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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쌍둥이 불상이었다", CT촬영으로 100년만에 물증 잡은 '오쿠라' 유물의 반출범죄

구한말 조선에 진출한 일본 실업가 중에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라는 인물이 있다. 

1873년 일본에서 다이세이(大成)라는 회사를 차린 오쿠라는 청일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 ‘죽음의 상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오쿠라는 구한말 부산으로 진출하여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하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건칠보살좌상’. 1915년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에게 사들인 유물이다. 그런데 이 유물과 짝을 이룬 보살좌상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 오쿠라는 구한 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백주대낮까지도 인부들을 끌고 다니며 조선의 고분을 도굴해서 10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오쿠라가 가져간 한국 문화재는 1917년 오쿠라가 건립한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1917년 개관)에 소장돼 있다.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 가운데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석탑이 대표적이다. 반출 하다 하다 이렇게 큰 석탑까지 해체해서 가져갔던 것이다.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 가운데 또하나의 유물이 있으니 그것이 건칠보살좌상이다.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 오쿠라슈코칸에는 이 건칠보살좌상의 본래 소장처나 입수 경위, 입수당시의 상태 등과 관련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완전범죄’가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이른바 오쿠라슈코칸 소장 건칠좌상과 아주 비슷한 건칠좌상이 1점 남아있으니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보살좌상은 ‘덕수 5547’이라는 유물번호를 붙이고 있다.  

일본 오쿠라슈코켄에 소장중인 건칠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한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빼돌렸다. 그러나 입수경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오쿠라슈코칸 소장

덕수궁미술관의 전신인 이왕가박물관이 1915년 일본인 골동상인 우라타니 세이지(浦谷淸次)에게서 구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가격은 400엔이었다. 

1881년부터 일본에서 골동품 매매업을 시작한 우라타니는 1912년부터 서울에 분점을 두고 1917년까지 이왕가박물관에 중국과 한국의 도자기와 불상, 나전칠기, 불경 등 수십점을 팔아넘겼다. 

조선총독부박물관도 우라타니에게 조선백자 1점을 사들인 기록도 있다. 1918년 간행된 <이왕가박물관 소장사진첩 상권>에 건칠보살좌상의 구입 후 전시모습을 찍은 사진이 실려있다. 

그렇다면 왜 비슷한 건칠좌상이 오쿠라슈코칸에 소장되어 있는 것일까. 

학계는 두 조각상의 크기와 제작기법, 세부적인 특징이 매우 흡사하고 수인(볼·보살의 손모양)만 반대여서 같은 공방에서 제작한 ‘쌍둥이 보살상’이거나 본래 한 본존의 협시로 라고 추정해왔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가 최근 박물관 소장품인 ‘덕수 5547’ 건칠좌상을 CT(컴퓨터단층) 영상 등을 통해 분석한 결과 그런 학계의 추정이 사실로 드러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간행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 조사보고 3>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좌상과 오쿠라슈코칸 소장 건칠좌상이 ‘한 쌍을 이룬 협시 보살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건칠상의 비교촬영영상. 상을 완성한 뒤 그 안의 흙(조소상)을 빼내는 방식이 동일하다. 후두부를 절개하고 그 안에서 흙을 제거한 뒤 마감처리를 하지 않은 점이나 긁어내고 남은 흙이 얇은 막을 이룬 정도가 똑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보살상은 목재인 목심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겹의 천을 바르고 옷칠을 거듭한 뒤 금박을 입혀 제작했다. 이런 기법을 ‘건칠(乾漆)’이라 한다. 

중앙박물관 소장 건칠보살좌상은 보관을 포함해서 124.5㎝로 건칠기법으로 제작된 보살상 가운데 입상을 제외하면 가장 크기가 크다. 이번 분석결과 천은 8~10겹이 관찰됐다. 

눈동자에는 석영을 끼워놓았고 귀는 별도의 나무로 만들어 부착했는데,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접착제를 사용했다. 두 손도 나무로 깎아 끼워넣었다. 보관은 앞면 2장, 뒷면 1장 등 총 3장의 금속판을 결합해서 만들었다. 앞면의 장식판이 여러겹 달린 게 특징이다. 이런 제작방식의 특징은 오쿠라슈코칸 소장 건칠좌상과 매우 유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좌상의 CT쵤영 모습.

또 건칠상은 흙으로 조소상을 만들어 건칠을 붙인 뒤 조소상을 빼내는 형식으로 제작한다. 그런데 두 건칠좌상 모두 뒷머리를 절개한 뒤 내부에서 흙으로 된 조소상을 빼내는 형식이 동일했다. 즉 상의 아래쪽과 후두부를 통해 흙(내형토)을 제거하고 마감처리를 하지 않은 점이나 긁어내고 남은 흙이 얇은 막을 이룬 정도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오쿠라슈코칸 소장품이 일치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슴장식의 문양구성도 쌍둥이 같았다. 

강삼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는 “이러 특징을 비교해볼 때 두 상은 같은 장인(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아마도 한 쌍의 협시보살(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로 구성하려고 함께 제작한 불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쿠라는 건칠보살좌상을 일본으로 반출하면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한·일 양국에 비슷한 유물이 남아있어서 그저 ‘수상하다. 같은 유물 아니냐’는 구구한 억측만 쌓여왔다. 심증은 갔지만 물증이 없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100여 년 만에 CT(컴퓨터단층) 촬영이라는 첨단 과학 분석 덕분에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