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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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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고려말 출신 이양소선생 -不事二君 절개 ‘위대한 은둔- '>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민통선 이북(연천 중면 적거리 신포동). 해발 100m쯤 돼보이는 야산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이양소 묘를 찾는 여정은 험난했다. 키만큼이나 자란 수풀과 나무를 헤치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한 후손(이희풍씨)의 낯엔 찾아온 손님들에게 송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겨우 찾아낸 이양소(1367~?)의 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풀이 점령한 탓인지 무덤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무덤은 15m 둘레의 봉분에 화강암 재질의 묘비와 상석. 그리고 문관석(157㎝) 2기가 마주 대하고 있다. 문인석은 얼굴이 길쭉한 돌하루방을 연상케 한..
(23) 성산성(下) -김화대첩 이끈 ‘유림·홍명구’ 의 전장- '> 1636년 12월8일. 청나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자 조정은 사색이 되었다. 수도권 방위를 위해 각 도의 감사, 병사, 수사에게 긴급명령을 하달한다. “급히 근왕병을 이끌고 수도권에 집결하라.” 당시 평안도 감사(도지사)는 홍명구였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에게 격문을 보내 평양에 집결하도록 했다. 근왕군 대열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평양에는 홍명구군 2000명과 유림군 3000명 등 5000명의 근왕군이 집결했다. # 엇갈린 운명 12월18일 평양을 떠난 홍명구·유림의 근왕군은 도중에 노략질을 일삼던 적군 수백명을 죽인 뒤 이듬해 1월26일 김화 읍내에 도착한다. 김화는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쪽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인후(목구멍)와 같은 곳이다..
(21) 석대암(下) ‘덩굴쥐고 절벽잡아 바람부는 천제 향해 오르니(攀羅문壁上風梯)/암자 오랜 뜰 소나무엔 학 한 마리 깃들었네(庵古庭松一鶴棲)/숲 아래 경쇠소리 바람 밖에서 간절하네(林下磬聲風外切)/서쪽 봉우리 남은 해는 찬 시내로 떨어지네(西峰殘照落寒溪)’ 김시습의 ‘매월당집’에 묘사된 석대암의 풍경이다. 시에서 ‘바람부는 천제에 오르니’라는 대목은 풍수지리를 염두에 둔 구절이다. 석대암 뒤편 환희봉 정상에서 뻗은 능선의 솟은 많은 봉우리가 풍수지리학상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天梯)’ 형세라는 것이다. 또한 석대암은 예부터 바람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 사냥꾼과 금돼지 '> 과연 석대암에 서면 김시습의 표현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자! 이제 고려 말 학자 민지(1248~1326)가 지은 ‘보개..
(20) 석대암(上) -‘지장신앙’ 성지 중 성지… 절터의 속살이 펼쳐졌다- '> 단숨에 올라가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헛된 오만함이란…. 만만찮았다. 지장신앙의 성지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경기 연천 최고봉인 환희봉(877m) 정상 밑 해발 630m에 자리잡은 석대암 가는 길. 비무장지대가 아닌데도 ○사단 공보 장교가 따라나선 이유가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면 군부대를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을 가로지르면 심원사지 부도군이 보이고, 바로 그 위에 옛 심원사(647년 창건) 터가 펼쳐진다. 부도군은 2기의 비석과 12기의 승려 사리탑으로 이뤄졌다. 휴정스님(1520~1604)의 법맥을 이은 스님들의 탑과 부도란다.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인 심원사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철원 동송 ..
(19) 오리산 (下) -댐 추진… 이 ‘수직단애 풍광·무릉도원’ 을 어쩔것인가- '> '> 오리산에서 흘러내린 용암(마그마). 철원·평강 등 무려 2억평에 걸쳐 용암대지를 만들었고, 그것은 훗날 철원평야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마그마가 흘러 내려간 곳에 임진강·한탄강이 생겼고, 그 유역의 용암대지는 인류가 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물이 없으면 생명도 없는 법.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연천 전곡리에서 30만년 전의 세계가 펼쳐진 것은 당연하다. 1978년 전곡리 유적이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후,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선 20곳이 넘는 구석기 유적이 확인됐다. 지금도 강의 유역을 지나다보면 제법 넓은 용암대지들이 눈에 띄는데, 이런 곳에는 예외없이 구석기 유물들이 널려 있다. # 널려 있는 고인류의 흔적 고인류(이들은 현생인..
(18) 한반도의 배꼽 ‘오리산’(上) -화산·용암평야… 고인류의 출현- “저기 낙타고지(432.3m) 보이죠. 낙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죠. 그리고 바로 옆 자그만 산 보이죠.” 철원평야와 저 멀리, 갈 수 없는 땅 이북의 평강고원이 지평선처럼 펼쳐져 있는 곳. 동주산성(해발 360m) 정상에서 바라본 이북의 모습이다. 이우형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가 잘 보라고 손을 가리킨다. “어디요. 저기 낙타고지 뒤에 있는 큰 산?” “아니 그건 한탄강 발원지인 장암산(1052m)이고요. 낙타고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산, 저기가 바로 오리산이에요.” 오리산(鴨山)이라고? 그저 동네 뒷산처럼 야트막한 산인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구릉이라고 여기고 흘려버렸을 저기가 오리산? “맞아요. 저기가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오리산입니다.” # 한..
임진진(하) 1592년 5월17일 이곳 임진진에서 펼쳐진 임진강 전투는 ‘한심 스토리’의 전형이다. 무기력한 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반성의 기록(‘징비록’)을 남긴 서애 유성룡의 한탄이다. 그랬다. 서애의 반성을 더 들어보자.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병무에 익숙하지 않았고, …요지(要地)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한때는 철옹성(산성)을 쌓고, 필살의 청야전법을 쓰면서 수와 당나라 같은 제국을 망하게 하거나 번번이 골탕먹인 게 우리 민족인데…. 농업국가이자 유교국가인 조선의 방어체제는 어설펐다. # 태평성대의 그늘 세조(1417~1468) 때부터 조선의 방위개념은 진관(鎭管)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
(14) 임진진(上) -임진왜란… 임금은 백성버리고, 신하는 임금 버리고- 민간인 통제선을 지나 포장 및 비포장도로를 거치자 확 트인 임진강 북안에 닿았다. 꽤나 고운 드넓은 모래사장이다. 때마침 썰물때다 보니 강폭이 제법 넓어보였다. “저 맞은 편이 임진진(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입니다.” # 비는 내리고… 다시 민통선 이남으로 건너가 맞은 편 임진진으로 달려갔더니 군 부대다. 민통선 이남이지만 군 시설이니 역시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다. 헌헌장부(軒軒丈夫) 군 장교의 안내로 임진진, 즉 임진 나루터에 닿았다. 고깃배 몇 척이 동양화폭처럼 고즈넉이 떠있다. 고기잡이가 허락된 몇 몇 어부의 것이라고 한다. 홍수에다 만조가 겹치는 날이면 이곳 임진강 나루는 완전히 물에 잠긴다. 지금은 건널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임진나루는 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