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봉양하는 연회를 베풀면 어떻겠사옵니까.”
1771년(영조 47년) 20살이 된 세손(훗날 정조)이 임금(영조)에게 ‘노인봉양잔치’를 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영조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상소문의 내용보다는 먼저 “세손의 글씨가 어떠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자 이번에는 “문체가 어떠냐”고 하문했다. 대신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자 그제서야 “세손의 뜻대로 양로잔치를 베풀라”고 했다. 영조의 다음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세가지 기쁜 일이 있다. 세손이 양로연을 청한 것이 하나이고, 글을 잘 지은 것이 하나이며, 글씨를 잘 쓴 것이 하나이다.”(<영조실록>)
영조는 훌륭한 왕재로 성장한 세손(정조)의 글씨를 특별히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펼쳐 새로운 현충사 본전을 만든 뒤 자신이 직접 써서 내걸도록 한 ‘현충사 현판(위)’. 1707년 숙종이 현충사를 위해 하사한 ‘현충사’ 현판(아래)은 옛 현충사 본전에 걸리는 신세가 됐다. 당대 최고의 명필인 숙종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힘찬 필치가 돋보인다.

■“글씨 참 잘 썼다”고 칭찬받은 정조
그럴만 했다. 당나라 고종 때인 669년부터 시행해온 인재선발의 기준이 무엇인가. 바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풍후하고 큰 신체(身)와 바르고 분명한 말(言), 굳세고 아름다운 글씨(書)와 뛰어난 판단력(判) 등 4가지 기준으로 인재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신당서>)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은 ‘서·판’이었고, 이 서·판 시험이 끝나야 비로소 신·언 전형으로 넘어갔다.
똘똘한 신하를 뽑는데도 이렇게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는데, 하물며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는 어떤 인물이어야 했겠는가.
왕조시대 군주는 땅에서는 민심을, 하늘에서는 천심을 꿰뚫는 완전무결한 지존이 되어야 했다. 군주가 될 이는 3살부터 왕재(王才)가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용모나 몸집은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글씨(서)와 말(언), 판단력(판)은 어렸을 때부터 키워야 했다.
이중 서예는 임금 될 자가 반드시 배워야 할 기본과목이었다.
국왕은 그 시기에 가장 뛰어난 서예가 중 한사람이 되었고, 또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지존의 자리에 있는 국왕의 글씨가 ‘고양이 발이나 개의 발’을 일컫는 괴발개발이라면 어떨까.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성역화한 현충사의 중심축선에서 밀린 옛 현충사 본전.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한 놓치기 쉽다. 

 

■한결같이 명필이었던 조선 임금들
아닌게 아니라 코흘리개 세자 시절부터 서예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명필이었다.
조선 전기의 임금들은 주로 송설체를 즐겼다. 원나라 서예가인 조맹부(1254~1322)의 서재 이름(송설재)을 딴 송설체는 법도와 품격, 힘이 있는 글씨체다.
세종의 왕자인 문종(재위 1450~1452)과 세조(재위 1455~1468) 등은 대표적인 송설체 서예가들이다. 문종의 경우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오묘한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김안로)가 있다. “문종의 편지나 글씨를 얻는 사람은 마치 천금처럼 귀하기 여겼다”(김안로의 <희락당고>)는 것이다.
세조는 근엄하고 힘찬 필치를 자랑했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재위 1469~1494)은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김안로(1481~1537)는 성종의 글씨를 두고 “아리땁고 단중하여 조용히 조맹부의 법도를 따랐다”고 평했다.

