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조선 최초의 흡연자…어전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다

 “남초(南草·담배)는 남쪽 오랑캐 나라에서 유래해서 일본에서 번성했다. 무오 연간(1618년)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장유가 가장 먼저 피웠다.”(<대동기년>,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우리나라 담배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계곡 장유(張維·1587~1638)이다. 장유가 누구인가. 그의 선조는 1275년 충렬왕비인 원나라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한 위구르족 출신인 장순룡이었다.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됐는데, 12대 손인 장유는 조선 중엽의 4대 문장가(이정구·신흠·이식·장유)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그 장유가 담배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우선 <대동기년>이 언급하고 있듯 장유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윤복의 '청금상련'. 사대부가 기생과 의녀를 연꽃감상을 하며 놀고 있다. 사대부는 물론 의녀까지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폐를 상하게 하는 풀인데…’
 그는 <계곡만필>에서 조선에서 담배가 전래되고 퍼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남령초(담배)는 20년 전 조선에 들어왔다. 위로는 고관대작들과 아래로는 가마꾼과 초동목수들까지 피우지 않은 자가 백 사람, 아니 천 사람 가운데 겨우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 <본초강목>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효능은 알 수 없다. 다만 담배맛을 보니 매우면서도 독기가 있다. 많이 들이마시면 어지럼증이 생기지만 오래 피운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장유는 덧붙여 절강성 출신인 중국사람 주좌(朱佐)와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담배는 적비(赤鼻·코가 붉은 증세)를 치료하는데 특효라고 합니다.”(주좌)
 “담배는 성질이 건조하고 열이 있어서 필시 폐(肺)를 상하게 할 것인데…. 어떻게 코 병을 치료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장유)
 “꽉 막힌 기운을 뚫어서 풀어주기 때문입니다.”(주좌)
 장유는 이 대목에서 “주좌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계곡만필> 제1권 ‘남령초 흡연’)
 이 일화를 보면 장유 역시 담배가 ‘폐를 상하게 할 수 있는 풀’이라는 점을 벌써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담배를 워낙 사랑한 장유는 주좌의 ‘막힌 기운을 뚫어준다’는 말에 동조하고 있다. 그는 이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골초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 최초의 애연가가 된 장유의 담배를 둘러싼 ‘무용담’은 끝이 없었다.  

김홍도의 ‘주막집’. 담배예절이 있을 턱이 없었던 초창기에는 어전에서도 담뱃대를 빨기도 했다. 주막집에서 어린아이와 부녀자가 있는 데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떠거머리 청년워도 하나도 이상하렉 없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담배를 위한 변명
 먼저 그가 말년에 병이 들어 김제에서 요양할 때 흥에 겨워 읊었다는 시(‘남령초·담배)’를 보면….
 “가느다란 줄기 하나 성긴 꽃 무성한 입(疎花농葉擢纖莖)/~ 누가 이 담배를 동방에 전했을꼬.(誰遣孤根來日域)/~구절초처럼 기이한 향기 물씬 풍기는구나.(九節何奇漫自馨)/약효 제대로 내려면 불기에 바싹 말려야지.(功用會須煩火候)/한 번만 써 보면 신약(神藥)인 줄 당장 알리라.(藥欄眞覺有神靈)”(<계곡집>)
 장유는 담배를 신령한 약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뿐이랴. 장유는 <계곡만필>에서 ‘담배의 효능을 칭송하는(稱頌南草之效能)’ 글을 남겼다.
 “남방인들은 빈랑(檳랑)을 중요하게 여겨 ‘술에 취하면 깨게 하고 술이 깨면 취하게 하며 배고프면 배부르게 하고 배부르면 배고프게 한다’고 했다. 지금 애연가들도 담배를 피우면서 비슷하게 말한다. ‘배고플 땐 배부르게 하고 배부를 땐 배고프게 하며, 추울 땐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땐 서늘하게 한다’고…. 남초를 극찬한 말이 빈랑의 경우와 흡사히니 이 또한 웃을 만 하다.”
 장유가 언급한 ‘빈랑’은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인들이 식사 후에 즐겨 씹던 야자 비슷한 나무열매이다. 소화제와 구충제 등 한약재로 사랑받았다.
 장유는 ‘담배 피우기’를 ‘빈랑 씹기’에 견주면서 ‘담배는 빈랑과 똑같은 기호품이자 약제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담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世之攻南草者)들을 겨냥한 발언을 쏟아낸다.(<계곡만필>)
 “세상에서는 담배가 만이(蠻夷·오랑캐)에서 나왔고, <본초> 같은 의서에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담배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초> 같은 의서에 등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담배가 사람에게 이익을 줄 것인지는 나 자신(장유)도 모른다. 그러나 효능이 분명 있다면 굳이 어디에서 들여왔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본초>는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에 찬집된 의서이니, 아직 도입되지도 않은 담배가 등재될 리는 만무했던 것이기는 하다.
 여하간 장유의 ‘담배를 위한 변명’은 지독하다. 

