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헷갈리기 쉽다. 미륵사지 서탑 옆에 서있는 큰 건물이 박물관인줄 알지만 그게 아니다. 신설된 박물관은 요즘 서울시내 대학 건물처럼 지하를 파고 들어가 조성돼있다. 최흥선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미륵사지 전체가 사적(제150호)구역이어서 층고 12m 이상의 건물을 세울 수 없는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에 주변 경관을 해칠 수 없어 지하에 조성한 것”이라 설명했다. 

지난 10일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 상설전시실 전경. 상설전시실에는 국보·보물 3건 11점을 포함한 3000여점의 전시품을 선보이고 있다. 

■무왕의 나무관 첫 복원공개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맨먼저 보이는 유물은 2009년 미륵사지 서석탑 사리공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내함이다. 높이 5.9㎝, 최대직경 2.6㎝에 불과한 유물이다. “전시장 입구에 왜 이토록 작은 유물을 놓았느냐”는 질문에 송현경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백제의 속살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려 했다”고 밝혔다.

“금제사리내함은 미륵사 서석탑의 가장 안쪽에서 출토된 작은 유물입니다. 확대경으로 봐야할만큼 작은 유물을 소개함으로써 백제유물을 관람하는 이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려는 것입니다.”

연면적 7500㎡, 전시실 면적 2100㎡의 규모인 박물관에는 미륵사지 출토품 2만3000여점을 비롯해 전북 서북부의 각종 유적에서 출토된 약 3만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국보·보물 3건 11점을 포함한 3000여점의 전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개관과 함께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들이 많다.

이중 1917년 발굴된 지 102년 만에 다시 공개되는 쌍릉 대왕릉의 나무관이 눈길을 끌었다. 쌍릉 대왕릉의 나무관은 대왕릉에서 직접 떼어 온 봉토의 토층 및 실제 크기의 돌방무덤과 함께 전시실 안에 설치됐다.

또 1965년 석탑 보수공사 중 발견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국립전주박물관), 익산 입점리 고분군 금동관모, 원수리 출토 순금제불상 등 다른 지역에서 보관·전시되던 자료들도 관람객을 맞이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의 공양품을 감쌌던 보자기로 추정되는 비단 직물과 금실도 눈에 띄었다. 또 제석사지 목탑이나 금당 안에 안치되었을 흙으로 빚은 승려상의 머리 등도 주목거리였다.

미륵사를 집중 소개하는 2실에서는 삼국시대 최대의 불교사원인 미륵사지의 역사와 설화, 토목과 건축, 생산과 경제, 예불과 강경 등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별도 전시공간으로 꾸며 관람의 집중도를 높였다.

지하로 조성된 국립익산박물관. 사적이라 층고 12m를 넘는 건물을 세울 수 없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주변경관을 해칠 수 없기에 지하로 조성했다. |국립익산박물관 제공  

■복원된 미륵사서탑의 위용

박물관 관람이 끝나면 밖으로 나와 용화산(해발 342m) 밑에 조성된 탁 트인 미륵사지(터)의 위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삼국유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부인(선화공주)와 함께…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부인이 ‘이곳에 큰 절을 지어달라’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고 기록했다.

이 <삼국유사>의 기록이 얼마나 딱 들어맞는지 지금도 미륵사터에는 3금당 3탑의 형태, 즉 ‘서탑(2019년 원형 복원·국보 제11호)+금당, 중앙탑(목탑 터만 남음)+금당, 동탑(1993년 모조탑으로 복원)+금당’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2009년 서탑에서 ‘서탑을 세운 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명문금판이 나와 한바탕 논쟁을 빚은 바 있다. 하지만 만약 무왕의 부인이 1명이 아니라면 어떨까. 

미륵사가 ‘3탑3금당’의 독특한 양식인 점을 감안하면 ‘서탑=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선화공주’, ‘동탑=또다른 무왕의 부인’일 수도 있기에 아직 선화공주 관련설화를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국내 최고(最古), 최대의 석탑답게 복원된 서탑의 위용은 대단하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의 형식이므로 석탑인데도 목탑의 공법을 따르고 있다. 나무를 쌓아 조성한 듯 석재를 켜켜이 쌓았다, 그러다보니 돌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6층 일부만 남았고, 1915년 일제가 붕괴를 막기 위해 콘크리트를 싸발라 놓았지만 그마저 무너져버릴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1998년 해체보수가 결정됐다. 그후 20여년간 연인원 12만명이 투입되어 185t의 콘크리트를 떼어내고 무게만 1830t(1627개)에 달하는 부재를 복원에 사용해서 겨우 완공했다.