1966년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 끝에 새로 마련한 현충사 본전. 콘크리트 구조물에 한옥을 얹혔다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暗君)’이라는 악평을 듣는 선조(재위 1567~1608)는 서예에서 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명필인 석봉 한호(1543~1605)를 발탁했으며, 한호의 글씨체인 석봉체로 <해서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 서당에 보급시켰다. 조선의 어린이가 일제히 석봉체로 천자문을 배웠다는 것은 파천황의 사건이었다. 선조의 글씨도 명필이었다. 한호의 글씨처럼 강한 필치로 대담하게 휘두른 붓 맛이 일품이었다. 이같은 선조의 서풍은 후대의 임금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조(재위 1623~1649)와 효종(재위 1649~1659), 현종(재위 1660~1674)의 글씨가 그랬다. 근엄한 분위기의 강한 필치가 선조와 일맥상통했다.
그러나 숙종(재위 1674~1720)이 즉위하면서 다시 강건했던 필치가 부드럽게 변한다. 특히 숙종은 꺾는 부분을 각 지게 쓴 선대 임금들과 달리 모서리를 유연하게 돌려 꺾어 썼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재위 1724~1776)은 부왕보다 더 유연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큰 화려한 ‘조선풍 송설체’를 표현했다.
할아버지 영조에게서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던 정조(재위 1776~1800)는 굵고 시원한 필치로 당당한 인상의 글씨를 썼다. 멀리는 선조부터 가까이는 할아버지 영조의 서풍을 이어받아 자신의 글씨로 연마한 것이다. 순조(재위·1800~1834) 역시 아버지(정조)의 글씨를 본받은 명필이었다. 순조가 5살 때(1795년) 쓴 글씨 ‘구오복 팔천세(九五福八千歲·복을 누리며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어떤 명필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큰 붓으로 시원하게 쓴 대담한 필획이 돋보인다.
서예에 안목이 없는 필자 같은 비전문가가 봐도 조선 국왕의 글씨, 즉 어필(御筆)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만큼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충사의 위치도. 숙종의 현판이 걸린 옛 현충사는 충무문-홍살문-현충사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다.

 

■‘글씨는 천한 기예입니다.’
그런데 각 문헌을 살펴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군신을 막론하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린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다.
예컨대 강희안(1417~1464)은 안견·최경과 함께 시와 그림, 글씨에 뛰어난 ‘3절(絶)’로 통했다.
두어 살 때부터 담장과 바람벽에 손가는대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는데, 법도에 꼭 맞았다. 전서 뿐 아니라 예·해·초서를 막론하고 통달했다. 그림의 신묘함은 당대 최고였다. 그러나 강희안의 작품들은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이 강희안의 서화를 구하러 오면 단칼에 거절했으니까….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賤技)입니다. 이것이 후세에 전해진다면 내 이름만 욕되게 할 뿐입니다.”(<해동잡록>)
조선시대이니 그림은 또 그렇다치지만 강희안은 글씨, 즉 서예마저도 왜 ‘천한 재주’라고 스스로 폄하했을까.

 

1931년 6월  26일 동아일보. 현충사가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유적보전회가 결성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2만여명이 1만6000원을 모았다. 신문은 성금을 보내온 사람들의 명단과 사연을 소개했다.

■‘작문은 배우, 서예는 시간낭비’ 
이 대목에서 강희안과 같은 조선의 문인학자가 즐겨 인용한 도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북송의 정이(1033~1107)다. 
정이는 아예 작문, 즉 글을 짓는 행위마저 도를 닦는데 해가 될 뿐이라는 ‘작문해도설(作文害道說)’을 개진했다. 정이는 <서경>의 ‘완물상지(玩物喪志)’ 성어를 인용하면서 “글 짓는 자들은 오로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俳優)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완물상지는 “어떤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면 본래의 뜻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서예는 더 폄훼했다. 정이는 “서예에만 매달리면 그것은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라 했다.

정이는 작문을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의 재주’, 서예를 ‘시간낭비’라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강희안이 넘치는 천부적인 끼를 감추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천한 기예를 후대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부끄러워한 이유였다.

 

■면박 당한 임금들…. “글씨 잘 쓰는 거 자랑하면 안됩니다”
강희안이 그랬을진대 임금이라면 어땠겠는가. ‘완물상지’는 후대의 모든 군주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해야 할 금과옥조가 됐다.
왕조시대 신하들은 군주가 혹여 쓸데없는 분야에 빠져 정사에 돌보지 않을까 끊임없이 ‘완물상지 하지마라’고 다그쳤다.

