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건….” 1991년 3월 26일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찾은 국립광주박물관 조사팀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분의 원형부 서쪽에 드러난 도굴구덩이가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 도굴구덩이는 불과 며칠 전에 판 흔적이 분명했다.
“팠다가 다시 메운 구멍에는 부러뜨린 소나무 가지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갓 베어진 소나무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는 약간의 철기 부스러기와 도자(刀子·작은 칼)편이 흩어져 있었습니다.”(성낙준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회고)
■생생한 도굴 흔적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도굴 흔적이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강도높은 검찰 수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관람객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에 포장상자를 잠시 맡겨놓고는 사라졌다. 맡긴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그 포장상자를 뜯어보니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철기류’ 였다. 도굴범들은 2년 6개월 뒤인 1993년 9월 검거됐다.
그러나 이미 도굴품 중 상태가 좋은 65점은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뒤였다. 당시 신문은 ‘신덕고분은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이며, 도굴범이 팔아치운 유물 중 5~6점은 국보급’이라고 소개했다.
■처음 조사된 일본식 고분
검찰수사와는 별도로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4월부터 40여일간 본격 발굴을 펼쳤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발굴이 마무리되면 학술자료 축적을 위해 발굴조사보고서를 펴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국립광주박물관은 고심 끝에 신덕고분의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보고용 행정보고서만 만들었을 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공식 조사된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한다. ‘앞은 네모나고’(前方) ‘뒤는 둥근’(後圓) 형태라 해서 이름붙은 무덤(墳)이다. 한국에서는 ‘장고’와 닮았다고 해서 ‘장고분(長鼓墳)’이라 한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일왕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 사망한 닌토쿠(仁德) 일왕의 무덤이다.
■터부시된 장고분 논쟁
신덕고분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일부가 전남 나주 덕산리와 신촌리 등의 고분 중에 장고분(전방후원분)과 유사한 고분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국내학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1972년 윤세영 고려대 박물관 주임과 황용훈 경희대 교수 등이 “충남 부여에 장고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긴급 문화재위원회가 소집되어 윤세영·황용훈 두 사람의 발표를 청취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허황된 이야기니만큼 발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983년 6월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한발 더 나간다.
“경남 고성 등과, 전남 나주·영암·무안·함평 등 여러 곳에서 장고분이 보인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강교수의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강교수가 거론한 고분 중 가야 지역에 존재한 고성 송학동 1호분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물론 강교수는 “‘전방후원분’(장고분)은 일본의 고유묘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학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주로 원로학자들은 일왕 가계의 것으로 신성시되는 무덤형태가 한반도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한반도 장고분’을 임나일본부와 연결짓는 이들이 생겼다. 일부 소장파는 장고분이 특히 고성 등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강교수의 주장에 흥분했다. 이거야말로 임나일본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후 전남 해남의 장고산 고분과 용두마을의 말무덤고분 등 장고형 고분의 존재가 계속 알려졌다.
반전의 과정도 있었다. 1970년대 ‘장고분’ 논쟁의 출발점이 된 충남 부여의 ‘추정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1호분도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최종 판명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속속 알려진 장고분은 학계로서는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자칫 임나일본부의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색 고분의 충격
그런 상황에서 또하나의 장고분으로 알려진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된 것이다.
과연 일본의 고분형식이라는 장고분이 맞았다. 무덤 내부에서도 일본색이 보였다. 천정과 4벽, 문의 안쪽에 모두 주칠(朱漆)이 되어 있었다. 빨갛게 칠했다는 얘기다. 출토된 대형 칼의 경우 손잡이 구멍이 일본 후나야마(구마모토현·熊本縣) 고분의 유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쓰인 금송제 관의 흔적이 보였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파편도 여러점 출토됐다.
국내에서 처음 내부구조가 밝혀진 일본식 장고분인 것도 모자라 대단한 위상까지 갖췄다니…. 아니 그런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다는 것인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발굴조사를 맡은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쉬쉬하며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뭐 시쳇말로 두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 연구자가 전무한 형편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덜컥 보고서를 냈다가 일본 학계에 이용만 당할 수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가 있다.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1면 주요기사가 눈에 띄었다.
“한국 광주의 명화동 고분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
기사는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장고분인 명화동 고분의 주위에 50㎝ 간격으로 원통형 토기가 세워져 있다는 것에 주목한 기사다. 원통형 토기(하니와)는 고분 주위에 세운 토기로 일본식으로 알려진 무덤조성방식이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보도 된 다음날(21일) 명화동 고분을 발굴한 국립광주박물관은 큰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전화를 걸어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냐”면서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주문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거리가 생겼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언론이 주요 기사로 다뤘으니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속속 확인되는 장고분의 존재
이후 신덕 및 명화동 고분 뿐이 아니라 전남 영암 자라봉, 함평 장고산, 영광 월산리,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됐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였던 것이다. 그것도 5세기말~6세기초까지 딱 50여년간….
