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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백제의 요서경략’ 설파하면 ‘사이비’ ‘국뽕’인가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희대의 기현상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백제의 요서(遼西·랴오시) 경략’ 관련 기사이다. <송서>를 비롯해 10곳이 넘는 중국 역사서에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는데도 그저 ‘설’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통용된다. 
최근 배달된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융합고고학과)의 단행본(<백제요서경략>·서경문화사)을 읽고, 기자의 버킷리스트라 할까 예전부터 꼭 다루고 싶었던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를 쓰기로 했다. 
과문한 기자가 이 교수의 주장이 타당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교수의 책을 바탕으로 역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 관련 기사를 검토해보고, 어떤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짚어보려 한다. 

<양직공도>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 <양직공도>는 523~536년 사이 중국 남조 양나라(502~557)에 파견된 각국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사료이다. 백제사신을 설명하면서 “진나라 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고 했다.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
‘백제의 요서경략’은 백제가 한때 ‘중국의 영토 일부를 공략해서 지배했다(경략·經略)’는 뜻이다.
488년 편찬된 <송서> ‘이만열전’에 처음 소개된다.   
“백제국은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000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뿐이 아니다. 523~536년 사이 중국 남조 양나라(502~557)에 파견된 각국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에도 나온다. 즉 “진나라 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는 것이다. 
<양직공도>엔 <송서>에 기술되지 않은 ‘진(晋)나라 말’이라는 구체적인 시점이 기술됐다. 
629년 당나라 요사렴이 편찬한 <양서>는 “백제가 요서와 진평 2군을 점령한 뒤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다. 당나라 이연수가 편찬한 <남사>(송·남제·양·진 등 남조의 역사서)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역시 당나라 두우(735~812)가 편찬한 <통전>은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에 자리잡았으며…진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고 소개했다. 
북송의 사마광(1019~1086)이 1065년~1084년에 편찬한 <자치통감>은 488년 북위의 백제침공 사실을 전하면서 <남사>를 인용, ‘백제가 요서와 진평 2군 땅에 의거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송서>(488년)부터 <자치통감>(1065~1084)까지 무려 600년 가까이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가 꾸준히 중국 역사서에 등장한다. 

백제의 요서경략을 처음으로 기록한 <송서>. 488년 편찬된 <송서> ‘이만열전’에 “백제국은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000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고 설명했다.

■백제의 월주 침공 기사는? 
‘요서경략’ 뿐이 아니다. 수상쩍은 기사가 또 있다. 
940~945년 사이 편찬된 <구당서> ‘동이열전’에는 백제의 강역을 서술하면서 ‘서쪽으로는 월주에 이른다’고 했다. 백제의 서쪽 강역이 중국의 ‘절강성(浙江省·지장성) 월주’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터무니 없는 얘기가 아니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린 편지를 보라.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백제가 남으로 침공했다는 오와 월이 바로 <구당서>가 가리키는 ‘월주’ 지역이다. 

<삼국사기> ‘열전·최치원’. 최치원은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에 큰 해가 되었다”고 했다.

■안정복·정약용의 부정론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여러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과 월주 침공 등의 중국 진출 기사가 왜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설’로만 취급되는 것일까. 크게 세가지를 지목할 수 있겠다. 
첫번째는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백제의 요서경략’ 등의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요서경략’ 기사의 경우 중국 남북조 시대(420~589) 중 남조(송·제·양·진)의 역사에서 주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서>와 <북사> 등 북조(북위·북제·북주)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세번째는 백제가 경략했다는 요서지방에서 백제인의 영역임을 입증할 고고학 자료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백제의 요서경략 등 중국 진출’은 조선 후기부터 고대사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부정론’은 특히 안정복(1712~1791)과 정약용(1762~1836) 등이 개진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안정복은 “중국인들이 부여와 백제를 혼동했기 때문에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가 실렸다”면서 “이런 설은 중국인의 공상과 억측으로 제기한 것”이라 주장했다. 
정약용 역시 “‘당나라 때…백제가 요서·진평을 차지했다’는데 이것은 부여와 백제를 혼동했기 때문이며, 중국에서는 외국의 역사를 잘못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다산 정약용은 “<문헌통고>(송말 원초의 학자 마단림이 저작한 제도와 문물사 )에 ‘당나라 때…백제가 요서·진평을 차지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여와 백제를 혼동했기 때문이며, 중국에서는 외국의 역사를 잘못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실학자인 정약용의 주장에 솔깃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언급에서 기본적인 팩트가 틀렸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정약용은 ‘백제의 요서경략 시기=진나라 때’라고 기술한 중국사서와 달리 ‘당나라 때’라고 잘못 인용했다.  
아무튼 ‘부정론’은 백제의 요서경략 관련 기사가 ‘중국 사가들의 오기(誤記)’라든가, 혹은 ‘백제의 당시 국세로 보아 많은 선박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라든가 하는 논리로 이어져왔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일본에서는 부정론이 득세했다. 나카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는 “…백제가 모용씨(전연·후연)에 속한 요서를 경략했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와다 하코모토(和田博德)는 “백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요서를 백제가 경략했다는 것은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며, 처지가 궁해진 백제가 날조한 설에 중국 남조가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강변했다.