1932년 6월7일 동아일보 화보. 조선 백성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현충사를 중건하고 이순신 장군의 영정 봉안식을 열었다. 그 소식을 전면화보로 소개했다. 

 

특히 서예는 ‘시간낭비’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대표적인 ‘완물상지’의 분야였다. 자고로 군주가 서예솜씨를 자랑하면 ‘못난 임금’ 소리를 들었다.
예컨대 1405년(태종 5년) 세자(양녕대군)가 스승(성석린)에게 자기가 쓴 글씨 40여자를 보여주자 성석린은 “매우 잘 쓴 글씨”라며 ‘엄지척’ 했다.
그러자 세자가 의기양양해서 “예전의 국왕 중에는 누가 글씨를 잘 썼느냐”고 되물었다. 성석린은 “당 태종과 송 휘종이 잘 썼다”고 하면서도 핀잔을 준다.
“그러나 당태종은 참덕(慙德)이 있고, 송 휘종은 천하를 잃었습니다. 서찰(書札)은 군왕이 그렇게 중하게 여길 바는 못됩니다.”
이 무슨 말인가. 당 태종(재위 626~649)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만고의 성군이다. 그러나 맏형(건성)과 동생(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은 옥의 티다. 역사는 그 일을 ‘당태종의 참덕(잘못)’이라 한다.

역시 시문과 서예, 그림에 뛰어났던 송 휘종(재위 1100~1125)은 풍류천자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반격에 사직을 잃는 치욕을 당한 망국의 군주였다. 성석린은 서예와 그림 같은 잡기에 능하다고 다 옳은 군주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석린에게 한 수 배운 양녕대군은 훗날 조카인 세조 임금에게 똑같이 가르쳐주었다.
즉 1459년 세조가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또한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자 양녕대군이 면전에서 면박을 준다.
“군주가 비록 몇사람을 당해 낼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제 자랑을 해서는 안됩니다.”
지존인 임금이 자랑 좀 했기로서니 아무리 큰아버지지만 그렇게 돌직구를 날리다니….(<세조실록>)

조선 임금들은 3살 때부터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순조가 5살 때 썼다는 ‘구오복 팔천세’ 글씨  

 

■‘그래도 서화솜씨는 내가 제일 잘나가!’ 자랑한 성종 
성종처럼 ‘완물상지 하지 말라’는 신하들의 집요한 지적질에 몸서리를 친 임금은 없을 것이다.
성종에게는 두가지 취미가 있었다. 활쏘기와 서화였다.
특히 서화는 성종 스스로 ‘내가 제일 잘 나가!’라며 자화자찬한 취미활동이었다. 대사헌 이세좌는 성종의 서예와 그림솜씨를 이렇게 표현했다.
“전하가 글씨를 쓰면 저절로 난새(鸞·전설상의 새)가 놀라고 봉황이 되돌아옵니다. 전하의 그림솜씨는 대자연의 이치와 그 신묘함을 견줄 수 있습니다.”(<성종실록>)
성종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1484년(성종 15년) 성종은 “(막 창건한) 창경궁 내간(內間·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의 전각 현판은 과인이 직접 쓰고 싶은데 괜찮냐”고 물었다. 원래 궁궐의 전각이나 문의 현판은 임금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임명한 서사관이 써야 했다.
그렇지만 글씨에 자신이 있던 성종은 “그래도 내간의 현판 정도는 내 글씨를 걸어도 좋지않느냐”고 운을 뗀 것이다.
상당수 신하들은 “만세에 전하는 현판글씨인데 (명필인) 어필(임금의 글씨) 현판이라면 더 좋지않겠느냐”고 반색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신료들은 “어필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이 실록기사를 쓴 사관은 “몇몇 신하들은 임금이 친히 하찮은 일, 즉 현판 글씨를 쓰도록 권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기예를 좋아하는 임금의 뜻에 부응했다”고 꼬집었다.(<성종실록>)

