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제강점기 문화재지정 관련 자료를 들춰보다가 뭔가 이상한 대목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가 1935년 서울 독립문을 고적(제58호)로 지정했다는 기사인데요. 그것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이마이타 기요노리(今井田淸德)가 주재하는 회의에서 확정했다는 겁니다.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한 이유
그 뿐이 아닙니다. 그보다 8~9년 전에는 독립문이 방치되어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는데요. 이때 “이 참에 헐어버리자”는 의견도 개진됩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41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나섭니다. 어째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독립문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야 할 일제가 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나서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천세에 남을 문화재’로 지정했던 걸까요.
또 하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1924년 7월15일자 동아일보를 봅시다.
“교북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이건 또 무슨 얘깁니까. ‘독립문’ 편액의 글씨가 매국노 중 매국노인 이완용(1858~1926)의 작품이라는 거죠. 뭐 일각에서는 필체로 보면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김가진 선생(1846~1922)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그러나 명백한 물증이 나오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죠.
독립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1896년 6월20일자 독립신문에 등장하는 ‘독립문의 설립취지’를 읽으면 뭔가 단서가 잡힙니다.
“폐하(고종)께서 청나라 임금보다 낮은 곳에 계셨는데…. 일본과 청국의 싸움 끝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모화관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세계만방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표방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독립’의 본질이 보이죠. 즉 청나라’, 즉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 겁니다.
그때만 해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독립신문 논설은 오히려 ‘일본=조선의 독립을 도운 나라’로 표현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이 조선을 위해 한다는 뜻을 자세히 모른다… 일본이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의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조선 백성이 일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1896년 4월7일)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죠. 아무튼 그해(1896년) 14일 뒤인 7월4일 독립협회 창립총회가 열리는데요.
이때 임원 명단을 봅시다. 의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위원은 이윤용·김가진·김종한·권재형·고영희·민상호·이채연·이상재·현흥택·김각현·이근호·남궁억 등이었는데요.
이중 이완용(1858~1926) 등 상당수는 훗날 한일병합의 공로를 이유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거액을 받은 친일파로 전락합니다.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활동했던 서재필(1864~1951)은 고문역을 맡아 ‘파리 개선문식 독립문’의 건립을 기획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독립협회의 결성 이유가 독립문을 포함한 독립공원 건립과,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었다는 겁니다.
발기인 가운데 이완용·이윤용(1854~1939) 형제가 가장 많은 100원씩 200원을 냈습니다. 독립협회에서 이완용의 지분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죠. 만약 독립문 편액의 장본인이 이완용이었다면, 그로서는 독립문의 편액을 쓸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가장 많은 돈을 낸 이완용 형제
이완용은 급기야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이 됩니다.
이 무렵 이완용을 바라보는 독립신문의 논조는 한없이 우호적입니다. 교체설이 나돌 때마다 ‘시기질투 때문’이라고 비호해줍니다. 1897년 11월 11일 논설을 봅시다.
“리완용 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네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안가는 재상으로 알고….”
이완용 뿐이 아닙니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두고 “이등박문씨(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는 세계에 가장 유명한 정치가요. 또 대한 독립한 사업에 큰 공이 있는 사람”(1898년 8월20일)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잘못 본 거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독립협회는 유람차 서울을 방문한 이토를 영접하기 위해 협회 총대위원 3명을 용산으로 내보냅니다.
8월31일자는 “이등박문이 안경을 잃었다고 하는데 귀한 손님이 안경을 잃은 것은 우리의 수치”라고 한탄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경을 잃어버린 것을 조선의 수치라 한겁니다.
■대대적인 모금운동 펼쳐
아무튼 독립협회는 독립문의 건립을 위해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펼칩니다.
독립문 건설을 위한 독립협회 결성식을 보도한 독립신문 1896년 7월4일자를 볼까요.
“심지어 막벌이꾼이라도…돈 낸 사람의 이름을 신문에 내고, 또 나무패에 써서 독립문을 건립하고 나면 붙일 것이다. 돈 2만원을 모으면 석탑을 세우고 석탑에 이름들을 새길 것이다. 누구든지 조선의 독립을 경사로이 여기면…보조금을 조선은행소로 보내기를 바라노라,”
초반에는 백성들의 호응도 대단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나이와 계집…빈부를 막론하고 기부하는데 하물며 병정들이야. 각 지방의 하사·병졸들도 기부하겠다고 나섰다”(8월18일)고 합니다.
미국 유학 중이던 조선 사람이 독립문 건립소식을 이역만리에서 전해듣고는 금화 3원(은전 5원85전)을 기탁했다는 미담을 소개합니다.(10월24일) 독립문 건립의 열기가 이어지자 황태자(순종)가 1000원을 하사하고 각부 내각 대신들도 100원 이상씩 갹출하기도 했습니다.(12월 5일)
1896년 12월31일자는 “독립협회는 처음에 불과 5명부터 시작했지만 지금 기부금을 낸 회원만 근 2000명에 달한다”고 자랑했습니다.
