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8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뉴스가 떴다. ‘세기의 기증’으로 표현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이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았다는 소장품 1만123건(2만3000여점)이 국립중앙박물관(9797건·2만1600여점)과 국립현대미술관(1226건·1400여점)에 기증됐다.
■“유물연구에만 최소 5년 걸릴듯”
특히 기증품 중에는 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총 60건의 국가지정문화재가 포함됐다. 진경산수화의 전범이라는 <정선필 인왕제색도>(국보 216호)와 뒤늦게 진가가 드러난 <청화백자죽문각병>(국보 258호), 현존하는 고려 유일의 <고려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 단원 김홍도(1757~1806?)의 마지막 그림인 <추성부도>(보물 1393호) 등이 손꼽히는 기증품들이다.
그 뿐이 아니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비지정인 고려불화(수월관음도) 등도 있고, 공개되지 않은 유물이 상당수라 연구에만 5년 걸릴 것 같다”고 밝혔다. 지정문화재 뿐 아니라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미술의 전 시기를 아우르는 방대한 작품들이 국립박물관의 재산이 되었다는 뜻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성가 2대의 수집 국보·보물은?
궁금증이 든다. 고 이건희 회장(1942~2020)은 선친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1910~1987)와 함께 2대에 걸친 고미술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삼성가 2대’의 전체 수집품은 어느 정도일까. 필자는 좀 무식한 방법이지만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문화재검색란에서 국보(1~335호)·보물(1~2125호)을 하나하나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국보란에서는 ‘관리자=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유자=이***(이건희 회장을 일컬음)’, 혹은 ‘소유자=삼성문화재단’이라 한 것이 37건(이건희 회장 25건·삼성문화재단 12건)이었다. 고 이병철 창업주의 수집품 전체가 이미 삼성문화재단에 기증되었으므로 2대에 걸쳐 수집한 국보만 37건이 되는 셈이다.
필자는 보물의 관리·소유자도 1호부터 2125호까지 일일이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소유자=이***’ 97건, ‘소유자=삼성문화재단’ 10건, ‘소유자=홍***’(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을 지칭) 5건 등 삼성가 소유 보물은 112건으로 집계됐다. 그러니까 ‘삼성가 2대’의 수집품 중 국보(37건)·보물(112건)이 모두 149건이 되는 셈이다. 그중 이번에 40%(국보·보물 60건)를 기증한 셈이다. 이중 이병철 회장의 수집품은 이미 전체가 삼성문화재단에 기증됐기 때문에 이번 기증의 대상은 아니었다. 참고로 문화재청 검색란이 성만 표시하고 ‘이***’으로 처리한 이유가 있다. 문화재 소유자의 정보보호를 위한 것이다.
■이병철 컬렉션의 투톱
그렇다면 삼성가 2대가 수집한 국보·보물에는 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중 기증된 것들은 무엇이고, 기증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일까. 1976년 호암미술관 설립과 함께 특채되어 1995년까지 부관장 등을 역임하며 삼성가 2대의 수집을 도운 이종선씨의 단행본 <리컬렉션>(2016·김영사)을 주로 참고하며 자료를 찾는 수고를 덜었다. 이병철 창업주의 수집 문화재(호암컬렉션) 중 ‘투톱’은 ‘전 고령 가야금관 및 장신구 일괄’(이하 가야금관·국보 138호)’과 ‘청자동화연화문표주박모양 주전자’(이하 청자진사주전자·국보 133호)이다.
이중 ‘가야금관’은 이병철 회장이 하루 일과를 ‘잘 있냐’는 안부를 물으며 시작했다고 한다. 직접 금관의 부속유물들을 몸체에 붙여보며 들여다봤다고도 한다. 이 금관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병철 회장이 ‘가야금관’에 유독 집착한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이 회장에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5~6세기)보다 수백년 앞선 최초의 금관”이라고 귀띔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 회장은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았다. 이 금관의 실제연대를 밝힌 이는 며칠동안 눈흘김을 당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회장과 가까웠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고고학과)마저도 가야금관을 두고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소장자의 주장이 워낙 강해 입도 벙긋 못했다는 것이다.
