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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세종-문종을 닮으려 했던 고종-순종 …왕세자 집무실 계조당 복원 이야기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1891년(고종 28년) 2월8일 고종은 경복궁 안에 계조당을 고쳐 지은 뜻을 밝혔다. 

“세종 계해년(1443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계조당을 세웠고, 문종이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

한마디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인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계조당을 고쳐 지은 것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주역>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은 왕위계승을 뜻한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바로 ‘슬기로운 왕위계승’을 위해 계조당을 만들어 세자(문종)에게 정사를 대신 돌보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세종의 후계자 양성법인 ‘대리청정’이다. 

1449년(세종 31년) 12월26일 왕세자  문종이 대리청정기에 문신 정식(1407~1467)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정식을 조봉대부(종4품)·의정부사인(정4품)·직보문각지제교(정4품)로 임명했다. |조미은의 ‘조선시대 왕세자 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14에서

■‘독이 든 성배’ 마시는법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했는데, 세종은 왜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게 됐을까. 왕조시대에 세자를 두고 흔히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국본(國本)’이라 했다.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 양성은 국본을 튼튼히 하는 과정이었다.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또하나 세종 스스로의 뼈저린 경험이 단초가 되었다. 세종은 원래 세자가 아니었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폐위되어(1418년 6월 3일) 졸지에 세자가 되고, 그리고 8월10일 태종의 선위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두 달 여 만에 대군에서 세자, 세자에서 군왕으로 발탁된 것이다. 하지만 군왕이라는 자리는 ‘독이 든 성배’라 할 수 있다. 잘하면 명군, 현군,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지만 삐끗하면 용군, 혼군, 폭군 소리를 듣고 쫓겨나거나 세세토록 손가락질 받는다.

대리청정기인 1449년(세종 31년) 9월3일 배임의 관직을 허락한 서경을 인증하는 문서이다. 배임은 병조의 인사권 발동 이후 대간의 적격여부 판단(서경)을 거친 뒤 세자 문종에 의해 최종 임명됐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웃는 낯을 띠었다’며 멸문지화 당한 외숙집안 

또 아무리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세종이라지만 예외없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 뻔하다. 예부터 군주의 정사를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군주가 하루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1만 가지나 된다고 해서 일컬어졌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세자~국왕이 된 세종은 아들인 세자(문종)에게만큼은 서서히 권력을 이양하는 방법을 찾았다. 준비된 후계자를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는 순간 그 명을 받들어야 할 세자나 신하들은 죽을 노릇이었다. 저 군주가 대체 무슨 마음을 품고 저런 명을 내리는가. 혹은 세자나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태종은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이며 세자와 신하들의 의중을 떠봤는데, 그 올가미에 세자(양녕대군)의 외숙인 민무구·무질 형제가 걸려들었다. 그 이유가 기막혔다. “임금이 선위의 뜻을 밝히자 민무구·무질 형제가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喜形于色)”(<태종실록> 1407년)는 것이었다. 민무구·무질 형제는 “신들의 얼굴빛은 우리도 모르겠는데 전하가 어찌 아시느냐”고 가슴을 쳤지만 부질없었다. 결국 태종의 정부인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 집안은 멸문의 화를 입었다. 