 

■“글씨 자랑은 임금이 할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종 임금의 그림과 글씨가 시중에 떠돌았다는 것이 당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 시중에는 어찰(임금의 편지)를 얻어 한껏 치장해서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세좌는 “임금이 고작 문장의 수식에 정신이 팔리고, 서예와 그림 같은 서생의 하찮은 기예를 자랑하니 이게 될 말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전하께서는 재능과 기예가 많다는 사실을 제발 감추고 비밀로 하십시요.”
서예와 그림은 지존인 임금이 자랑해야 할 재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종은 손사래를 친다.

 

선조의 어필. 선조는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되지만 석봉 한호를 발탁해서 천자문을 보급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선조 본인도 명필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본래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런데 대체 경들은 어디서 보았다는 거냐”고 되묻는다. 이세좌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필 서화는 신(이세좌) 등이 신승선·윤은로·윤여림의 집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성종을 다그친다.
이세좌는 “예부터 임금이 뭐든지 지나치게 좋아하면 성덕에 누가 된다’고 했다”고 성종 임금을 추궁했다. 성종은 그제서야 구구절절 번명을 늘어놓는다.
“실은 서화를 영돈녕(종친부의 일을 관장한 종1품 벼슬)에게만 내려주었을 뿐인데, 아마 여기서 유출되었을 것이다. 또 내가 서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히 했을 뿐이다.”(<성종실록>)

문종의 글씨.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오묘한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얻었다. 문종의 편지나 글씨를 얻는 사람은 마치 천금처럼 귀하기 여겼다고 한다.

 

■‘완물상지’의 경각심
그러나 성종의 글씨와 그림은 시중에 널리 퍼졌던 것은 사실이다.
중종~인종 때의 권세가인 김안로는 “성종이 틈나면 대략 붓을 휘둘러 글씨를 썼는데, 이 크고 작은 필적이 민간에 널리 퍼졌다”고 증언했다.
“성종의 필적을 얻은 이는 그것을 완상하고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해두었다. 큰 구슬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희락당고>)
군왕이 이렇게 서예에 관심을 두면 ‘잡기말예(雜技末藝)’니, ‘완물상지(玩物喪志)’니 하면서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것이 조선시대였다.
이유는 앞서 밝혔듯 분명했다. 군주가 서예와 같은 한가지 일에 집착하면 정사에 소홀할까 걱정한 것이다. 신하들은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거나 자랑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군주를 사정없이 다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 아닌가. 제 아무리 겸손해야 할 군주라지만 넘치는 재능과 끼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신권보다 왕권이 강화되는 조선 후기들어 분위기는 다소 바뀐다.

임금이 승하한 뒤 선왕을 추숭하는 여러 조치가 취해진다. 선왕이 남겨놓은 어제(御製·임금이 남긴 시가와 문장)와 어필(임금의 글씨), 어화(임금의 그림)를 수집·정리해서 전각에 봉안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선왕의 위업을 기리며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어느 때든 ‘완물상지’의 경각심만큼은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 바로 조선시대였다.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김안로는 성종의 글씨를 두고 “아리땁고 단중하여 조용히 조맹부의 법도를 따랐다”고 평했다.

 

■현충사를 둘러싼 논쟁 
왕조시대가 종막을 고한지 100년도 넘은 이때, 왕조시대 임금도 아닌 대통령의 글씨가 뜨거운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다른 곳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 즉 충남 아산 현충사의 현판을 둘러싼 논쟁이다.
‘난중일기’(국보 76호)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326호) 등 이순신 유물의 소유권자인 종부 최모씨는 “현충사에 걸려있는 박정희 현판을 떼고 숙종의 어필 현판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난중일기’의 현충사 전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왜 이런 주장을 할까. 먼저 현충사가 모두 왜색으로 물들어있다는 것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필적이 왜적과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신사와 비슷한 양식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또 지금의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색채가 너무 진하다는 것이다.