박물관과 미륵사지를 방문했다면 지난해 4월 복원이 완료된 서석탑 앞에서 찍는 기념사진은 아마도 ‘인생사진’이 될 수도 있다. 이번에도 느끼는 바지만 1990년대초 모조품으로 복원된 동탑은 선입견 탓인지 여전히 꼴불견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익산대왕릉에서 출토된 무왕의 나무관(추정). 일본제 금송으로 만들었다

■쌍릉 가는길

박물관과 미륵사터를 방문한 뒤 무왕의 부부묘라는 쌍릉을 찾았다. 참 희한한 일이 있었다. 쌍릉을 방문한게 두번째인데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내비게이션이 요철이 심한 좁은 농로와 산길로 안내했다. 이상한 것은 내비게이션에 나오는 길은 넓직한 큰 길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첫번째도 그랬다. 왜 내비게이션이 쌍릉 가는 길을 이렇게 어려운 코스로 가르쳐주는 것일까. 무왕 부부가 조화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닿은 쌍릉의 대왕묘, 소왕묘 모두 바리캉으로 머리를 깎은 흔적처럼 발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난해까지 발굴결과 소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판가름낼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대왕릉의 주인공은 사실상 ‘무왕’으로 확정한 바 있다. 대왕묘에서 확인된 102개의 인골분석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즉 인골의 키가 161~170㎝, 나이는 50대 이상의 남성 노년층, 연대는 620~659년으로 추정됐으니 그 시대에 이만한 크기의 무덤을 조성한 이라면 무왕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정설이 된 것이다.

물론 소왕릉의 주인공은 여전히 미궁에 빠졌지만 선화공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0여년간 해체복원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4월 일반에 공개된 미륵사지서석탑.

■가짜뉴스 퍼뜨린 스토커

새삼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떠올리니 실소가 나온다.

즉 익산 출신인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 듣고 서라벌에 가서 시중에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서동하고 사귀어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동요를 퍼뜨리지 않았던가. 이 괴소문이 궁중까지 들리니 신라의 백관이 ‘이런 해괴한 일이 다있냐’고 상소문을 올려 공주가 귀양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길에 서동을 만나 정을 통해서 백제로 돌아와 혼인하고,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지 않았던가.

선화공주와 서동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었지만 요즘 같으면 어떤가. 서동은 가짜뉴스를 퍼뜨려서 선화공주를 해코지한 범죄자라는 지탄을 받을 수 있다. 선화공주는 그 가짜뉴스의 희생양이 된거고, 서동은 가짜뉴스를 퍼뜨린 ‘스토커’이고…. 게다가 쫓겨난 선화공주를 유혹해서 정까지 통했으니 전형적인 성범죄자가 아닌가.


■일본산 금송의 존재

각설하고 한가지 드는 합리적인 의심거리가 있다. 백제를 흔히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와 웅진백제(475~538), 사비백제(538~660) 등으로 구분하는데, 왜 ‘익산 백제’도 끼워줘야 한다는 여론이 이는 것일까. 왜냐면 무왕(재위 600~641년)때 익산 백제가 신(新)수도 구상에 따른 천도였거나 혹은 별도로 조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고고학 자료가 나왔기 때문이다.

우선 누누이 강조했지만 익산 금마면 반경 5㎞ 이내에 그걸 뒷받침할 만한 유적들이 집중돼 있다. 무왕 때 조성된 미륵사는 비록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삼국 최대의 가람을 갖추었던 곳이다. 또한 주변의 익산토성과 제석사지는 물론 무왕 부부묘로 전해지는 쌍릉 등 많은 백제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또 지명이 왕궁리(王宮里)라는 점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우선 익산쌍릉이 무왕부부 묘일 가능성은 1915년 도굴된 이 무덤이 일본인에 의해 조사됨으로써 제기됐다. 즉 무덤 내부 구조가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왕들의 무덤구조와 같고, 따라서 무덤은 왕릉급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즉 판석을 다듬어 만든 널길까지 갖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내부에는 목제 관을 안치했다.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내에 있던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훗날 무령왕릉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는데, 익산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고야마키(高野전·일본에서만 사는 침엽수)이다.

이렇게 쌍릉의 목관이 백제 왕실에서 행해진 장례전통(일본산 목재를 쓴 것)을 따랐다고 볼 때 왕릉급일 수밖에 없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사실 옛부터 왕궁리 유적은 고조선의 준왕이 해로를 따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 후백제 견훤 도읍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 왕족인 안승과 그 유민들을 위해 세운 보덕국(報德國)의 수도라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그러나 백제무왕의 별도(別都)이나 천도설을 능가할만한 견해는 없었다. 무왕의 천도·별도설과 관련, 또 하나 주목을 끈 건 왕궁리 5층 석탑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탑은 백제시대의 탑인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 5층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어떤 문헌에서도 무왕의 익산 천도 및 행정수도설은 나오지 않았던 게 약점이었다.

국립익산박물관 상설전시실 입구에 전시된 미륵사지석탑 출토 금제사리내호. 높이 5.9㎝에 불과한 황금유물이다.