세종의 교지와 세자(문종)의 휘지에 찍은 ‘시명지보’(施命之寶·국왕의 도장·오른쪽 )와 ‘왕세자인’(오른쪽).|조미은의 논문에서

■도둑·사형수가 들끓은 세종 시대 

세종이 ‘대리청정’을 발설한 것은 재위 18~19년이 된 1436년 말~1437년 초였다. 그 이유는 “재위동안 해마다 수재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도적이 창궐 하는 등 이렇다 할만한 업적이 없었다”(<세종실록> 1437년 3월)는 것이었다. 만고의 성군께서 웬 겸손의 말씀일까 하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세종의 시대는 조선 건국 초였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아 인심이 흉흉했고, 범죄가 들끓었다. 비근한 예로 1439년(세종 21년) 12월 세종은 “복역 중인 사형수가 190명에 달하니 감형 좀 하면 어떠겠느냐”고 의정부에 하문했다. 세종은 이때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가 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고 반성했다.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의 황금술잔과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의 은찬(銀瓚·제기)까지도 털렸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 “온 백성이 들끓는 도둑들을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몰랐다”는 기사(<세종실록> 1435년)도 있다. 이런 판국에 분위기 쇄신책이 필요했고, 그 일환으로 세자의 대리청정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던 사도세자의 흔적. 사도세자는 15살의 나이인 1749년(영조 25년) 대리청정을 시작했다가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당했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과체중 당뇨병에 시달린 세종의 선택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세종의 건강이었다. 세종은 전형적인 ‘공부벌레’이자 ‘일벌레’였다. 책 한 권을 최소한 100번씩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뿐이 아니라 날마다 새벽 2~3시에 일어나 하루 평균 20시간씩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세종이 건강을 너무 챙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몸이 뚱뚱했다. 오죽하면 상왕 태종이 막 즉위한 아들(세종)에게 “주상은 몸이 비중한데 때때로 나와 놀면서 살 좀 빼야 한다”(<세종실록> ‘즉위년조·10월9일)고 권했을까. 게다가 육고기를 엄청 즐겼다. 때문에 태종은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는데…”라고 걱정하는 유언을 남겼다.(<세종실록> 1420년 8월)

이 지경이니 몸이 배겨날 리가 없었다. 

“하루에 한동이 이상 물을 마시는 병(당뇨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성병이 아니라 요로결석으로 추정)이 걸렸다. 그러니….”(<세종실록> 1438년 4월)

세종은 무엇보다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 앞의 사람마저 구별할 수 없으니 대리청정은 불가피하다”고 호소했다. 


■소통의 지도자인가

‘대리청정 하겠다’는 세종과 ‘아니되옵니다’라고 머리를 바닥에 짓찧고 버티는 신하들과의 다툼은 7년이나 이어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흔히들 세종을 ‘소통의 지도자’라 한다. 단적인 예로 세종은 일종의 소득세인 공법의 실시를 두고 전국의 세민(細民·가난한 백성)까지 17만명이 참여하는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1430년 3~8월) 그러나 세종이 마냥 ‘소통의 대마왕’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두고는 결코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때로는 치밀한 논리로 설득했고, 때로는 감정적인 언사로 숨돌릴 틈없이 몰아붙였다. 때로는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연출했다가 다시 더욱 더 센 카드를 내밀어 신료들을 ‘멘붕’에 빠뜨리면서 이전에 던진 카드는 기정사실로 만들어갔다. 이러한 ‘밀당 전술’은 황희·맹사성 등 70이 넘은 노구의 정승들까지 질리게 만들었다.

1759년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가 황해도 감사 정옥에게 내린 치제문이다. 1760년 사망한 정옥의 1주기를 맞아 내린 제문이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한글을 위한, 부인을 위한 독선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최만리(?~1445) 등과 논쟁을 벌이면서 언급한 표현을 보라.(1444년) 

“너희는 (이두를 만든) 설총은 옳다 하면서 내가 한 일(훈민정음 창제)은 그르다 하는 거야.” “저런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저속한 선비 같으니….” 세종은 글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창제한 훈민정음을 두고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기예일 뿐(不過新奇一藝耳)’이라고 폄훼한 이들의 주장을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창덕궁 중장 밖 문소전 옆에 불당을 짓는 문제를 두고도 세종의 ‘막말’이 반복됐다.(1448년·세종 30년)

“대소신료들이 떼지어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부덕한 임금이라 마음대로 한다” “정승 1000명이 나와 말해봐라. 그래도 난 굽히지 않는다.” “분명한 일은 임금 독단으로 한다.” 