1936년 3월7일자 동아일보. 위당 정인보가 “백제는 영가의 난(307~312)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나눠진 이후 산동과 요동·요서에서 해양패권을 장악했다”면서 “시기는 전연(337~370)이 멸망하는 370년(근초고왕 25)”이라고 특정했다.

■신경준·한치윤·신채호·정인보 등의 긍정론 
하지만 안정복·정약용의 시대에도 긍정론이 만만치 않았다. 
당대의 역사학자인 신경준(1712~1781)은 ‘백제의 요서경략과 월주 진출’을 한꺼번에 거론한다. 
즉 “중국사서와 최치원의 편지 등을 종합할 때 백제는 북으로는 요서, 남으로는 월주까지 진출한 적이 있다”면서 “다만 우리 역사가 소략해서 그 일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해동역사>를 편찬한 한치윤(1765~1814)도 “진나라 때 백제가 바다 건너 북으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고, 남으로는 제나라 땅과 노나라 땅을 어지럽혔다”고 설파했다. 
신채호(1880~1936)는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근구수왕(재위 375~384) 연간’이라고 특정하면서 “근구수가 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진출해서 요서·산동·절강 등을 경략하고 광대한 토지를 장만했다”고 주장했다. 
정인보(1893~1950)는 “백제는 영가의 난(307~312)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나눠진 이후 산동과 요동·요서에서 해양패권을 장악했다”면서 “시기는 전연(337~370)이 멸망하는 370년(근초고왕 25)”이라고 특정했다. 
이후 긍정론은 안재홍(1891~1965)과 손진태(1900~?), 최남선(1890~1957), 김상기(1901~1977), 홍이섭(1914~1974), 김철준(1923~1989) 등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왼쪽)와 <동춘당집>(오른쪽). <삼국사기>는 “645년(고구려 보장왕 4)당태종을 물리친 안시성주가 천하의 호걸이었지만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매우 애석하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1000년이 훌쩍 지난 1669년(조선 현종 10) 현종이 “안시성주가 누구였냐”고 묻자 “중국 조정에서 ‘양만춘이었다’고 전했다”고 대답한다. 중국 조정의 전언으로 ‘안시성주=양만춘’임을 특정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왜 보이지 않나
그렇지만 한가지 전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삼국사기>는 왜 ‘백제의 요서경략’ 등 중국 진출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을까. 부정론자들은 바로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그런데 기자가 좀 의아하게 여기는 학계의 풍토가 있다. 언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면서 <삼국지> ‘위서·동이전’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던 학계 주류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기원 전 삼국이 건국됐다’는 <삼국사기>의 분명한 내용을 제쳐두고 ‘기원전후~기원후 300년=원삼국시대’라는 애매모호한 딱지를 붙이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반 풍납토성에서 엄청난 유물과 유구가 쏟아져 나와도 초기 백제(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의 국세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제의 요서경략 등을 두고는 왜 <삼국사기>만 거론하는가. 아전인수 혹은 견강부회가 아닐까. 