 

■현충사 하면 박정희가 떠오른다 

현충사 하면 ‘충무공 이순신’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박정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펼치면서 자신의 정치색을 너무도 짙게 덧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친필현판은 바로 그 정치색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사업도 그 자체로 역사라는 것이다. 왜색이 문제가 된다고 일제시대 때 깔아놓은 철도와 도로를 깔아뭉개야 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또한 옛 본존에 걸려있는 숙종의 ‘현충사’ 현판은 겉만 한옥이지 콘크리트로 지은 지금의 본전 건물과는 구색이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일리 있는 의견이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친회와 15대 종부의 해묵은 갈등도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화재청은 오는 21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박정희 현판 문제를 다룬다. 어떤 결론이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숙종의 글씨. 다시 강건했던 필치가 부드럽게 변한다. 특히 숙종은 꺾는 부분을 각 지게 쓴 선대 임금들과 달리 모서리를 유연하게 돌려 꺾어 썼다.

 

■숙종이 하사한 현판
이 논쟁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될 본질이 있다.

어떤 경우든 ‘현충사’의 역사성을 훼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충사(사적 155호)가 어떤 곳인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유서 또한 깊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 임금이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를 가납함으로써 사당을 짓게 됐다. 3년 뒤인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顯忠祠)’ 글씨를 쓴 현판을 하사했다. 숙종은 이때 이순신 장군을 위한 제문을 내렸는데 그 내용이 심금을 울린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거니와 제몸 죽여 나라를 건진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이때 숙종이 표현한 ‘신망국활(身亡國活) 시견사인(始見斯人)’, 즉 ‘제 몸 죽여 나라를 구한 이는 이 분에게서 처음 본다’는 말은 충무공을 향한 최고의 찬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현충사 재건에 뜻을 모은 조선민중 2만명
그후 현충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을 겸했던 현충사도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에 충무공의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이충무공유적보전회가 설립되어 모금운동을 펼쳤다. 1931년 6월26일 동아일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달된 성금내역을 1면을 털어 게재했다.
‘정열(情熱)이! 단성(丹誠·뜨거운 정성)이!’를 제목으로 성금을 보내온 사연들을 전한 기사를 보면 눈물겹다.
조선 본토가 아닌 중국 단둥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먹을 것을 위해 조국을 버리고 타국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지내오다 충무공 유적 보존 소식을 듣고 20전씩 모았다”면서 성금을 보냈다.

심지어는 나병(한센병)에 걸려 대구 나병원에 수용된 환자 148명이 성금을 모아 보냈다는 기사도 실렸다. 9살 된 코흘리개 학생은 “성금모금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한테 받은 10전을 보낸다”면서 “이 적은 돈이라도 보태 충무공의 묘소를 보전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사연을 보냈다.
원래 4000원을 모금하려 했지만 성금이 쇄도하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2만여명이 참여한 성금의 액수는 무려 1만6000원에 달했다.
이렇게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까지 보낸 성금을 바탕으로 현충사가 중건된 것은 1932년 6월5일이었다.

 

정조의 어필. 할아버지 영조가 대신들에게 ‘우리 손자가 얼마나 글씨를 잘 쓰냐’고 극찬했다.

■구석으로 몰린 숙종의 ‘현충사’
그러다가 1966년 4월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따라 지금과 같은 규모로 확장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성역화 기념으로 새로 건립한 현충사의 본전에 한글현판 ‘현충사’를 내걸었다. 이외에도 현충사의 정문에는 ‘충무문’, 본전의 정문에는 ‘충의문’ 현판을 걸었다.
그러니까 박대통령이 현충사에 건 현판은 ‘현충사’ ‘충무문’ ‘충의문’ 등 3개인 것이다.
이 와중에 당대 최고의 명필인 숙종 임금이 쓴 ‘현충사(顯忠祠)’ 현판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사실 직접 찾아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필자는 얼마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잘 정돈된 현충사를 찾아갔다.
1966년 성역화에 따라 확정 정비된 현충사의 중심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무문-충의문-현충사’ 친필 현판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면 숙종의 어필 현판은? 정문에서 현충사로 들어가는 중간의 왼쪽에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 옛 본전에 걸려있다.
옛 본전은 1966년 성역화 작업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이다.

