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0) 썸네일형 리스트형 (15)청주 신봉동 유적 上 ㆍ도굴로 짓밟힌 무덤서 만난 ‘철강강국 백제’ “허허, 술 덕분이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차용걸 교수(충북대)가 껄껄 웃는다. 두 사람은 1982년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성백제의 최전성기 때 조성된 청주 신봉동 유적 발굴현장. 도굴의 참화 속에서도 백제 철기군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철제 무기류가 대거 출토됐다. | 충북대박물관 제공 ‘숙취 덕분에’ 발견해낸 백제의 역사 그해, 그러니까 1982년 3월21일 일요일 아침. 차용걸 교수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영 메스꺼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기 때문이었다. 대학(충남대 사학과) 동창생인 심정보(한밭대 교수)·성하규(대전여상 교사) 등과 청주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한 날. “원래는 청주 상당산성(백제시대 때 초.. (14)국보 205호 중원고구려비 下 중원 | 이기환선임기자 ㆍ돌에 새겨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옛 기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일화가 많아요.”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이 빛바랜 책을 하나 건넨다. 1979년 중원고구려비 발견 직후 단국대가 만든 학술지 ‘사학지(史學志) 제13집’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학계원로들의 발표논문이 수록돼 있다. 30년 남짓 지난 지금, 당시의 논문들을 능가할 만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1979년 6월9일 7시간 동안 펼쳐진 중원고구려비 학술좌담회 내용이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의 중원 고구려비 전각. 관광객들이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를 살펴보고 있다. “대박사는 없고 소박사만 왔나봐”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 (13) 국보 205호 중원 고구려비 上 중원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 ㆍ향토사학회가 발견한 ‘충청도의 광개토대왕비’ “중원 고구려비를 말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어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이 지목한 사람들은 바로 ‘예성동호회’라는 향토연구회 사람들이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 중요한 국보(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거야. 그뿐인가.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잖아.” 예성동호회라. 이 모임은 1978년 당시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와 장준식 현 충청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 예성동호회의 개가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 그러나 1979년 9.. (12)발끝에 걸린 신라 적성비 ㆍ1500년전 사회상 오롯이 담긴 진흥왕의 포고문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조사단이 찾아가려고 한 곳은 단양 읍내 뒷산인 성재산(해발 323m·적성산성)이었다. 신발 흙을 털다가 발견한 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 진흥왕 때 죽령을 넘어 국력을 신장시킨 6세기 중반의 역사를 웅변해준다. 유명한 이사부와 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확인되고, 거칠부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과 직책도 보인다. 단양 | 이기환 선임기자 오후 2시. 조사단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은 산에 올랐다. 정영호 교수의 회고담. “성 안에는 옛날 식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ㆍ흐르는 강물따라 문명이 어우러지다 “무릇 나흘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도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년)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산 첩첩 하늘 한 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메산골이었다.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이라 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아직은 정확한 분석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 ‘산 첩첩 하늘 한 뼘’ 이고 산 사람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7월 어느 날. 기자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 등과 함께 아우라지를 찾았다. 아우라지라. 태백산에서 출발, 정선 임계 쪽으로 굽이치는 골지천과, 평창 발왕산에서 발원한 물.. (10)나주 복암리 下 - 마한의 수수께끼 결국 마한은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해온 고대국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제와는 다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 즉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제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800년간이나 정치체를 유지했다면 왜 마한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없을까.’ 차근차근 풀어보자. 마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살펴보자. ■ 마한의 역사가 800년이라고? “마한은 BC 2세기 무렵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 흡수됐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 이 통설은 두계 이병도가 일본서기에 나온 반설화적 기록을 해석한 이후 구축됐다. “(왜가) 침미다례(枕彌多禮·전남 지방의 마한 소국.. (9)나주 복암리中- 무덤박물관이 던진 고대사 실마리 나주 복암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마한·백제 고분 틈새 일본식 무덤의 정체는?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하나의 분구(봉분)에 41기의 무덤이 아파트처럼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동일집단이 3~7세기 사이 400년 동안 조성했다. 마한계 옹관묘에서 왜계로 평가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 그리고 백제 석실분까지 차례로 조영됐다. 고분박물관으로 일컬어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 (8) 나주 복암리 上 - 고대사의 블랙박스 열리다 나주 복암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ㆍ영산강 유역 잊혀진 역사 ‘옹관’으로 모습 드러내다 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임영진 전남대 교수) ■ ‘처녀분이다!’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