이 역시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말본새이다. 유교국가에서 무슨 불당을 짓겠다고 저런 험한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고집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2년전(1446년) 승하한 부인(소헌왕후 심씨·1395~1446)을 추모하려 했다. 소헌왕후는 기구한 여인이다. 상왕(태종)이 뒤집어씌운 역적죄 때문에 친정아버지(심온·1375~1418)가 억울하게 죽어갔다. 이때(1418년) 세종이 임금이었지만 군권을 휘두르던 상왕(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다. 처가가 멸문의 지경으로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남편 세종으로서는 그런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 이에 세종은 석가의 일대기인 <석보상절>과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불당까지 만들어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을 추모하려고 했다. “임금 노릇 못해먹겠으니 선위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불당건립을 강행한 세종의 독단에는 부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녹아있다. 불당건립은 한 나라의 군주이기 전에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복원될 계조당. 계조당은 세종 연간에 왕세자(문종)의 대리청정 때 신하들을 조회하고 정사를 펼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고종도 왕세자인 순종을 염두에 두고 ‘세종과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면서 계조당을 재·개건축했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대리청정 7년의 논쟁

대리청정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이 1436년(세종 18년) 말부터 “인사권과 3품 이상의 형벌권, 군권 등 나라의 대사 외에 다른 정사를 세자에게 맡길 것”이라며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료들은 끈질기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버텼다. 

신료들은 ‘중국 주나라 문왕이 세자 시절 부왕(왕계)을 위해 ‘하루 세번 문안을 드리고(問寢) 수라를 돌보는 것(視膳)’에 불과했다”(<예기> ‘문왕세자’)는 ‘문침시선(問寢視膳)’의 고사를 인용했다. 세자는 ‘정사를 돌볼 필요가 없고, 그저 부왕만 잘 섬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사가 한 곳(임금)에서 나와야지 두 곳(임금과 세자)에서 나오면 혼란이 생기니 대리청정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지금의 전하(세종)와 세자(문종)라면 좋겠지만 후세에 부자지간에 틈이라도 생기면 어쩔거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세종은 ‘넋놓고 있다가 내가 갑자기 죽은 뒤에야 아무런 준비없이 세자가 왕위를 받는 꼴을 봐야겠냐’고 반박했다. ‘지척의 사람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세종으로선 절박했으리라. 영의정 황희 등은 “아직 긴급한 일은 없사오니(주상께서 승하할 일이 없사오니)이 그럴 필요는 없다”던가, “대리청정은 전하의 춘추가 높아지시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신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지속적으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세종은 집요했다. 한발 물러서는 듯 하다가 이내 더욱 더 강한 카드를 꺼냄으로써 이전의 카드를 기정사실화하는 ‘밀당전략’으로 한발한발 나아갔다. 1442년(세종 24년) 7월 “이제 그대들과 토론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명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면서 “세자궁에 대리청정을 담당할 관청(첨사원)까지 두라”고 지시했다. 신료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드는 승정원이 있는데, 세자의 명을 출납하게 될 첨사원까지 생긴다면 어찌되겠느냐”고 아우성쳤다. 명령이 두 군데서 나온다면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는 신료들의 우려였다. 

이때 신료들 중에는 “동궁이 서무에 참여하더라도 반드시 승정원에서 그 명을 출납해야 한다”(좌찬성 하연 및 좌참찬 황보인)는 논의가 일었다. 세종의 전략이 먹혔다. 세종이 ‘첨사원 설치’의 명을 내리자 기존 세자의 대리청정 이야기는 어느새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세종은 “첨사원 조직은 세자(문종)의 등극 이후에는 없어질 한시조직이 될 게 아니냐”는 신료들의 반대 릴레이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첨사원 조직은 후세의 젖먹이 어린애가 세자가 된 때라도 제대로 일할 수 있게 상설 설치하는 것이다.” 1회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은 후세에 어린나이가 세자가 된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상설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종은 첨사원 설치 외에도 한때(1439년) 꺼냈다가 포기한 세자의 ‘강무’ 주재건을 기어코 성사시켰다. 강무(講武)는 국왕의 친림아래 실시하는 수렵대회를 겸한 군사훈련이다. 대간은 물론 의정부와 육조 판서들까지 다 나서 “임금이 엄연히 계시는데 세자가 군통수권자가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면서 “군령은 두 곳에서 나올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세종은 “너희는 임금의 병이 깊어져 손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대리청정을 맡기겠느냐”고 윽박질러 기어코 성사시켰다. 

