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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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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어머니 사랑이 담긴 절터, 그곳에서 발견된 밀봉그릇 1978년, 당시 충주지청으로 발령받은 유창종(검사)과 장준식(당시 충주북여중 국사교사·현충청대 교수) 등 5명이 만든 답사모임이 있었다. 정식 이름도 없이 그저 기와를 주으러 다니는 모임 정도라고나 할까. 당시만 해도 기와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하고 천대받고 있었다. 다른 고미술을 사면 덤으로 끼워주는 게 바로 기와였으니까. 숭선사에서 발견된 밀봉된 그릇. 그 안의 액체가 무엇인지 수수께끼다. ◇예성동호회의 잇단 쾌거 그런데 78년 9월5일 어느 날, 이 ‘기와를 줍는 모임’이 어느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이거 이상한 돌이네요.” 식당에 디딤돌 같은 돌이 있었는데 그 돌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은가. 연꽃무늬라. 사람들은 ‘고려사’ 기록을 언뜻 떠올렸다. 1277년 충렬왕 3년에 충주성을 개축하..
감은사엔 문무왕의 사리가 있다 1997년 “감은사 동탑엔 문무왕의 사리가, 서탑엔 부처님의 사리가 각각 봉안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추정은 불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우선 연구소 측의 주장. 문무왕은 처음으로 서역식 화장 장례를 도입한 ‘불심 깊은 왕’이었다. 왕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나왔다면 분명 그의 원찰인 감은사, 그것도 동탑에 봉안했을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감은사 동탑에는 문무왕의 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파악했다.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된 서탑과 어깨를 나란히했다는 주장이다. 서탑의 경우 사리병 장식물이 부처님의 열반을 향연하는 주악(奏樂)의 천인(天人)들인 반면, 동탑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인 사천왕이 장식됐다. 문무왕은 재세기간동안 사천왕사를 건립했을 정도로 사천왕 사상과..
용이 되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문무왕 “앗.” 탑을 바라보던 김재원(당시 국립박물관장)의 절망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3층 석탑 해체를 위해 높이 12m, 사방 160㎝의 3층 탑신 위에서 일하고 있던 연구관 김정기(최근 작고)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3층 지붕받침돌을 연결한 나비장이음이 김정기의 무게 때문에 떨어지면서 옥개석이 기우뚱, 무너져 내렸다. 김정기 역시 추락사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순간 김정기는 기지를 발휘하여 탑 옆에 세워둔 비계목으로 건너뛰었다. “살았다.” 김재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명횡사할 뻔했던 김정기는 일본 메이지(明治大) 건축과를 졸업하고 도쿄대(東京大) 건축학 연구실에서 한국건축사를 연구하면서 일본의 사찰 터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재원이 일제시대 때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 반환회담에 참..
신라-당나라 국제회담장이 된 철옹성 3국통일 주춧돌 쌓고, 나·당 국제회담이 열린 철옹성(보은 삼년산성) 한반도 중원의 요충지였던 보은 삼년산성 해발 35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성. 하지만 10~20m의 성벽 위에 오르면 충북 보은 일대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다. 서문을 거쳐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처음 만나는 아리따운 이름, 즉 ‘아미지(蛾眉池)’라고 새겨진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신라의 서성(書聖)인 김생이 썼다지 아마….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 같은 매력적인 연못이었으리라. 혹여 김생이 반달처럼 생긴 연못을 아름다운 여인의 윙크로 착각하고 이 감상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조선말 학자인 박문호(1846~1918년)도 절로 시상을 떠올렸나 보다. “삼년성에 달이 떠오를 때 고을 남쪽 다리에 머물며 바라보니, 산..
동래전투, 끔찍한 아비규환의 현장 지금으로부터 1424년 전 이맘 때 조선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당시 1592년 4월13일 30만명으로 무장한 왜병 가운데 선봉대 2만이 700척에 분승해서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첨사 정발이 부산진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했고, 왜병은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이었습니다. 송상현은 백성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항복을 권하는 왜병에게 송상현 부사는 “네놈들하고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그 중에는 제 몸만 지키려고 빠져나온 자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래성 전투입니다. 이 싸움의 참상은 영조 때 동래읍성을 수축..
동래에서 확인한 왜병의 만행 지금으로부터 1424년 전 이맘 때 조선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당시 1592년 4월13일 30만명으로 무장한 왜병 가운데 선봉대 2만이 700척에 분승해서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첨사 정발이 부산진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했고, 왜병은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이었습니다. 송상현은 백성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항복을 권하는 왜병에게 송상현 부사는 “네놈들하고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그 중에는 제 몸만 지키려고 빠져나온 자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래성 전투입니다. 이 싸움의 참상은 영조 때 동래읍성을 수축..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하) “옛 기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일화가 많아요.”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이 빛바랜 책을 하나 건넨다. 1979년 중원고구려비 발견 직후 단국대가 만든 학술지 ‘사학지(史學志) 제13집’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학계원로들의 발표논문이 수록돼 있다. 30년 남짓 지난 지금, 당시의 논문들을 능가할 만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1979년 6월9일 7시간 동안 펼쳐진 중원고구려비 학술좌담회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문의 해석문 ■“대박사는 없고 소박사만 왔나봐”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정영호 등 학자들이 막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문을 해독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와, 잘 연결되지 않은 문장을 두고 고뇌에 찬 해석을 하고..
충청도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상) “중원 고구려비를 말할 때 절대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어요.”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이 지목한 사람들은 바로 ‘예성동호회’라는 향토연구회 사람들이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 중요한 국보(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보물(봉황리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지 못했을 겁니다. 그뿐인가요. 고려 광종이 954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기려 지은 숭선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도 확인했잖아요.” 예성동호회라. 이 모임은 1978년 당시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와 장준식 전 충청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향토연구회인 ‘예성동호회’가 기념사진이나 찍으려고 모여 중원 가금면을 답사하던 중 발견한 중원 고구려비. ■ 예성동호회의 개가 당시에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했던 기와를 주우러 다녔고, 모임의 이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