유숙의 ‘수계도권’(개인소장). 1853년 작이다. 시회에 참석한 인물들이 모여 앉아있다. 그 가운데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인물들이 보인다. 당대에는 4~5살이 되면 모두 담배를 피운다고 할만큼 대유행했다.

 ■담배 짝사랑
 장유의 담배 짝사랑을 둘러싼, 그야말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에 살이 왕창 붙인 그런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설로 전해진 것이다. 예컨대 몇가지 문헌을 살펴보자.
 “담파고(담배)는 광해군 때 들어왔는데. 장유가 흡입하기를 가장 즐겼다. 그의 장인 김상용이 임금에 건의해서 ‘요망한 풀’을 금하도록 청했다.”(<임하필기> ‘문헌지장편·담파고’)
 “일찍이 사위(장유)가 연석(筵席·임금과 신하가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장인(김상용)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여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조)
 탑전(榻前·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위를 꾸짖었으니 ‘탑전 힐난(榻前詰難)’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사위(장유)와 장인(김상용)의 일화는 구전설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즉 장유가 담배를 피울 무렵엔 당연히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장유는 ‘감히’ 어전(임금의 면전)에서 담뱃대를 빡빡 빨았다는 것. 이 꼴을 보다못한 장인이 핀잔을 주었다는 것.
 “사부빈객(세자의 스승)인 자네가 어찌 어전에서 남초(담배)를 피우시는가.” 
 장인의 꾸지람을 들은 장유가 재빨리 담배를 끄지 김상용이 더 쏘아붙였단다.
 “구용정(口容正)하게.”
 담뱃대를 빨 때 입모양을 비죽대며 빡빡 소리를 내니 입모양(口容)을 바르게(正) 하라는 꾸지람이었다.
 하기야 초창기에 담배예절이 있을 수 없었던게 당연하다. 예를 들어 임금이 궁중에 숙직하던 문관들이 모여 멋대로 흡연하는 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단다.
 “구불미(口不美·입 모양이 아름답지 않다는 뜻) 하구나!”
 임금 앞에서 담배연기를 피우는 것도 불손한 일이거니와, 거기에 장죽(긴 담뱃대)를 뻗치고 ‘체신없이’ 입모양을 빡빡 거리니 ‘구불미하니 구용정하게’라는 말이 나오는게 당연했으리라.
 이후 궁중에서 담배예절이 생겼다는 것이다. 

윤복의 ‘연소답청’.  양반집 체면에 기생들의 포로가 되어 담배를 붙여 대령하는 딱한 사내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구불미네, 구용정하게"
 그럼에도 장유는 훗날 ‘애연가의 상징’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단적으로 정조 임금을 보라. 정조 임금은 담배를 ‘치국의 도’로 삼아야 하고.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끔찍한 애연가있다.
 그런 그가 흡연과 담배재배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담배를 피우고 재배하는 일은 마치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것 같다. 이해가 상반되므로 가볍게 논할 수 없다. 신풍군 장공(장유)의 말이 근거로 삼을만 하다.”(<홍재전서> 46권 ‘비답’)
 정조 임금은 “담배가 가래를 없애주고 술기운을 깨게 하며. 100년 후에는 차(茶)를 마시고 재배하는 것과 이익을 다툰다”며 담배예찬론을 설파한 장유를 굳이 떠올리고 있다.
 정조는 담배예찬론을 펼치면서 또 장유를 인용하고 있다.(<홍재전서> 권 178 ‘일득록’)
 “담배는 더위를 씻어주고 기(氣)를 평안히 하며 추위를 막아주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변을 볼 때 악취를 쫓아낸다. 잠을 청할 때나 시를 짓고 문장을 엮을 때 피워도 좋다.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 옛 사람으로는 오로지 장유 만이 이런 담배맛을 조금 알았다.”
 담배의 장점을 있는 대로 나열하면서 옛 사람 가운데 장유만이 담배의 참맛을 알 수 있는 인물로 인정한 것이다.