 

■현충사에 한번 가서 직접 느껴보라
만약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현충사를 찾아 중심축선으로만 걷는다면 십중팔구 놓치고 말 것이다.
결국 충청도 유생의 애끊는 상소와 숙종의 ‘현충사’ 현판, 그리고 일제강점기 2만여 민중의 정성이 담겨있던 그 유서깊은 옛 현충사 본전은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긴채 조연으로 전락한 셈이다.
필자는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구든 현충사 현판 논쟁에 가세하여 이런저런 의견을 내려한다면 반드시 현충사를 한번 방문해보라.
찾아가서 성역화 이후의 웅장한 현충사와, 지금은 한편의 구석에 서있는 옛 현충사 건물을 비교해보라. 물론 박정희 현판과 숙종의 현판도 한번쯤 살펴보라. 지금의 현충사는 과연 누구의 현충사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첨언: 필자는 현충사를 다녀와 옛 자료를 뒤져보았다. 2005년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이었는데, 그중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28곳(34건)에 달했다. 지금은 교체되었지만 한글 현판인 ‘광화문’(사적 117호)을 비롯해 영릉·녕릉(사적 195호), 행주산성(사적 56호),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사적 229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3호) 등 내로라하는 사적의 현판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이중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유허인 화석정(파주시유형문화재 61호)와 오죽헌(보물 165호)까지 포함돼 있다. 18년이나 집권한 탓도 있겠지만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도 서예를 통치에 활용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서예’를 두고 ‘잡기말예’니, ‘완물상지’니 하며 경계했던 조선 신하들의 아우성을 떠올려본다. 박정희 현판의 존치를 주장한 종친회장이 ‘숙종만 임금인가, 박정희 대통령도 임금이다’라고 주장한 종친회장의 인터뷰도 눈에 띄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이민식, ‘영조어필비’, <영조어필비>,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도록. 2015
이동국, ‘퇴계 이황 서예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4
양영술, ‘정조어필의 유가미학적 고찰’, 성균관대 석사논문, 2010
장학진, ‘역대대통령들의 묵적 연구’, 원광대 석사논문, 2017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실의 묵향-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왕실 서예> 테마전 도록, 2006
서울서예미술관, <조선왕실어필>, 한국서예사특별전 22 도록, 예술의전당, 2002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 1999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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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똥세 2018.02.08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정희 현판도 하나의 역사 아닌가? 꼭 안되는 이유도 없고 꼭 돼야할 이유도 없는 법. 단지 역사의 흐름으로 인식하면 될 일 아니던가? 꼭 집어서 우문을 던져야 하는지?

    • 2018.02.08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충사의 뜻에 더 맞는 분의 현판이 걸리는 것이 맞겠죠. 말하신대로 그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가부를 논하려는 것이고요. 기자의 큰 책무는 사회가 접한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보는데 그런 행위를 생각이 다르다고 우문이라 하시면 그거야말로 다른 의미의 우문이 아닌가 싶네요.

  2. 이화농 2018.02.09 0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가 주장하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는 후손에게 공명정대한 내용을 전해야 할 중차대한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현충사가 충무공을 모시는 유적지라면 충무공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갖고 계실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한번 더 생각을 하여야 할것 입니다. 우리 후손은 성웅을 부끄럽지않게 모셔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3. A 2018.02.09 1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상복구후 다시 박정희글씨로 바꿀 수 있나 불가능하므로 원상복구가 당연한것

  4. kimduhan1 2018.02.09 18: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정희는 무엇을 한 인물인가?
    무슨 죄도 없는, 한국에 1mm도 공격을 한 적이 없는 월남에 대하여, 돌연 침략 군단을 파병, 전국토를 유린하고, 노인을 죽이고, 여성을 강간한 전쟁범죄인이다. 전범이 국가에 의해 숭배되어 있는 것은 이상하다.