<삼국사기> 동성왕조. “488년(동성왕 10) 백제가 북위의 공격을 무찔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유목민족이라 수전(水戰)에 약한 북위가 서해바다를 건너 백제를 쳐들어올 수 있겠느냐는 부정론이 있다. 따라서 북위가 공격한 백제가 바로 요서 진평군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400년 전쟁, 장보고와 양만춘의 활약상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삼국사기>는 이도학 교수의 말마따나 날짜별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80년이나 재위한 고구려 장수왕의 ‘본기’를 보라. 80년간 사건이 기록된 해는 41년에 불과하고, 북위 등에 조공한 기록만 40여회에 이른단다. 그래서 신경준이 “우리 역사가 소략해서 (요서 경략 기록을) 잃어버렸을 뿐”이라 한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라. <삼국사기>에는 없는 전쟁기사(400년)가 보인다.
또한 최남선의 언급처럼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상은 중국이나 일본의 문헌을 통해 알려졌다. 고구려 안시성주 양만춘의 활약상은 어떤가. <삼국사기>는 ‘보장왕조’에 “당태종을 패퇴시킨 안시성주는 가히 호걸이었지만 역사에 이름이 전하지 않으니 안타깝다”는 평론을 달았다. 
그런데 조선조 현종(1659~1674) 때의 일이다. 1669년(현종 10) 열린 경연에서 “안시성주가 누구냐”는 현종의 질문에 송준길(1606~1672)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전에 윤근수(1537~1616)가 중국 조정에서 들었는데, ‘안시성주는 양만춘이었다’고 했답니다.” 
<삼국사기>에는 없었던 안시성주 이름이 ‘양만춘’으로 특정한 것이다. 단지 중국 조정의 전언에 따라…. 
만약 <삼국사기>에는 없는 기록이 거짓이거나 과장이라면 광개토대왕 비문의 전쟁기사도, 장보고의 활약상도, 양만춘의 안시성 방어 등도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한 한성기 백제의 임금들이 묻힌 것으로 짐작되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모화사상의 결과일까
또한 <삼국사기> 동성왕조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기사가 눈에 띈다. 
“488년(동성왕 10) 북위가 침입했지만 백제 군사가 물리쳤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남제서> ‘동이전·백제전’에도 “백제가 490년(동성왕 12) 침공해온 북위군을 물리쳤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 북위의 침공 기사가 심상치 않다. 본래 유목민족이었던 북위는 수전(水戰)에 매우 약했다. 
그런 북위가 서해를 횡단해서 백제를 침공할 수 있을까. 이를 두고 역사학자 안재홍은 “북위가 공격한 곳은 백제 본토가 아니라 백제가 경략했던 요서·진평군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김부식은 왜 이 요서경략 등 대륙침략 기사를 싣지 않았을까. 백제가 ‘감히’ 중국 대륙을 범한 사실을 기록할 수 없다는 모화사상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저 ‘요서경략=진(晉)나라 시대 혹은 진나라 말기’라는 모호한 연대 때문에 <본기>에 넣을 마땅한 연대나 왕대를 찾지 못한 탓일까.

석촌동 3호분은 아들(근구수왕·375~384)과 함께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346~375)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369년 근초고왕은 한수(한강)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 황색은 전통적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근초고왕이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위의 백제 침공은 요서 침공이었다”
부정론자들은 ‘백제의 요서경략’ 등의 기사가 <송서>나 <양서>, <남제서> 등 남조의 역사책에 실리고, <위서> 등 북조의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북위의 역사를 서술한 <위서>(551~559)는 편찬 당시부터 공정성을 잃었고, 누락과 개수, 수정이 잦았기 때문에 ‘더러운 역사책’(예사·穢史)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게다가 안재홍의 언급처럼 북조의 입장에서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기록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누락시킨 것이 아닐까. 중국학자인 정겸(丁謙·1843~1919)은 “백제는 후연이 멸망할 때 바닷길을 타고 습격한 곳이 요서 2군”이라면서 “요서 진평군은 백제 스스로 세웠기 때문에 진과 위의 역사서에 실리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고등학교 국사>에 실린 요서경략 등 백제의 대륙진출 관련 지도


■“중국 역사서에 실린 이유가 있을 것”
반면 남조의 역사서는 어떤가. 맨처음 ‘백제의 요서경략’ 사실을 전한 <송서>는 당대사라 할 수 있다. 
송(유송·420~479) 멸망 후 9년 만인 488년 편찬됐다. 또 <남제서> 역시 남제(479~502) 멸망 후 35년 만(537년)에 편찬됐다. 따라서 역사학자 김상기의 언급처럼 <송서>나 <남제서> 등은 당대의 기술이므로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남조에서만 기록되어 신빙성이 낮다는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는 당나라 때의 <통전>과 송나라 때의 <자치통감>에도 수록된다. 심지어 <구당서>는 한발 더 나아가 ‘백제의 서쪽 경계=월주’라고 특정한다.
만약 남조에서만 통용된 거짓이나, 착각, 혹은 과장된 기록이었다면 어떻게 600년 가까이 삭제없이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을까. 게다가 동방의 오랑캐가 중국 대륙을 호령했다는 기사가 검증없이 그 자존심 강한 중국 역사서에 실릴 수 있었을까. 이를 두고 최남선은 “엄연한 중국의 정사에, 그것도 한국을 반도국가로 낮춰보는 중국 문헌에 백제의 요서경략이 적힌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중국 동부인 강소성(장쑤성·江蘇省) 연운항(롄윈강·連雲港) 주변에서 789기의 백제계 돌방무덤이 확인됐다. 이도학 교수는 이 무덤들이 백제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시기에 조성된 백제인의 고분이라고 주장한다. ‘백제 서쪽 경계가 월주’라는 <구당서>의 기사와, “(고구려와) 백제가 오·월을 침공했다”고 한 최치원의 편지 내용 등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된 백제 유민들의 고분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이도학 교수 제공

