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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지하물리탐사로 비운의 백제 성왕릉의 존재 특정할 수 있나

지하물리탐사로 비운의 백제 성왕의 무덤이 특정될 수 있을까. 

사비 백제의 도읍은 부여다. 천도(538년) 이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성왕(재위 523~554)과 위덕왕(554~598), 혜왕(598~599), 법왕(599~600), 무왕(600~641), 의자왕(641~660)까지 6명의 임금이 이곳에서 절정기의 백제 예술을 창조했다. 

지하물리탐사결과 각 고분이 현재의 복원 규모보다 5~10m 가량 넓은 규모였음이 확인됐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익산 쌍릉에 부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무왕 외에 4명의 임금이 묻힌 곳으로 추정됐다. 1757년(영조 33년) 제작된 전국읍지(<여지도지>)도 이곳을 ‘능산(陵山)’으로 표시할만큼 예부터 백제고분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7월과 9월 일본학자인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그리고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잇달아 발굴조사를 펼쳤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조사에 나섰던 일본학자들은 막상 발굴 후에는 정식보고서도 없이 간단한 설명과 사진 몇 장만 남기고 말았다. 

왜냐. 사비백제 시대에는 장례를 간단히 치르는 박장(薄葬)의 습속이 있기 때문에 부장품이 많지 않다. 게다가 백제 고분은 굴식돌방에 목관을 매납하는 형태(횡혈식석실분)이다. 돌과 흙을 쌓아 조성하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달리 도굴이 쉽다. 돌과 흙이 무너져 내리는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해 굴식돌방무덤은 무덤방만 열면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능산리고분 원경. 지금은 7기의 고분만이 복원되어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실제로 익산 쌍릉의 경우 “1329년(충숙왕 16년) 익산(금마군)의 무강왕 무덤을 도굴한 도적이 금을 많이 갖고 있다”는 <고려사> ‘열전·정방길’의 기록에서 보듯 고려시대부터 도굴의 화를 입었다. 심지어는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군이 고분을 파헤친 흔적도 보인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은 애써 능산리 고분을 발굴했지만 임나일본부를 증거할만한 유적도 아니고, 또한 유물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탓일까. 사비백제 임금들이 묻힌 능산리 고분군 보다는 고분군의 서쪽에 있는 능산리 사지(능사)에서 확인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석조사리감(국보 제 288호)이 훨씬 유명세를 탔다. 주연보다 조연이 더 각광을 받은 셈이다.

능산리 중앙고분군에는 중하총과 동하총 사이에 새로운 고분, 즉 8호분의 존재가 보고됐다. 하지만 지하물리탐사에서 이 8호분의 실체는 파악되지 않았다.

중앙과 동·서로 나뉘어진 능산리 고분군으로 적어도 20기의 왕 및 왕족 무덤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중 복원 정비된 것은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하총’ 등 중앙 7기의 무덤이다. 1970년대에 존재를 확인했다는 중앙 8호분은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해 복원에서 빠져 있다. 

중앙 고분군 중에서도 ‘중하총’은 사비백제 시대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고분으로 판단된다. 학계에서는 ‘중하층’을 일반적으로 무령왕릉의 무덤형식인 아치형을 따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무령왕(재위 501~523)의 아들인 성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관이 놓인 자리가 두 개여서 부부묘로 추정되기도 한다. 

1915년 능산리 중상총에서 출토된 금동투조금구. 금동으로 뚫어 조각한 쇠장식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려있다.|이병호의 ‘일제강점기 백제 고지에 대한 고적조사사업’, <한국고대사연구> 61집, 한국고대사학회, 2011에서

성왕이 누구인가. 538년 쪼그라든 국세를 만회하려고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국호도 부여족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남부여’로 고쳐 재기의 칼을 갈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성왕의 꿈은 무참히 깨졌다. 553년(성왕 31년) 신라 진흥왕(540~576)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점령한 것이다. 성왕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554년(성왕 32년) 7월 성왕은 태자 여창(위덕왕)이 이끄는 선발대와 함께 관산성(옥천)을 친다. 그러나 백제는 이 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참패를 당한다. 좌평 4명과 군사 2만9600명을 잃는다. 성왕 역시 보병 50명의 호위를 받고 야간 행군하던 도중에 신라의 복병을 만나 목이 잘리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일본서기>는 “신라는 성왕의 목을 군신회의를 하던 관청(도당·都堂)에 묻었다”고 썼다. 백제로서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만약 능산리 고분군 중 중앙고분군의 ‘중하총’이 성왕릉이 맞다면 중흥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비명횡사한 백제왕의 비운을 간직한 무덤이 되는 것이다. 성왕이 죽자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태자(창·昌)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 이가 위덕왕(재위 554~598년)이다. 위덕왕(재위 554~598)의 무덤은 능산리 고분군의 ‘동하총’ 혹은 ‘동삼총’으로 추정된다. 

능산리 중앙고분군에사 확인된 석실과 출토유물. |서현주의 ‘백제사비기 왕릉발굴의 새로운 성과와 역사적 해석’, <한국고대사연구> 88집, 한국고대사학회, 2017에서

비슷한 시기에 죽은 혜왕(598~599)과 법왕(599~600)은 ‘서하총’, ‘서상총’, ‘중상총’ 등에 왕비와 함께 묻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뒤늦게 확인된 8호분은 ‘동하총’과의 관계로 보아 577년 죽은 위덕왕의 아들(왕자) 무덤일 수 있다. 또한 동쪽과 서쪽의 고분군은 각각 성왕(동쪽)과 위덕왕(서쪽)에서 갈라져 나온 왕족의 무덤군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모든 것은 추정일 뿐이다.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미래전략담당관은 “여전히 사비기 백제를 다스린 임금 중 4명과 그 왕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전체 능산리 고분의 성격은 지금도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산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4년부터 6년동안 지하물리탐사를 통해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왕릉의 배치와 규모를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지하물리탐사는 전기나 진동 등을 사용해서 땅의 물리적 성질 변화를 측정해서 지하구조물이나 매장문화재의 분포를 판단하는 고고과학 기술의 일종이다. 장한길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탐사결과 왕릉의 배치는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각각 두 기씩 모여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면서 “이로 미루어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함께 조성되었거나 가족단위로 무덤이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그러나 1970년대 확인된 것으로 알려진 8호분은 이번 탐사에서 드러나지는 않았다. 장한길로 학예사는 “탐사 결과 붉은 색으로 표시된 것이 8호분의 흔적인지 아직 알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탐사결과 각 봉분의 외곽에서 호석(護石·무덤의 봉분 외곽에 두르는 돌로 고분의 경계를 나타내고 봉토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시설물)으로 판단되는 이상체 반응도 확인했다.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이를 통해 왕릉의 봉분은 현재의 복원 정비 규모(지름 20m)보다 훨씬 크게(25~30m) 조성된 것으로 파악했다”고 전했다. 1966년 제대로 된 발굴조사나 연구검토 없이 복원 정비했던 과거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올 하반기에 동하총 내부 관대와 중앙고분군의 전체 시굴 조사도 펼칠 계획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