■<관세음응험기>에 보이는 익산 천도기사

그러던 1970년 일본 교토대 교수인 마키타 다이료(牧田諦亮)가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찾아냈는데 여기에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존재했다.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 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백제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의 하나인 노산주(魯山州)에 속한 지모현(枳牟縣)의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그곳이 금마(金馬)라는 것이다. <관세음음험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포착된다. 제석정사가 재난을 당할 때의 피해사례를 언급하면서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1965년 왕궁리 석탑 해체수리 때 사리보(舍利寶)는 물론, 금판 금강반야바라밀경 19매가 발견됐다. 이는 <관세음응험기> 기록을 뒷받침해준다.


■천도설, 행정수도의 고고학 자료들

1989년부터 본격화한 고고학 발굴결과도 심상치 않았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설, 혹은 행궁설, 행정수도 경영설을 뒷받침할 만한 실마리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우선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에서 통일 말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탄소연대(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 결과 서기 535~630년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제 말기에서 통일 초기에 해당되는 유구는 석탑이 있는 지역의 성벽 유구와 부속된 많은 건물터가 해당된다.

출토된 백제토기와 기와류의 질은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같다. 또한 중국에서도 사례가 많지 않고,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확인되지 않은 연화판문청자병(蓮花瓣紋靑瓷甁) 조각과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또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일국의 군주 거소 및 중앙정부가 있는 도회·수도)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는 문헌에서 확인되는 행정지명을 실제적인 근거자료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백제의 행정제도는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인 <주서> 및 <수서> 등에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옛날에 오부를 두어 37군,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다(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七十六萬戶)”고 했다. 또 <주서> ‘이역전·백제조’는 “수도에 1만가가 있어 이를 나누어 5부를 만들었다. 오부는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이다.(都下有萬家 分爲五部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왕궁리에서는 <주서>에 등장하는 5부 중 후부(後部)를 제외한 4부의 명칭이 모두 발견됐다.

백제 무왕이 천도 혹은 행정수도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왕궁리 유적. 궁궐터는 물론 공방터와 인공수로, 후원까지 구비되어 있다. 

이 5부 명칭 인장와는 부소산성, 부소산 앞자락의 관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에서만 한정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사비시대(538~660년) 백제왕궁 위치는 부소산성이나 그 앞 평지가 유일무이한 후보지이다. ‘수부명’의 인장와는 바로 이 부소산성과 이곳 왕궁리에서만 확인되는 유물이라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왕궁리에서는 또 부소산성(사비성)에서 출토 예를 볼 수 있는 ‘귀달린 토기(耳杯)’가 출토됐다. 그 희귀성과 정교한 제작방식으로 보아 국가가 관장하는 가마에서 구운 이런 토기들을 부여를 비롯한 왕궁으로 공급하지는 않았을까. 특히 서북쪽 성벽 안쪽에서는 공방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조사됐고, 여기에서 다량의 도가니와 도가니에 부착된 금(金) 슬래그가 확인됐다. 이 유적의 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발굴 성과는 이곳 익산 금마 일대에 존재하고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이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혹은 행정수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국립익산박물관 상설전시실의 전시내역.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 이면

이쯤에서 또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왜 무왕은 선화공주와 국제결혼을 했고, 왜 익산으로 근거지를 옮기려 했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서울의 남쪽 못가에서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서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무왕이 용(龍)과 관계있으며, 고향이 익산이라는 걸 알려주는 기록이다. 만약 무왕이 익산천도 혹은 행정수도 건립을 결행했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왜 불구대천의 원수인 진평왕의 딸과 결혼했을까.

먼저 6~7세기의 정세를 살펴보자. 백제는 551년(성왕 29년) 한강 회복을 위해 신라 진흥왕과 연합, 고구려를 치고 한강유역을 양분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2년 뒤(553년)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 땅 6개군을 점령했다. 분노한 성왕(재위 523~554)은 신라를 치다가(554년) 살해된다. 백제로서는 과거 동맹이던 신라 진흥왕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백제는 전통의 주적(主敵)인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까지 원수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가 계속 괴롭히자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던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는다. 이것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 내막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백제 무왕은 즉위 전반기에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익산을 왕도로 삼았을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고 사비(부여)를 버린 것은 아니었고, 익산과 부여 사비성 등 2개의 도회(都會)를 모두 왕도로 썼을 수가 있다.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무왕은 백제 8대 성씨(沙·燕·協·解·眞·木·國·백)로 알려진 귀족들이 강력한 세력을 떨친 사비를 벗어나 자기 나름의 정치를 펼치려고 익산으로 천도할 꿈을 꾸었을 가능성이 짙다.

필자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왕궁리 터에 올랐다. 5층 석탑을 앞에 두고 약간 높은 지형에 자리잡은 왕궁터의 ‘뷰’가 끝내준다. 주변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기가 막힌 곳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터는 물론이고, 공방터와 신라 포석정과 같은 용도일 수도 있는 인공수로 등도 보이고, 후원시설도 드러나있다. 게다가 서북쪽에서는 대형 공중화장실터까지도 조성되어 있다. 필자는 왕궁리 터 정상에 서서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 중흥의 땅으로 삼으려 했던 무왕의 포부를 더듬어보았다.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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