸 12월26일보다 20여 일 전이다. 이현욱이 최정희의 권유로 이 작품을 썼고, 등단 전에 최정희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이현욱은 동갑내기지만 문단 선배인 최정희를 매우 부러워하며 따르려 했다. 이현욱의 데뷔작인 <결별>에도 ‘정희(貞熙)’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속 ‘정희’는 주인공(형례)의 여학교 때부터 절친한 동무라 했는데, 소설가 최정희와 이름과 나이가 같다. 

김주현 교수는 “결국 이현욱의 데뷔작인 <결별>은 최정희의 권유로 쓴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정희는 이현욱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 같다. 남녀간 연서를 방불케하는 이현욱의 편지공세를 최정희가 부담스러워했을 수도 있다. 이현욱의 육필편지를 보면 “우린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최정희에게 보내는 이별의 메시지로 읽힌다. 또한 육필편지는 “당신(최정희)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슬픈 편지를 두 번이나 받았다”면서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았다”고 했다. 김주현 교수는 “한마디로 이현욱은 최정희의 권유로 쓴 데뷔작 <결별>의 원고를 보낸 뒤 답장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믿어지지 않은 슬픈 편지’만 받았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2001년 파인 김동환의 아들이 ‘김동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 이 서한집은 문제의 육필편지의 작자를 이현욱이라 적시하고 이현욱이 보낸 편지봉투까지 올려놓았다.|김영식의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 민연, 2001에서

■백철의 찬사를 받은 이현욱(지하련)의 데뷔작 

김주현 교수는 “어쩌면 이현욱의 소설 원고를 받아본 최정희가 ‘왜 내 이름(정희)을 소설에 끌어들였느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편지를 이현욱에게 보냈을 수도 있다”면서 “이것이 이현욱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은 슬픈 편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풀이했다. 아무튼 백철의 추천으로 마침내 등단하게 된 이현욱은 ‘작품을 다룬 솜씨와 작품에 임한 태도가 오히려 너무 노련하고 여유가 있다’(백철)는 찬사를 받는다. 단박에 문단의 주목을 받은 이현욱은 더는 최정희를 부러워하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가 됐다. 김교수는 “그래서 이현욱이 육필편지에서 최정희에게 ‘결별’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김주현 교수는 논문에서 2014년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연서’로 알려져 큰 관심을 모았던 글은 ‘여성(이현욱)이 여성(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였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논증했다.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정리하자면 앞서 밝혔듯 이 육필편지는 2001년 김동환의 아들인 김영식씨가 ‘이현욱의 편지’로 봉투와 함께 소개했다. 이 편지봉투에는 수신자 ‘최정희’, 발신자 ‘이현욱’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배달소인을 봐도 ‘소화(昭和) 15년’(1940년 12월26일)이라 돼있다. 1937년 4월 17일 일본에서 타계한 이상의 편지가 3년 8개월 여 뒤인 1940년 12월 배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또한 바로 옆에는 ‘정희(貞熙)’씨와 ‘이제 현욱(李弟 現郁)’이 편지 맨 처음과 마지막에 적혀있는 또 다른 편지가 소개됐다. 두 편지의 서명과 필체, 문체도 같다. 굳이 내용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이현욱의 글이 실린 <여성>지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확증편향의 오류  

김주현 교수는 이런 오류에 대해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이른바 ‘확증편향’이 아니냐고 했다. 사람은 종종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데 바로 그런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김 교수는 “만약 2001년 출간된 <작고문인…>에 실린 이현욱의 편지와 편지봉투를 봤다면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사실 아무리 영향력있는 연구자나 뛰어난 필치를 갖춘 작가, 혹은 객관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기자, 혹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함부로 ‘천의무봉’ 운운 할 수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군가 오류를 지적하거나, 혹은 본인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면 ‘깔끔하게’ 바꿀 수도 있어야 한다. 만약 다른 이의 지적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재반론 등의 치열한 논쟁을 거쳐 극복하면 될 일이다.


■‘문알못’ 기자의 변 

‘문알못’인 기자가 자기분야도 아닌 문학관련 논문에 흥미를 갖게 된 이유가 있다. 김주현 교수의 지적대로 2014년 이후 이현욱(필명 지하련)의 편지가 이상의 연애편지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출간되는 단행본이나 심지어는 학위논문에서까지 ‘이상의 연애편지’가 실려왔다. 기자는 바로 이 부분에서 ‘꽂혀’ 김교수의 논문을 살펴보았다. 김교수가 논문을 쓴 바로 그 이유, 즉 누군가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이 편지는 영영 ‘이상의 연서’로 소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칫 온몸이 오글거리는 연서를 썼음에도 상대방의 거부로 결국 짝사랑으로 끝났다는, 작가 이상의 입장에서는 어떤 면에서 ‘억울한’ 이미지만 안게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금이 그렇다. 글쓰기가 직업인 기자 역시 이번 주제를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과연 지금까지 썼던 내 글은 대체 얼마나 많은 오류를 안고 있을까. 그 오류를 지금도 모르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편지 전문>

지금 편지를 받엇스나 엇전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안는 것이 슬품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하기 발서 두 번째입니다. 그 한번이 내 시골 잇든 때입니다. 이른 말 허면 우슬지 모루나 그간 당신은 내게 크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닷시금 잘 알 수가 없어 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구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엿는 지는 모루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머러지고 잇단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이 알엇섯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거름이 말할 수 없이 헛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노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거러면서 나는 별 리유도 까닭도 없이 작구 눈물이 쏘다지려구 해서 죽을 번 햇습니다.

집에 오는 길노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 보면 우슬 편지입니다―

이현욱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 이현욱과 최정희의 사이는 여성끼리의 우정 사랑 의리를 뜻하는 '워맨스'를 방불케한다. |김주현 교수 제공 

“정히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 은 못됫섯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섯다. 내 이제 너와 더불러 즐거웠든 순간을 무듬 속에 가도 니즐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름 어리석진 않엇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안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기 거울 갓기를 빌지도 모룬다. 정히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품을, 너를 니즐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구 한다. 하지만 정히야, 이건 언제라도 조타! 네가 백발일 때도 조코 래일이래도 조타!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찻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듸 내게로 와다고!. 나는 진정 네가 조타! 웬일인지 모루겟 다. 네 적은 입이 조코 목들미가 조코 볼다구니도 조타!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히야 너를 위해 네가 닷시 오기 위해 저 夜空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이 사러가 련다……云云”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엿스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엇습니다. 당신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잇슬 줄을 알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름 약어보려구 햇슬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엇든지 내가 글을 쓰겟다면 무척 좋아하든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름 속삭이든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두록 언잖게 하는 것을 엇지 할 수가 없엇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썼스면 좋겟다구 해서 쓰기로 헌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맛나고 싶다고 햇스니 맛나드리겟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트저 당신 잇는 곳엔 잘 가지지가 .읍니다. 금년 마지막날 오후 다섯시에 “ふるさと”라는 집에서 맛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이제(李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