■가야금관에 ‘집착’한 이유
어떻든 국보 138호 ‘가야금관’은 대가야 전성기인 6세기 전반 조성된 고령 지산동 44호나 45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금관이 출(出)자 모양이지만 이 가야금관은 풀잎 모양의 장식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그런데 이 금관이 지금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짙다. 이 무슨 말인가.
‘가야 금관’의 원래 국보지명 명칭(전 고령출토 가야금관 및 장신구 일괄)을 보라. 금관은 다른 금제 장식(4점)과 금고리, 드리개(금제수식) 등의 장신구와 함께 전해졌다. 김원룡 교수는 “가야금관에 달아놓은 굽은옥은 ‘호암(이병철)컬렉션’이 들어간 후에 조립된 인상이 짙다”고 전한바 있다.
1991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신분으로 가야 특별전에 출품된 가야금관을 들여다본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의 해석이 흥미롭다. 함 관장은 아예 “지금의 가야금관이 진짜 원모습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가야 금관이 삼국시대에 사용된 조립방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 관장은 “함께 전해지는 금제 장식 및 유물들이 원래 가야금관에 달려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고 해석한다. 만약 그렇다면 국보 138호는 지금보다 훨씬 화려한 가야금관일 수 있다. 문화재청 유물 설명에서도 “함께 전해지는 부속품들이 금관의 어느 부분에 어떤 모양으로 붙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백지수표설의 진실은?
‘호암(이병철 회장의 호) 컬렉션’의 투톱 중 다른 한 건은 국보 133호 청자진사주전자다. 이병철 창업주의 ‘주전자’ 사랑은 끔찍했다.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을 위해 2층 전시실을 마련하면서 30㎜ 방탄유리로 쇼케이스를 만든 것도 바로 이 주전자 때문이었다. 진사(辰砂)는 약제로도, 안료로도 쓰이는 수은 황화물(HgS)의 광석이다. 그런데 진사 안료는 고온에서 급작스럽게 휘발된다. 따라서 고난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하다.
이병철 회장은 가뜩이나 색깔이 미려한 청자의 겉면에 진사가 듬뿍 발린 이 주전자를 특별히 사랑했다. 특히 진사기법이 중국보다 수백년 앞서 있다는 학계의 주장에 이 회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해맑은 미소를 띄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이 국보 133호 청자진사주전자를 수중에 넣게 된 것에는 두가지 설이 떠돈다. 하나는 이 회장이 1970년대초 일본 오사카(大阪)국립박물관의 경매전시 소식을 듣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오라”는 특명을 내렸고, 마침내 거금 350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는 설이다.
또하나는 ‘백지수표’ 설이다. 이 주전자는 1963년 강화도에서 도굴된 유물 중 한 점으로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도굴품 일괄을 사들인 인물이 다른 도굴품들은 이리저리 팔아넘겼지만 이 주전자만큼은 공소시효(10년)를 비켜가기 위해 비밀리에 소장하고 있었다는 설이다.
결국 업계에 소문이 돌았고,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이 탐을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 총장은 마침 미국 워싱턴 프리어갤러리가 소장한 뚜껑없는 진사주전자와 비교해보려고 미국을 방문했다. 김 총장으로서는 이것이 천추의 한이 됐다. 김 총장이 미국에 간 사이 거간인 장 아무개가 주전자의 존재를 이 회장에게 알렸고, 이 회장은 군소리 없이 구입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 회장이 백지수표를 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반출 고려 불화의 환수 비화
이병철 회장이 사랑한 또다른 도자기는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매병’(보물 558호)이다. 이 회장은 1976년 일본경제신문 기고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유물은 청자진사주전자나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매병”이라면서 “두 작품은 고려청자 중에서 최고의 명품임을 스스로 인정할 정도”라고 자랑한 바 있다. 흠없고 때깔이 좋은 작품을 주로 찾았던 이병철 회장 기호에 맞는 작품들이었다.