  5. 최정욱 2018.02.09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6. 노박사 2018.02.09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박정희 현판이어야 한다.

  7. 웨일즈 2018.02.10 2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충사에 덧발라 놓은 왜색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특히 시바스리갈 얼근이 취한 날 일본도를 허리춤에 차고 일본군가를 부르며 청와대 잔디밭에서 옛 일본장교 시절을 자랑스러워 했던 다까끼마사오가 왜놈들의 야욕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의 신성한 옥체에 이름표를 달아 놓은다는게 말이 된다는 소린가?
    현충사 전각도 한국 고유양식으로 바꾸고, 일본 조경수와 박정희 현판은 당장 불쏘시개로 다 태워 없애야 한다. 그런곳에 드는 세금은 하나도 아껴선 안되며, 혹여 불가하다는 매국노들이 분분하다면 일제시대 민초들이 그랬듯이 다시 한 번 성금을 거두어서라도 원래대로 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 kimduhan1 2018.02.1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다면 처음부터 「편액」은 중국의 문화로 한국 고유의 문화가 아니다. 국립묘지라고 하는 시스템은 미국·알링턴 묘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다.
      고유의 문화론을 시작하면 한국에밖에 없는 것이나 되는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게 된다.

    • 웨일즈 2018.02.16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두한1 /
      내가 여기에 쓴 글이 현판의 근원과 사당의 효시를 갖고 얘기한 것으로 보이는가?
      왜구놈들의 조선침략 야욕을 한 몸으로 막아섰던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곳에 쪽바리들의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게 잘못 됐으므로 거둬내야 한다는게 편액과 국립묘지의 근원을 논하는 것으로 보인단 말인가?
      한국말 더 배우고 와서 한국문화의 큰 깊이를 제대로 터득하길~~

  8. 2018.02.11 1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젊은 20대 여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 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 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 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 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 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 말로 한국을 망친 창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 이었으므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 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
    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 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 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 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 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펌 글-

    • kimduhan1 2018.02.11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정희는, 일본의 교육을 받고, 일본의 군대에서 사회인이 되어, 만주국의 경제발전을 배우고, 만주국 관료 기시 노부스케가 한 경제발전의 방법을 배운 사람이다. 왜 당신은 경제를 공부했는데도, 한국의 경제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준 일본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인가?

  9. 길가던 나그네 2018.02.11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6월14일 부정축재 처리법 공포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개원
    1961년07월22일 경제기획원신설
    1961년08월03일 김포가도 포장 기공
    1961년08월08일 황지지선 기공(1961.6.13~1962.12.10)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09월23일 대한 중선창연(蒼鉛)자가제련공장 준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제정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3월19일 핵분열 연쇄반응 일으키는 원자로의 임계도달 시험-양주군 노해면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창설
    1962년06월01일 무역진흥공사발족
    1962년06월18일 건설부 신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2년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1962년09월10일 남양송신소 준공
    1962년10월20일 해운센터기공식
    1962년10월23일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 송배전신 및 케이블공장 기공
    1962년11월04일 광주디젤발전소 준공
    1962년11월06일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간)개통
    1962년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1962년11월20일 제4시멘트공장건설
    1962년11월25일 부정거래단속법을 제정
    1962년11월28일 난민정착사업장 제방준공
    1962년12월01일 마포아파트준공
    1962년12월15일 김포,강화간 대교건설(~1970.1.26)
    1962년12월24일 생활보호법제정
    1962년12월28일 호남 비료 나주 공장 준공
    1963년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1963년01월10일 외자도입 강력추진
    1963년01월18일 원호센터 준공
    1963년0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2월04일 지방문화재육성
    1963년03월15일 동진강지역 종합개발공사 기공, 김해, 진도(63~69)
    1963년03월21일 감사원 개원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송전실시
    1963년04월10일 부녀회관 건립 기공
    1963년05월14일 남대문중수공사 준공
    1963년07월20일 제대군인 개간농장 입주
    1963년08월08일 한국나이론 공장 건설(대구)
    1963년08월08일 국사교육통일방안 확정
    1963년09월01일 철도청 발족
    1963년09월01일 노동청 발족
    1963년09월06일 국토종합개발계획조사착수
    1963년09월06일 동대문 개축준공
    1963년09월10일 문화재 보수 5개년계획확정
    1963년09월17일 가족계획사업추진
    1963년09월25일 직업재활원 개원
    1963년09월26일 PVC 제조공장 기공
    1963년10월10일 가정법원 개원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1월01일 미터제 실시
    1964년05월07일 울산 정유공장 건설
    1964년05월07일 국립 중앙 의료원 설립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준공
    1964년08월20일 감천화력발전소건설(부산)
    1964년11월29일 울산 제3비료 공장 기공식-매암동,충주비료와 미국 스위프트 투자단의 공동투자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 70년 10억불/77년 100억불/82년 200억불/85년 300억불/88년 500억불 달성,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5년12월02일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군군장비현대화계획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건설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국립공원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의무교육9년으로로연장,교육제신설,교원에게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 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 개발 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 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 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702개섬 개발계획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 종합 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 동시가입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8년07월01일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실시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째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2월22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위에 나열한 업적들은 100% 실체입니다.
    다시말해 'fact'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좌파 또는 우파와 전혀 관련없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공식적인 업적 그대로를 나열한 것입니다.