초반 열기에 힘입어 9월16일 독립문 건립을 위한 첫삽을 떴습니다. 두 달 여 뒤인 11월22일 5000~6000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정초식(주춧돌을 올리는 일을 기념하는 식)이 열렸습니다. 이 때 외부대신이자 독립협회 위원장인 이완용이 ‘조선 전장이 어떠할꼬’라는 주제로 했다는 연설이 의미심장합니다.
“조선이 독립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터요, 합심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해치면 펄낸(폴란드)와 같이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조선은…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이완용이 이때까지 친미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완용이 14년 후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의 거두가 된거죠. 이완용이 선택한 길은 폴란드도, 미국도 아니고, 결국 일본이었던 겁니다.
■공사비 부족에 시달린 독립문 건설
그런데 건립 초기에 반짝 했던 독립문 공사는 난항에 빠집니다.
대대적으로 펼쳐진 기공식과 달리 독립문의 준공날짜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저 여러 문헌을 토대로 1897년 11월 20일 쯤에 준공이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 자금난 때문이었습니다.
독립신문 1898년 1월 18일자에 이유가 나옵니다.
“독립문 준공에 들어간 돈이 3825원인데, 독립문을 만든 기사 심의석씨가 자기 돈을 근 1000원 들여 문을 완공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지불하지 못한 돈이 1000여원이다. 음력설 전에 지불해야 하는데….”
이후 독립신문은 여러차례 “제발 성금 좀 내달라”는 독촉 기사(사고)를 냅니다.
“독립문 지은 돈이 부족합니다. 각자의 형편대로 독립협회 사무소로 가져 오시오. 건립비용을 충당하는 일에 영화롭게 쓸 일이요.”(1898년 1월20·22·29일…) “독립문·독립관·독립원은 대한 동포의 보조금으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을 내외국민이 다 아는 바이거늘…. 독립문이 준공됐는데도 비용부족으로 공사비를 충당하지 못하니 어찌 개탄하지 않으리오.”(1898년 4~9월)
1898년 1~9월 사이 시쳇말로 성금독촉기사를 대충 세어보니 50여회에 이릅니다.
그래도 모금이 여의치 않자 어느 독자의 기부 편지까지 제재합니다.
“김포군 박용희씨가 기부금 2원을 보내면서 본사에 편지하기를…‘독립문은 대황제 폐하를 위한 문인데…공사비가 많이 부족하다니…외국사람들이 보기에도 수치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 독자 편지에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굴지의 대기업이 수십억원씩 턱턱 내는 것도 아니고, 당대에는 누구도 먹고살기도 급급한 백성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백성들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한계가 있었겠죠. 게다가 이 독자의 말처럼 ‘대황제폐하를 위한 문’이지 ‘백성들의 먹을 것이 들어오는 문’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공사대금을 갹출하기가 매우 힘들었겠죠. 결국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등 서재필 등이 거창하게 그렸던 독립문 조성계획은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 상징으로
그러나 출발이 어떻든간에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잃은 이후 독립문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탈바꿈합니다. 미국 하와이 동포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는 1913년 8월27일 경술국치를 기억하려는 삽화에서 독립문을 그려넣었는데요.
“독립문아! 너로구나…빈터만 남았구나. 잠시 욕을 슬퍼마라. 동경성을 깨뜨린 후에 개선문을 지으리라.”
1919년 3·1운동 때는 누군가가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은 일도 있었답니다. 당시 그 높다란 독립문(높이 14.28m, 너비 11.48m)에 태극기를 꽂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면서 ‘도깨비 짓’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답니다.
화들짝 놀란 일본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해서 태극기를 뽑아냈습니다. 일제는 그 참에 소방펌프를 뿌려대 원래부터 새겨져 있던 태극기의 색채를 지워버렸답니다.(동아일보 1925년 9월16일)
독립문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1924년 9월3일 동아일보는 ‘부랑자의 변소’로 전락한 독립문을 개탄하는 독자투고를 게재하면서 “독립문의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힌다. 올라가는 층대는 무지한의 변소가 됐고, 위층부터 불시에 붕괴될 것 같다”고 전합니다.
저는 1935년 독립문과 함께 고적으로 지정된 태방군 태수 ‘장무이(중국인)의 고분’(서기 288년)이 영 거슬립니다. 중국인의 무덤을 일제가 굳이 문화재로 지정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외세(중국)의 지배에 허우적댄 조선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독립문은 어떨까요. 조선이 ‘일본의 도움으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상징물로 여겼을 겁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은 곧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로 이어지죠. 그것이 훗날 일제가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한 이유가 아닐까요.
그러니 독립문에 걸려있는 편액이 진정 이완용의 글씨라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김가진 선생의 작품이라는 자료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설혹 이완용의 작품이라도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독립문에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 친일파의 체취만 남아있는게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자강독립을 꿈꾸며 손에 손에 1원씩 1전씩 들고온 이름없는 백성들의 넋도 담겨 있으니까요. 소학교 학생과 시장 상인, 심지어는 군인과 기생, 미국 유학생까지 수많은 장삼이사가 성금대열에 합류했다죠. 그들은 독립문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으로 여겼을 겁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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