계조당의 배치도, 건물 자체는 남쪽을 향해 지었지만 세자는 대리청정 때 서쪽을 향해 앉아 대신들을 맞았다. 오로지 군주만이 남쪽을 향해 태양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대리청정 때  ‘세자의 남면’을 지시했지만 신료들은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세자는 계조당 안에서 서쪽을 향하는 ‘서면’으로 대신들을 맞는 것으로 결정됐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측우기의 발명가는 문종?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4월17일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는 교지(왕의 명령을 담은 공문서)를 내린다. 이때 세자가 신료들의 조회를 받으며 정사를 펼칠 정당(正堂·집무실)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계조당이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세자위에 오르고, 다시 두 달 여 만에 지존의 자리에 오른 세종은 세자(문종)을 ‘준비된 임금’으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신하들과 7년 논쟁 끝에 만든 제도가 바로 후계자 교육. ‘대리청정’이었다. 세자 문종은 29살 때인 1442년(세종 24년)부터 사실상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닮아 성군의 기질을 타고 난 문종에게 8년 여의 ‘후계자 실습’(대리청정)은 더욱 더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병약한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3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문종은 왕위에 오른지(1450년 2월) 불과 2년 3개월 후(1452년 5월) 39살의 춘추로 승하하고 만다. 비록 재위기간을 짧았지만 대리청정 기간까지 합한다면 문종의 치세는 사실상 10년 정도는 된다. 

왕세자 문종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다. 대리청정이 논의되던 1441년(세종 23년) 4월 <세종실록>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등장한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 올 때마다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다. 정확하게 푼수(얼마에 상당하는 정도)를 알 수 없어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이 기록 때문에 세종 시대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 발명가가 다름아닌 세자(문종)라는 설도 등장한다. 아닌게아니라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후기(候氣)에 정교하여, 우레가 어느 때에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뒤에 반드시 맞았다”고 기록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의 성군(세종)이 승하했지만 권력의 공백은 없었다. 모두 대리청정의 덕분이었다. 문종은 특히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하여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다. 하급관리들의 말까지도 경청함으로써 언로를 활짝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계조당의 발굴조사 모습. 계조당은 1443년 세종이 세자(문종)의 대리청정을 위해 만들었다가 단종 즉위년에 허물었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아직도 언로가 좁다고 여겨, 6품 이상의 조신에게는 모두 윤대를 허용하였다.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서 그들이 할 말을 다하게 하였다.”(<연려실기술>)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또한 2년 3개월의 짧은 치세 치고는 만만치않은 업적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성군 아버지인 세종의 후계자 이양 방안인 ‘8년여 대리청정’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고 세자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잇는 불행이 찾아왔다. 만약 문종이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년)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세종의 치세가 계승되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왕의 등극으로 쓸모가 없어진 계조당은 단종 즉위년(1452년)그만 헐리고 만다. 그래도 대리청정은 후대 왕세자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의 본보기로 활용됐다. 바로 경종과 영조, 장조(사도세자), 정조, 익종(효명세자) 등의 대리청정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측우기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1837년제 측우기. 문종이 세자시절 착안했다는 <세종실록> 기록이 남아있다.   

■계조당 복원의 의미

그로부터 400여 년이 훌쩍 지난 뒤 고종은 세종과 문종을 본보기로 삼으려고 계조당을 재·개건(1868년과 1891년)했다. 당시 17세가 된 세자(순종)를 바라보며 ‘나도 세종처럼 세자(순종)에게 대리청정 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사람도 시대도 달랐다. 세종-문종은 고종-순종이 ‘감히’ 넘볼 수 있는 군주가 아니다. 게다가 시대는 늙고 병들어간 500년 왕조의 황혼인 19세기말이었다. 이후 20년도 안되어 국권을 침탈당한 직후 계조당 역시 무참하게 훼철된다.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연다는 이유로 조선왕실의 권위를 지우고 식민통치 정당성을 선전하는 행사 공간으로 파괴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부터 준비된 후계자를 양성하려고 신료들과 7년간의 투쟁을 거쳐 건립한 세자(문종)의 공간(계조당)을 복원중이다. ‘슬기로운 임금’을 키우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노심초사, 동분서주가 눈 앞에 보이는 듯 삼삼하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문식, ‘세종의 국왕권 이양방안, 대리청정’, <문헌과해석> 31권 2005년 여름호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해석> 45권, 2008년 겨울호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 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2014

         ‘조선시대 왕세자 대리청정기 문서연구’, <고문서연구> 36권, 한국고문서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