    세계역사에 이렇게 많은 일을한 대통령은
    전무 후무 할것입니다.

    나름 글자 나부랭이 조금 배웠다고
    감히
    위에 나열한 엄청난 일을 해낸 분의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는 분명 불순한 저의가 있다고 보입니다.

    • kimduhan1 2018.02.11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정희의 공적은 일본과 수교해서 막대한 기술, 자금원조를 받은 것. 여기 있는 사업도 많이가 일본의 원조로 행하여졌다. 그 역사를 한국은 지우지 않고 제대로 교육하고 있는 것인가?

  10. 평창 2018.02.11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군가 부르던 정신으로 쓴 글씨는 부끄러운 역사물일 뿐이다!

  11. 대한의아들 2018.02.11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를 알려면 똑바로 알고 씁시다ㆍ

    1. 해외에 나간 광부ㆍ간호사ㆍ심지어 월남 참전용사들이 고국으로 보내온 돈은 자기들이 못먹고 못입고 인생을 바친 돈들입니다 ㆍ

    그 돈으로 박정희 일가 금고에 돈을 쌓으라고 준것이 아닙니다 ㆍ심지어 위안부 합의금은 어찌된것 일까요?

    2. 박정희가 친일 노릇하여 자기 목숨은 건지고
    독립운동가 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한것이
    잘한일입니까?

    3.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마십시요
    저 노동자들과 연구 개발자들이 피땀흘려 일궈낸것 입니다 ㆍ

    밥숫가락 얹었다고 그 사람이 밥했다고 하는것은
    어불성설 입니다ㆍ

    4. 박정희가 암살당한곳이 어디입니까?

  12. 박정희 2018.02.12 0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와 달이 뜨는 것도 다 업적에 넣지?

  13. 🐍🐻 2018.07.23 1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더의 중요성을 모르는 분들..아무나 다 할줄아나 복원 생각하도 추진하신 걸 모르네 ..그리고 대한의 아들님 독립투사?공신주의 독립투사는 제외하고 싶은데요??

  14. 근자필성 2018.08.03 2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현판 꼭 바꿔야하나요?

  15. 빈대머리 2020.05.17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정동 안가 즉 빠구니하기 딱인 곳이지. 심수봉과 2차기기로 한 이쁜이 배우 한사람도 있었지. 몇년안가서 김재규 동상이 광화화문 세종대왕 동상옆에 서는 그날까지 즉 천수(108세)까지 이 악물고 건강하게 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