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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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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주 진동 허준의 묘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7월17일 허준 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글쓴이가 허준이라고? 서지학자는 그만 흥분했다. “사실확인에 들어갔죠. 허씨 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에서 준(浚)자를 썼던 분을 몇몇 발견했는데요.”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양천허씨족보’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4)파주 백학산 석불 “여기에는 지뢰 같은 것 없죠?” '> 기자가 농처럼 묻는다.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빨간 딱지의 표지를 스치듯 지나가노라니 왠지 꺼림칙하다. 수풀을 헤치며 다가가는 발걸음이 섬뜩하다. 그래서 묻노라면 동행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씩 웃는다. 그러면서 되받아치는 농담. “음, 신문도 아무리 철저하게 교정을 보아도 오·탈자가 생기잖아요. 여기도 마찬가지죠.” 오·탈자의 악몽에 시달려온 기자들에게는 참으로 절묘한 비유다. 지뢰탐사반이 철저하게 훑고 지나가도 간혹 발견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야! 정말 끝내주는 비유네!”하고 박장대소하지만 등짝에 맺히는 식은 땀방울을 어찌할꼬. 6·25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학산 고지(229m·파주시 군내면 읍내리)...
(3) 파주 서곡리 벽화묘 -한씨자손이 권준선생을 600년 모신 사연- “민통선 안에서 누가(도굴범) 물건을 꺼내왔다는데…. 무덤에 뭔가 그림 같은 게 있다고 하네요.” 1989년 어느 날, 당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에게 한 통의 제보가 들어왔다. 도굴된 벽화묘? 우리나라에서, 특히 한반도 남부에 벽화묘는 극히 드문 것이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제보자는 무덤의 위치를 파악한 뒤 정실장에게 전했다. “파주 서곡리 야산이랍니다. 비석도 있다네요. 청주한씨, 문열공 한상질의 묘라고 하네요.” 한상질(1350?~1400년)이라. 여말선초의 문신이자,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의 할아버지. “벽화묘라니까 발굴조사가 필요했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한병삼씨(작고)도 청주한씨거든. 내 대..
(2)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성’ -고구려·백제 치열한 106년 전투 ‘관미성’- “저기가 북한입니다. 한 3㎞ 떨어졌을까요. 저기 보이는 곳은 북한의 선전촌이고요. 김일성 사적관도 보이고….”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엔 오두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은 통일전망대로 더 유명한 야트막한 산(해발 112m)이다. 뿌연 안개 사이로 갈 수 없는 땅 북한 관산반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썰물 때는 도섭(걸어서 건널 수 있는)할 수 있는 지점도 조금 더 가면 있어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난다 해서 교하(交河)라 했던가. 윤일영 예비역 장군의 말이 새삼스럽다. 팽팽한 남북 분단의 상징…. 1600년 전에도 그랬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쟁탈의 요소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문헌상 기록으로도 우리는 4~5세기 이곳을 무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