장고분 발굴이 이어져 자료가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 또한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백제인(혹은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학계는 “네모 지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 자생설을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이 주구묘가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한국과 가까운 규슈(九州)에서는 고훈(古墳) 시대(3세기 중반~7세기) 초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원 전후에 조성된 주구묘(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한반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 만약 주구묘가 장고분의 전신이라면 외려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14기만 확인됐지만 일본 전역에는 2,000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반짝(5세기말~6세기초)했지만 일본에서 300년 넘게 대유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 일본인?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5세기말 6세기초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왜(일본 규슈 지방)와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묘제(장고분)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5세기 말이라면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국세가 약화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마한 출신 토착세력이 왜의 묘제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또는 영산강 유역에 살고 있다가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 관료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도 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들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의 신분이 되어 본향(전남)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백제인이든 마한 출신이든)이라면 원천적으로 임나일본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는 4세기말~6세기초까지 2세기 가량 한반도 남부에 경영했다는 식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고분은 50년여간 반짝 유행했다. 그것도 겨우 14기 정도만 확인된다.
이 정도로는 왜가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주무대인 영남 지방에서 장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백제가 외국인 채용 방침에 따라 조정에 출사시킨 왜인의 무덤이라 해도 임나일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촌스러워진 국적논쟁
최근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1991년 기껏 조사해놓고도 ‘쉬쉬’하며 보고용 행정보고서로 만족해야 했던 신덕고분 발굴보고서가 30년만에 발간됐다. 이에 발맞춰 10월24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라는 제목으로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 장고분을 다룬바 있다.
당시 몇몇 연구자가 복사본으로 갖고있던 행정보고서를 입수해서 그걸 토대로 학계의 입장을 취재한 바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신덕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의 발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필자는 보고서에 실릴 한·일 연구자들의 논문을 미리 받아보고 20년 남짓만에 장고분 공부를 다시 해봤다. 그런데 기원 및 국적논쟁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딴은 그렇다. 무령왕릉처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국적 논쟁은 영영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장고분 주인공의 국적을 따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학계의 분위기도 달라진 것도 같다.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고 국적을 딱 잘라 주장하는 것을 약간 촌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보고서 논고 가운데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글(‘신덕고분의 분구와 석실’)은 “신덕고분은 일단 왜의 규슈(九州) 세력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서술했다. 고분 형태나 매장시설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 주위를 두른 도랑(주구)과 돌뚜껑을 덮은 무덤길 항아리, 띠모양으로 얇게 깐 돌(즙석), 원통형 토기(하니와)를 두르지 않은 점 등은 또 전형적인 일본식이 아니다.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 등은 백제 중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어떤가.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고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을 왜계와 백제계, 왜+백제계, 재지계(마한 출신 토착세력) 등으로 도식화했다.
다카타에 따르면 왜계는 장고형 분구와 규슈계 돌방, 그리고 꼰 모양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등이다. 백제계는 장식 목관과 말갖춤새 세트, 구슬류와 신발 등의 장신구, 그리고 목관의 안치방식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왜+백제’는 금동관과 은제장식, 삼각형 철모(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무기) 등이다. 이밖에 무덤길 제사에 사용된 토기류는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요소가 보인다.
그러나 다카타의 견해 중 금동관의 경우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라는 견해(이한상 대전대 교수)도 있다.
게다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도굴범이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중국제 자기와 초두(조리기구·솥)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일 3국의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아직 회수되지 않은 신덕고분 유물들
비단 신덕고분만이 아니다. 고분을 구성하는 이런 복잡한 속성이야말로 영산강유역 ‘장고분’ 뿐 아니라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정촌고분 등 토착세력의 고분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분석한 다카다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특정 정치체의 정치·경제적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마무리했다.
당시 영산강 유역 사회의 다각적인 대외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만에 펴내는 보고서 내용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한국인이라는 거냐, 일본인이라는 거냐 분명하게 언급하라고 채근한다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5세기 말~6세기 전반 영산강 일원은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을 방문한 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을 보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무덤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또한 ‘외국인 우대정책’을 편 백제의 조정에 출사해서 백제 관료 혹은 귀족이 된 왜인의 무덤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지금 이 순간의 민족 감정으로 1400년 전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
또하나, 검거된 신덕고분의 도굴범들은 도굴품 중 최상품 65점을 팔아넘겼다고 진술했다.
수사과정에서 국보급 유물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점 당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판 유물들은 3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굴품인줄 알고도 사들였다면 그것은 장물이 분명하다.
물론 몇단계를 거쳐 유통되었다면 지금 소장자는 도굴품인지도 모르고 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선의취득’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굴품은 이제 유통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안에 떨면서 그와같은 도굴품을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신덕고분 도굴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1991년 도굴범이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 갖다놓았던 전례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1400년전의 수수께끼 같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 작성을 위해 박경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권오영 서울대·이한상 대전대·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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