국보 218호 ‘아미타삼존도’는 해외에서 최초로 정식 수입한 고려 국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정은 파란만장했다. 즉 1979년 일본 나라(奈良)시 박물관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서 경매를 겸한 고려불화 전시회가 열렸다. 그러나 주최측에서는 갑자기 한국에는 고려불화를 팔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민의 반일감정을 자극할까 두려웠음에 틀림없었다. 결국 이병철 회장은 미국의 삼성물산 지사를 동원하여 구입비선을 만든 뒤 이 불화를 비밀리에 구입했다. 그렇게 사들인 <아미타삼존불>과 <지장도> 등 불화 두 점이 우여곡절 끝에 국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밖에 단원 김홍도의 31살 작품인 <군선도 병풍>(국보 139호)과 국내 유일의 급속제 탑인 금동대탑(국보 213호), 가짜로 몰릴 뻔했다가 일약 국보로 떠오른 신라사경(국보 196호), 고려금속공예의 극치인 청동은입사향완(국보 214호) 등이 ‘호암 수집품’이다. 이병철 창업주는 그렇게 수집한 문화유물 전체를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했다. 따라서 이번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에서는 빠졌다.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의 가동
그렇다면 ‘이건희 컬렉션’은 어떨까. 이종선씨의 단행본(<리컬렉션>)에는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소개된다. 즉 1980~90년대 이건희 회장이 추진한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다. 이 회장은 “명품 1점이 다른 수집품들의 가치를 올려준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종선씨는 그것을 ‘명품주의’라 했다.
이종선 씨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의 국보 수집은 이병철 창업주와 의논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호암미술관과도 별개로 진행됐고, 이미 개인수집가들로부터 국보급 문화재를 인수·소장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 유물이 <정선 필 인왕제색도>(국보 216호)와 <금강전도>(국보 217호)이다. 이번에 기증된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1676~1759)이 76살 때인 1751년(영조 27)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중국의 산수화를 그린 관념산수화와 달리 조선의 경치를, 조선의 화법으로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번 기증에는 빠진 <금강전도>는 1734년(영조 10) 정선이 내금강의 실경을 그린 작품이다. 역시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며, 정선의 금강산 그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작품이다.
■반가사유상의 할아버지 ‘고구려 반가상’의 수집
이건희 회장의 본격적인 국보 수집은 국보 118호 <고구려반가사유상>의 인수부터 시작됐다. 이 불상은 가장 오래된 원조 반가사유상으로 꼽힌다. 국보 중 국보로 꼽히는 83호와 78호 반가사유상과, 일본이 자랑하는 국보 1호(목조부문) 고류지(光隆寺)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의 할아버지 뻘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반가사유상은 1940년 평양에서 골동품상을 운영하던 고 김동현이 일본 병기창에서 근무중인 조선인 막노동꾼에게서 기와집 세채값인 6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대폿값이라도 벌려고 명문 고구려 기왓장과 흙투성이의 반가상을 판 막노동꾼은 팔자를 고쳤다.
김동현은 이후 이 반가상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방대한 한국문화재를 쓸다시피한 대구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당시 기와집 250채 값인 50만원을 제시했지만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기와집 한 채 가격이 10억원이라도 250채값이면 2500억원이 아닌가. 흥정이 불가능해지자 오구라는 “내가 수집한 금속유물 전부와 반가상을 바꾸자”는 제안까지 했지만 김동현은 일언반구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동현은 훗날 종지에 담긴 간장을 유일한 반찬으로 삼고 사는 등 지독한 생활고를 겪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고구려반가상과 삼존불상 등 수집 유물만큼은 비싼 보관료를 지불하고 은행금고에 보관했다. 유물을 팔아 팔자를 고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건강이 악화되자 소장 유물들의 ‘그 후’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단다. 결국 김동현 소장 유물들은 삼성가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1990년대 초 마지막으로 고구려 반가상과 삼존불상은 ‘이건희 컬렉션’이 되었다.
■청자마니아와 백자마니아
이병철 창업주가 ‘청자 마니아’라면 이건희 회장은 ‘백자 마니아’였다. 이중 이건희 회장이 출근길에 아파트 여러 채 값을 결제 처리했다는 백자가 바로 국보 309호 <백자 달항아리>다. 이 달항아리는 조화롭고, 풍만하면서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전형적인 조선 중기 백자 호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다.
