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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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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의 수수께끼, 일본열도에서 숨쉬다 골프 여행으로는 가벼운 발걸음이리라. 비행기로 불과 1시간30분 거리인 ‘따뜻한 남쪽나라’여서 그럴까. 친구끼리, 부부끼리…. 1월24일, 한 겨울 금요일 낮 인천발 미야자키행 비행기는 골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사례였다. 미야자키 공항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수 십 개의 골프가방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북새통을 뚫고 백제왕의 전설이 숨쉬는 난고손(南鄕村)의 ‘구다라노사토(百濟の里)’, 즉 백제마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렸지만, 체감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규슈 산맥 끝자락의 심산유곡을 휘감는 산길을 돌고 돌아가는 여정…. 굽이굽이 흐르는 고마루(小丸) 강을 따라 한 1시간30분 정도 갔을까. 저만치에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걷고 있는 마츠리(お祭り) 행렬이 보였다. ‘미카..
끔찍했던 1968년 1968년 10월말 울진 삼척에 북한 124군 부대 소속 유겨대원 120여 명이 침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68년은 끔찍했다. 미증유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이틀 후(1월23일)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에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구정인 1월30일에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의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가 펼쳐졌다. 그해 10월30일부터는 울진·삼척에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120여명이 연속침투했다. 이들은 15명씩 모두 8개조로 산간농촌마을에 나타나 위조지폐를 나눠주고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가 전쟁의 공포에서 떨었던 한 해였다. 이 세 사건은..
'침묵의 절규', 1.12사태 무장공비 무덤 경기 파주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 조성돼 있는 ‘북한군/중공군 묘지’. 이곳에는 1·21사태 때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남파됐던 124군 특수부대원들이 묻혀 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인 유해 8구와 ‘북한군 중위 나정길’ ‘상위 김시웅’ ‘소위 김수윤’ ‘상위 김춘식’ ‘중위 김길수’ ‘중위 임용택’ ‘소위 조명환’ ‘소위 현수제’ ‘소위 박양조’ ‘소위 방양진’ ‘소위 최준일’ ‘소위 김달신’ ‘소위 김창국’ ‘소위 박기철’ ‘소위 김순국’ ‘소위 권호신’ ‘소위 김일태’ ‘소위 김을식’ ‘소위 한수군’ ‘소위 유형호’ 등 사살자와 자폭자 이름이 보인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따따따따~” 1968년 1월10일 새벽, 황해남도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건물에 정체불명의..
'소나무 양병설'의 현장 연미정(燕尾亭).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서 한 줄기는 서해로, 다른 한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습이 ‘제비꼬리’ 같다 해서 ‘연미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삼포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형 장군(1459~1520년)에게 하사한 정자이다. 황형 장군의 전설은 신비롭기만 하다. 낙향 후 연미정에서 바둑으로 소일하던 장군은 동네 아이들에게 볶은 콩을 나눠 주면서 소나무 묘목을 옮겨오라고 시켰다. 아이들이 싫증을 느끼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면서 소나무를 계속 심었다. 동네사람들이 물으면 ‘그저 나랏일에 쓰일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강화 3경인 연미정의 절경. 제비꼬리 처럼 닮은 지형에 놓인 정자라 해서 이름붙었다. 황형 장군의 ‘소나무 양병설’과 ‘정묘조약 체결’, ‘유도 송아지 구출작전’ 등 갖가지 사연들을..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1637년 1월30일은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로 기록돼있다. 임금(인조)이 오랑캐인 청태종의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이나 무릎을 꿇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용포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펼쳤다. 신하된 주제에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며, 항복했으니 백마를 타고 나온 것이다. 청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犬)에게 던져주었다.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조선의 상징인 임금이 굴욕을 당했던 그 날을 ‘삼전도의 굴욕’이라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든다. 못난 임금이 무릎을 꿇은 것이 뭣이 그리 굴욕이란 말인가. 강화 갑곶진. ..
북한산성에 금괴가 묻혀있다? “전설에는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나 믿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속에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니….” 1939년 10월28일 동아일보(‘북한산 일순(一巡)-하이킹 코스’)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잡초 황량하고, 충성(蟲聲·벌레소리) 무성한 행궁터에서 묻혀있다는 ‘금괴매장’의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는 “북한산성 내에 은 1만2250냥(460㎏)과 소금 50석, 숯 2120석을 창고에 보관했거나 땅 속에 묻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괴는 아니지만, 당시 무역의 주요 결제수단인 은을 다량 보관했던 것이다. 더구나 1년 전에 행궁터에 엄청난 양의 암염과 목탄이 발굴된 것은 사실이라지 않는가. 은매장..
숙종, 영조, 정조가 북한산성에 오른 까닭 18세기 . 한양도성과 함께 북한산성까지 그려놓았다. 숙종은 1711년 성곽을 완성시킨 뒤 연잉군(영조)의 손을 잡고 북한산성에 올랐다. 원래는 도성 북쪽의 직선로를 따라 올라야 했지만, 길이 험해 서북쪽 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대동문을 통해 수유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위한 행차였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북한산성) 대서문 입구에서 뒤돌아보니~시름 절로 풀리네. 도성의 지척에 금성탕지 있으니 내 어찌 서울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숙종의 북한산성 행차 기념시) 1712년4월10일(음력) 아침, 임금(숙종)이 막 수축을 끝낸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북과 피리소리가 울려퍼진 가운데, 기병 수천명의 호위를 받은 왁자지껄한 ‘행행(行幸)’이었다. 연잉군(당시 19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