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기행

(39)
돌부리에 신발 털다가 찾아낸 단양 적성비의 비밀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조사단이 찾아가려고 한 곳은 단양 읍내 뒷산인 성재산(해발 323m·적성산성)이었다. 오후 2시. 조사단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은 산에 올랐다. 정영호 교수의 회고담. “성 안에는 옛날 식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지. 대부분이 신라토기였고. 학생들에게 ‘글자가 있는 기왓장을 수습하면 맥주 한 병씩 준다.’고 했는데….” 하지만 별무신통. 간밤에 내린 눈에 녹아 진탕이 되었고, 조사단은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거렸다. 마침 직경 한 뼘쯤 되는, 흙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돼 있었다. 안성맞춤이었다. 조..
백제 손바닥에 있던 마한-나주 복암리(하) “마한의 시작은 BC 3세기 무렵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를 유지하며 AD 6세기까지 존재했다.” 이것이 이른바 최근 대두되고 있는 마한론의 실체이다. 나주 복암리 등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나는 주구토광묘(도랑을 두른 무덤)와 옹관묘, 그리고 전방후원형 고분을 중심으로 한 초기횡혈식 석실묘 등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고대사다. 결국 마한은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해온 고대국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제와는 다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 즉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제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800년간이나 정치체를 유지했다면 왜 마한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없을까.’ 차근차근 풀어보자. 마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살펴보자...
왜 일본식 무덤이 영산강에 있을까-나주 복암리(중)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이 나왔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뭐 이런 식으로 줄줄이 나왔어…. 어때요. 옛 사람들이 후손들을 생각해서 타임캡슐을 묻어둔 것 같지 않아?”(고고학자 조유전 선생) 그러고 보니 옹관의 생김새가 마치 캡슐 같기도 하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함평 신덕고분. 영산강 유역에는 5세기 말부터 약 50년간 이런 일..
고대사의 블랙박스 열렸다-나주 복암리(상) 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임영진 전남대 교수) 복암리 고분군 발굴모습 ■ ‘처녀분이다!’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사(1, 2, 3호분)는 말 그대로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였다. 정식발굴이..
2000년전 동북아의 교역중심지-해남 군곡리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이건 야철지 아닌가.’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
제주도에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있는 까닭 1987년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고?”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윤)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이청규 제주대 교수(현 영남대)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고산리에서 확인한 융기문토기.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화폭이었고, 그들은 토기에 빼어난 예술성을 뽐냈다. ■농부가 찾..
마한인들의 지하주택단지(2) 지난 2008년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과 천하를 주유하며 한국사여행을 떠난 때가 떠오릅니다. 전국에 흩어진 고고학 발굴 자료를 중심으로 떠난 여행입니다. 당시 조유전 선생은 토지박물관장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공직을 떠나셨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조유전 선생과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그 전에 필자와 조유전 선생이 떠났던 추억여행을 반추해 보려 합니다. 매주 1회씩 게재하오니 많은 사랑 바랍니다. 이번 주는 2000년전 마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확인된 충남 공주 탄천면의 장선리 유적을 찾아봅니다(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선생님은 ‘발굴복(福)’이 있으셨나요?”(기자) “허허, ‘발굴복’이라. 글쎄…. 그저 ‘소소(So So)’라 할 수 있지.”(조유전 선생) “하기야 천하의 김원룡 선생도 생전에 ‘..
황룡의 꿈 서린 주몽의 도읍지, 오녀산성을 가다 “와!” 환런(桓仁)시내에서 8㎞ 쯤 달렸을까. 단풍이 곱게 물든 산 길을 굽이굽이 돌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상상 속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 혹은 천신이 강림하여 쌓은 거대한 성채(城砦) 같은 것이 떡하니 솟아있다. 이름하여 오녀산성이다. 옛날 산과 마을을 수호하던 선녀 5명이 흑룡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해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고구려의 발상지라면서 5선녀가 어떻고. 흑룡이 어떻고 하는 전설이 좀 뜬금없기는 하다. 하지만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으니 어쩌랴. 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녹록치 않다. 필자는 강남문화원 답사단과 함께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환런시(桓仁市)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