이건희 회장은 청화백자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청화백자는 아랍산 푸른 안료(코발트)를 써서 만든 최상급 백자다. 이중 국보 219호 <청화백자매죽문호(항아리)>는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가짜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출처가 불분명한데다 작품이 너무 깨끗했기 때문에 “15~16세기 작품일리 없다”는 쑥덕공론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논쟁이 끝났다. 1976년 종로구 관철동 부근 지하철 공사장에서 이 청화백자와 비슷한 모양의 백자 어깨 파편이 출토된 것이다. 결국 이 백자는 1984년 국보로 지정됐다.
이번에 기증된 국보 258호 <청화백자죽문각병>도 나중에 진면목을 찾은 작품이다. 대나무 문양도, 모깎이를 한 각병의 모양이 특이했지만 정처없이 임자를 찾아 떠돌다가 이건희 회장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백자는 결국 1991년 1월 국보로 지정됐다.
■유물 사진만으로 구입 결정
조선초 문인화가인 이암(1499~?)의 <화조구자도>(보물 1392호)는 유물 사진만 보고 구입을 결정한 작품이란다. 일본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인데, 1980년대 후반 일본인 거간이 <화조구자도> 사진을 가져왔다. 당시 일본에 반출되어있던 작품 중 일부가 북한 김일성 컬렉션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종선씨는 “계약금만 받으면 <화조구자도>의 실물을 빌려오겠다”는 일본인 거간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했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이건희 회장은 “그러라”고 승락했다. 결국 꽃과 강아지, 새를 그린 이암의 <화조구자도>는 국내전문가의 실물 확인 및 감정을 거쳐 구입환수됐고 보물로 지정됐다. 이암의 작품 중 <모견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고양이를 함께 그린 <화조구묘도>는 북한 평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밖에 조선 초중반의 화가 김시(1524∼1593)의 산수 인물화인 <동자견려도>(보물 783호)와 1440년(세종 22년) 제작됐다는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 상감 ‘정통5년’명 어문 반형 묘지>(보물 577호), 12세기 명품 청자인 <양각죽절문병>(국보 169호) 등이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구입했다.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자 국보(37건)·보물(112건) 등 국가지정문화재(149건)는 선친(이병철 회장)이 수집한 국보(12건)·보물(9건)의 7배가 됐다. 이번에 국보·보물 60건(국보 14건·보물 46건)을 기증했지만 아직도 삼성가엔 89건의 국보·보물이 남아있는 셈이다.
■“문화재 상속세는 없다”
이번 기증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문화부 기자 입장에서 정치적인 배경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현행법상 삼성측이 소장품과 관련된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지정문화재(국보·보물 등)의 경우 문화재보호법 제12조에 따라 비과세 대상이다. 또 문화재보호법 16조에 따라 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의 경우 상속세 과세가액에 산입되지 않는다. 또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13조를 보면 박물관·미술관 등에 전시·보관 중인 박물관 및 미술관 자료는 상속세의 징수가 유예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병철 컬렉션’이든 ‘이건희 컬렉션’이든 사실상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미술품도 마찬가지다. 리움 미술관 혹은 호암미술관에 보관·전시되는 한 상속세 징수는 유예된다.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의 새 과제?
필자는 삼성가의 유물 수집을 곁에서 도운 이종선씨의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지금 일본 뎬리대에 소장된 안견(생몰년 미상)의 ‘몽유도원도’를 만약 구입 환수할 수 있다면 이건희 회장의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의 백미가 될 것”이라는 언급이다. 이종선씨가 단행본(<리컬렉션>)을 낼 때는 이건희 회장 생전이고, 또 이미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가 완수된 후였다. 그럼에도 ‘몽유도원도’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기증으로 삼성가의 국보 보물수가 89건으로 줄었다.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가 다시 미달된 셈이다. 이 프로젝트를 재가동하고 만약 ‘몽유도원도’ 단 한 점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 프로젝트는 100%가 아니라 1000% 완수하는 셈이 되지 않을까.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건을 살펴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프로젝트는 삼성만의 것이 될 수는 없겠지만…. 경향신문 역사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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