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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살아남은 조선의 4대문, 그 아픈 역사 얼마전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로 복원한 모습을 공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의 4대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 등이다. 이중 철거된지 104년이 지나도록 복원되지 않은 유일한 문이 바로 돈의문이다. 원래는 원상회복 방침이었지만 주변토지 보상과 교통난 해소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증강 및 가상현실로나마 아쉬운대로 ‘상상속의 돈의문’이라도 감상할 수밖에 없다. 돈의문 철거소식을 의인화해서 알린 매일신보 1915년 3월4일자.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으로 철거의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돈의문이 철거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이었다. 그해 3월4일자 매일신보는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흥선대원군은 왜 경복궁 현판바탕에 검은색을 칠했을까 ‘박정희 친필 한글 글씨(1968년)→하얀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문글씨·2010년)→검은색 바탕의 황금빛 동판글씨(2019년)’로…. 14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 회의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광화문 현판의 재복원방식이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동판글씨’로 결정됨으로써 9년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광화문 현판의 제작방식 논란은 2010년 광복절 광화문 복원에 맞춰 내건 현판이 불과 몇개월만에 균열이 생겼고, 문화재청이 그해 연말 전격적으로 교체를 결정함으로써 전개됐다. 하지만 광화문 현판 논쟁은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가로쓰기 한글 현판이 걸리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그렇게보면 50년도 더 된 논쟁이었다. 1865~68년 사이에 경복궁과 함께 복원..
일제는 왜 서대문(돈의문)은 헐고 남대문(숭례문)은 살렸나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 1915년 3월4일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 답지않은 기사를 싣는다. 돈의문(서대문)의 철거를 의인화해서 ‘영원히 사라질 돈의문(서대문)’을 안타까워했다. 기사는 “나는 1421년(세종 3년) 팔도장정 30만명의 손으로 탄생한 성문 8곳, 즉 8형제 중 둘째되는 돈의문이다”로 시작된다. “이름 덕분에 몇백년 먹어도 갓난아이처럼 ‘새문 새문’소리를 듣더니…여러분과 인연이 끝나 경매되어 팔린답니다…조국에 변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나도 국가의 간성(干城)노릇을 해서 성밑에 몰려드는 적군의 탄환과 화살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지엄하게 한성의 서편을 지켰는데 다만 경매 몇푼에….” 돈의문 철거소식을 의인화해서 알린 매일신보 1915년 3월4일자. ‘나는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으로 철거..
관통도로에 일왕연호 '소화'까지…일제의 종묘 훼손 증거 나왔다 ‘소화(昭和) 8년 3월 개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당인 종묘(사적 제125호)의 외곽담장에는 국권침탈의 뼈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조선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국가사당에 일본 왕(히로히토·裕仁)의 연호인 ‘소화(昭和·1926~89)’ 글자를 새긴 것이 9개나 된다. 그런데 이 일본 왕의 연호인 ‘소화’ 명문이 일제가 1932년 종묘~창덕궁·창경궁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종묘담장을 개축하고 새긴 모욕의 상징이라는 추정이 나왔다.종묘 외곽담장에 새겨진 일왕 히로히토(재위 1926~1989년)연호. 소화(쇼와·昭和) 8년은 1933년에 해당된다.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지나는 관통도로를 뚫은 뒤 훼손된 담장을 수리한 증거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궁능사업본부 종묘관리소 제문화재청 궁..
내시가 조성한 정원, 과연 문화재의 가치가 있을까 ‘새롭게 밝혀진 내시의 별장, 문화재 가치가 있는가.’ 최근들어 조선조 철종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자 의친왕의 별궁으로 ‘200년 조선의 비밀정원’이라는 이유를 들어 명승(제35호)으로 지정된(1992년) 성락원(서울 성북동)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 결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1983년과 92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는 애초부터 없었는데, 문화재관리국이 성락원 소유자의 근거없는 주장을 검증없이 받아들였다는 비..
'가짜동요뉴스'를 퍼뜨린 일본 낭인의 소굴 '한성신보' 불매운동 ‘일이 났다 일이 났다. 이씨 가중(家中)에 일이 났다…팔장사(八壯士) 실어다가 구중궁궐 위태하니…. 백수군왕(白首君王) 섬겼으니 천명인들 보존할까…. 여전히 여송연(呂宋煙)만 찾으니 끝내 깨닫지 못하는구나. 동방예의 던져두고 서양물색(西洋物色) 그리 좋은가. 남 우스운 일 그만하고 북망산(北邙山) 돌아가오.’ 작자를 알수 없는 소설 은 1896년 한성신보에 연재된 소설 ‘남준여걸’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사진은 ‘남준여걸’이 실린 한성신보 지면. |김준형 부산교대 교수 제공■가짜동요의 파문 1896년(고종 33년) 4월19일 서울에서 발행되던 일본계 신문 한성신보는 망측한 동요를 소개한다. ‘신문사 직원이 어떤 아린아이에게 들은 동요였다’는 것이다. 동요의 내용은 망측했다. 요컨대 “백수..
광개토대왕의 남침에 전전긍긍하던 시기의 한성백제군의 막사가 발견됐다 한성백제군의 내무반인가. 최근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 내에서 확인된 주거지 6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을 막기위한 한성백제군의 전방사령부 막사로 추정된다. 지난 4월부터 산성을 정밀조사해온 발굴조사기관(금강문화유산연구원)은 “성 내부에서 총 6기의 주거지가 성벽과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면서 “유구의 형태로 보아 군사들의 거주용 막사인 군막일 가능성이 짙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 건물지들은 암반 위에 조성됐고, 성벽에 매우 가깝게 붙여 열을 지어 있었다. 또한 구들시설을 구축해서 계절에 관계없이 취사와 난방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연구원측은 “축조하기 어려운 암반 위에 사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건물을 열을 지어 축조했다”면서 “성벽에 붙여 조성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이..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고분…담로제의 흔적?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이 나타난 것일까.’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관(독널)을 묻은 묘제를 일컫는다. 옹관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문화권임을 상징하는 묘제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형옹관의 핵심분포권인 반남고분군 인근에 옹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고분이 버티고 있다. 나주 송제리고분 돌방에서 수습한 은제관식과 하단 고정 못. 6세기 전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복식(옷과 장식)인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전혀 어울리지못한 고분 영산강 지류인 금천과 만나는 전남 나주 세지면 송제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송제리 고분이다. 예부터 ‘동산’이니 ‘고려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