 

 ■애연가 사위와 혐연가 장인
 그런 사위(장유)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렇게 꼴보기 싫어했던 장인(김상용)이 훗날 담배불 때문에 자폭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지독한 혐연가인 김상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청나라군의 진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김상용은 원임대신(퇴직한 대신)으로서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적병이 곧 강화도를 함락시키려 했다.(1637년 1월 22일)
 김상용은 “구차하게 사느니 죽음을 택한다”고 하면서 남문의 문루에 나가 화약상자에 걸터 앉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가서 불을 가져오너라.”
 명령을 받은 시종은 공(김상용)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았기에 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상용은 끝내 불을 재촉해서 가져와서는 폭약상자에 붙이고 말았다.
 김상용의 13살짜리 손자와, 그를 따르던 측근들, 그리고 시종까지 모두 피하지 않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강화도 함락’)
 그런데 이 김상용의 ‘순절(殉節)’은 훗날 무수한 억측을 낳았던 것 같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다 담뱃불을 실수로 떨어뜨려 폭사한 것이 아니냐는 뒷담화가 퍼졌던 것이다.
 인조 임금도 그 소문을 듣고 ‘혹’ 했던 모양이다. 8개월 뒤인 1637년 10월 28일 예조가 김상용의 순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김상용을 위한 제문을 바쳤다.
 수찬 조중려가 바친 제문은 “(김상용이)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고, 홍모(鴻毛·깃털)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 임금은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는 쪽지를 붙여 내렸다. 반려한 것이다. 제문을 지은 조중려가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떨어뜨려 살신성인을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진실을 가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윤복의 ‘소년전홍’. 장죽을 문 앳된 청년이 여인의 팔을 붙들며 유혹하고 있다.|간송미술관 소장

 ■장유가 환생한다면
 그러자 김상용의 순절을 주장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특히 김상용의 아들인 김광환·광현 형제가 올린 피눈물 나는 상소가 심금을 울린다.
 “신의 아비는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신의 아비가 어전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위 장유를 면전에서 질책했지 않았습니까. 이는 성상의 총명한 기억 속에서도 있지 않습니까. 신의 아비가 어찌 죽을 때에 평생에 싫어하던 담배를 피웠겠습니까.”
 김광환·광현 형제는 그러면서 “평소 피웠다 해도 죽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화약 옆에서 불을 잡고 담배를 피웠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인조는 “김상용의 일은 워낙 목격한 사람들이 많아 과인이 의심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 해명했다. 그리고는 “담당부서에게 진상을 파악해서 결론을 내릴 것”이라 전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일)
 급기야 인조는 한달 반 뒤인 12월 8일 “김상용은 의리를 택해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인조실록>)
 자칫했으면 담뱃불 실화로 인한 어이없는 폭사로 손가락질 받을 뻔했던 순절의 명예회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담배는 <인조실록>의 표현처럼 ‘요망한 풀’, 즉 요초(妖草)였던 것은 맞다.
 신대륙에서 유럽에 들어온 지(16세기 초) 불과 100년 만에, 유럽에서 본격 재배된 지(1560년 무렵) 60년 만에 조선 전역에 퍼졌으니 말이다.
 “담배는 1616~17년 사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5년 만인 1621~22년 사이 조선 전역에 퍼졌다. 손님을 대하면 차와 술 대신 담배를 권할 정도였다. 유해무익한 물건임을 알고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 했다.”(<인조실록>) 1638년 8월 4일조)
 지금 이 순간 최초의 흡연자인 장유가 환생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어전에서 담배를 꼬나물던 그가 저 우중충한 건물 뒷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치 죄를 진듯 담배를 빨고 있는 애연가 후예들을 만난다면….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문일평, <호암사론사화선집>, 정해렴 편역, 현대실학사, 1996
 박희진, <흡연예절의 형성과정 1600~1930>, ‘역사민속학’ 제44호, 민속원, 2014
 제홍규, <한국연초사화>, 도서과 연구보고서, 국립중앙도서관, 1975 

   이언 게이틀리, <담배아 문명>, 정성묵·이종찬 옮김, 몸과 마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