■고고학적 조사의 한계는?
부정론자들은 또 ‘고고학적인 증거를 대보라’고 주장해왔다.
<송서>와 <양직공도>, <양서>, <남제서>, <통전> 등을 종합하면 백제가 경략한 곳은 ‘요서와 진평군’이다. <통전>은 2군의 위치를 ‘류성과 북평 사이’로 구체적으로 밝혔다. 지금의 요녕성(라오닝성·遼寧省) 조양(차오양·朝陽)~북경(베이징·北京) 구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백제의 요서경략을 입증할만할 물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요서와 진평’은 지금 엄연한 중국 땅이다. 고고학 조사와 공개, 연구 등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지난 2011년 중국 동부인 강소성(장쑤성·江蘇省) 연운항(롄윈강·連雲港) 주변에서 무려 789기의 돌방무덤(석실분)이 확인됐다. 이도학 교수는 이곳이 백제인의 해상 진출로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따라서 롄윈강의 백제계 돌방무덤은 백제 멸망 이후가 아니라 백제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시기에 조성된 백제인의 고분이라는 것이다. ‘백제 서쪽 경계가 월주’라는 <구당서>의 기사와, “(고구려와) 백제가 오·월을 침공했다”고 한 최치원의 편지 내용 등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된 백제 유민들의 고분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어떤가. 백제의 요서경략을 포함한 대륙진출설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중국의 정사에 여러 번 ‘역사적인 팩트’로 인정·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뤘다. 백제는 해상진출을 통해 일찍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칠지도, 무령왕릉, 금동대향로, 산수무늬 전돌, 왕흥사 출토 공양물 등


■요서경략에 들이대는 가혹한 잣대
1959년 국사교과서는 <구당서>를 인용해서 ‘백제가 월주(회계)로 진출해서 수천리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고 서술했고, 1974년 국사교과서는 ‘백제가 요서지역을 점령했다’는 기사를 수록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점령’이 ‘진출’로 바뀌더니 2015년 교과서부터는 ‘요서경략설’로 후퇴했다. 그마저 본문이 아니라 지도에 ‘요서지방’을 표시한 후 ‘남조 역사서에 바탕을 둔 이 주장을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서술했다.
2020년 교과서의 본문에도 요서경략의 서술은 없다. 다만 여백에 참고용으로 “백제 요서 진출은 중국의 <송서> <양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어 사실여부에 논란이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정사인 <삼국사기>에 관련 내용이 없으니 엄격해야 할 교과서 서술에는 조심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도학 교수는 “광개토대왕의 전쟁기사와, 양만춘, 장보고의 활약상 등은 <삼국사기> 등에 보이지 않아도 인정되는 이유가 뭐냐”고 반문한다. 기자가 보기에도 유독 백제의 요서경략 및 중국진출 부분을 두고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심지어 어떤 이는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을 ‘사이비’라 지칭했다.  
‘요서경략설=사이비’라면 <송서> <양서> <양직동도> <구당서> <통전> <자치통감> 등 중국의 역사서가 다 사이비이고, 신경준·한치윤·한채호·정인보·안재홍·손진태·최남선·김상기·홍이섭·김철준 같은 학자들이 모두 사이비라는 이야기인가. 주제넘는 막말이 아닐 수 없다.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풍납토성 모형도. 기원전후부터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다.  


■“5세기 역사는 고구려와 일본의 쟁탈사인가”
새삼 북조측 사서와 <삼국사기>에 없는 기록이라는 점을 들어 “(백제의 요서경략은)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날조”라고 폄훼한 와다 하카토코의 계속된 주장을 들춰본다.
“일본은…반도에 진출해서 백제·신라를 보호하고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냈다. 신라는 고구려에 붙어 일본을 배반했지만 백제는 건국~멸망 때까지 시종 일본에 의지했다.” 
와다는 이어 “5세기 형세는 북의 고구려와 남의 일본의 한반도 패권 쟁탈사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각을 갖고 있으니 백제가 요서를 경략하고, 오·월 지역을 침공했다는 기사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한가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한 왕조가 바로 백제라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369년(근초고왕 24) 근초고왕이 한수(한강)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황색은 전통적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근초고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자가 ‘사이비 국뽕 기자’ 소리를 들어도 좋다. 백제의 요서경략 등의 기사를 두고 터무니없는 거짓이라는 멋대로 딱지를 붙이고 비난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건전한 논쟁이라면 몰라도….  이기환 경향신문 역사 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