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 뭔줄 아시죠. 1980년 11월 정규 편성된 KBS ‘전국노래자랑’입니다. ‘전국노래자랑’은 ‘최장수’ 타이틀도 갖고 있지만 이른바 ‘시민 참여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라 할 수 있다는데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비조(鼻祖)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557년전 전국노래자랑
1466년(세조 12) 윤3월14일자 <세조실록>을 볼까요. 세조는 이 무렵 중창된 평창 상원사의 낙성식에 참석할 겸 금강산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요. 강릉에 거둥한 세조가 특별한 영을 내립니다.
“농가를 잘 부르는 농민들을 모아 장막 안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는 겁니다. <세조실록>은 이때의 경연에서 1등을 차지한 자는 강원도 양양의 관노 ‘동구리’였다고 전했습니다.
국왕이 주최하고, 직접 관람 했으며, 점수까지 매긴 명실상부한 ‘제1회 전국노래자랑’ 펼쳐진 겁니다.
나랏님이 주최한 대회였으니만큼 아무나 출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역예선을 통과한 사람들끼리 치른 결선대회였을 겁니다. 우승자 특전도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경연 우승자인) 동구리에게 임금이 친히 아침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한편 악공의 예로 왕의 행차를 따르게 했다. 그에게 저고리 1령을 내려주었다.”
관노 출신의 가수(동구리)가 임금이 하사한 아침·저녁밥상은 물론 저고리 1령까지 받았다니 얼마나 대단한 파격입니까. 물론 동구리의 가장 큰 특전은 악공의 예, 즉 궁중가수로 발탁되어 임금을 수행했다는 겁니다.
지금 ‘전국노래자랑’이 43년째 최장수 프로그램이라죠. 그러나 알고보니 557년전, 즉 1466년 윤 3월14일 열린 ‘전국노래자랑-강원도’ 편이야말로 ‘원조 중 원조’ 였습니다. ‘동구리’야말로 경연 프로그램이 낳은 깜짝스타였고요.
■실록에 등장한 댄스여가수
동구리처럼 실록에 이름을 낸 댄스 여가수가 한 분 계십니다. 세종 연간에 활약한 설매인데요.
“1429년(세종 11) 5월16일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때 가무(歌舞)하는 여자 설매 등 8명과, 음식을 담당할 중비 등 8명, 술빚는 여자 내은이 등 2명을 보냈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7월21일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입니다.
“어린 화자(火者·환관 지망생) 송경 등 6명, 요리사 중비 등 12인, 창가녀(가수) 설매 등 8인이 사신을 따라 명나라로 떠났다”는 겁니다. ‘조선판 댄스가수’였던 설매와 관련된 일화가 문헌에 남아있습니다.
서거정(1420~1488)의 <동인시화>인데요. 즉 설매는 전악서(궁중 잔치와 의식에 필요한 음악을 담당한 관청) 소속 기녀였는데요. 악사(樂詞), 즉 궁중 음악에 맞춰 부르는 노래(시가)를 잘 불렀답니다.
어느날 원로대신들이 재상이 된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을 위한 축하연을 열었는데요. 그런데 술자리 도중 조준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연회에 참석한 원로대신들이 서로 한 잔씩 권하며 설매에게 ‘축하곡을 불러보라’고 했다는군요. 이때 설매는 중국의 악부시(중국 민가)를 노래로 불러주었는데요.
“서쪽 동산에서 꽃놀이가 아직 파하지 않았는데, 또 부르시는 명을 받들고 상양(비원)에서 연회하도다.”(<동인시화>)
또 어느날 서쪽 지방을 순찰하러 떠나는 개국공신인 하륜(1347~1416)을 위한 송별 잔치가 성밖에서 열렸는데요.
이때 설매가 나서 임지로 떠나는 하륜을 위해 노래 한마디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대에게 다시 한 잔 술을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들도 없을 것일세.“
설매의 노래를 들은 고관대작들이 “캬~”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답니다. 이 노래가 당나라 시인 왕유(699?~759)가 타지로 떠나는 친구에게 보낸 전별시의 구절(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들도 없다·西出陽關無故人)이기 때문입니다.
설매의 신분이 비록 기녀였지만, 장악원 소속이었잖아요. 허다한 중국의 시가를 외우고 있다가 분위기에 맞게 노래를 부를 정도의 교양과 학식, 그리고 재치를 겸비한 댄스가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 앞서 속요 부르고, 임금을 욕한 여가수
조선조 성종(1469~1494) 연간에 활약한 여가수가 또 한분 계십니다.
성종은 잔치를 베풀 때마다 반드시 여약(기녀들의 궁중 공연)을 곁들였는데요. 이중 함경도 영흥 출신인 기녀 소춘풍의 춤과 노래가 유명했습니다. 어느날 소춘풍이 연회에서 기막힌 노래 3곡을 불렀는데요.
먼저 문관 앞에서 부른 노래는 “고금을 통달한 명철한 군자를 두고 어찌 무식한 무부(무신)를 따라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좌중의 무신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겠죠. 소춘풍은 무신들을 달래주는 노래를 불렀답니다.
“앞의 말은 그저 웃자고 한 농담이요…문과 무가 일체 임을 나도 알고 있으니 어찌 용맹스러운 무사를 따르지 않겠소.”
이번에는 문관들이 노여워했죠. 소춘풍은 이때 문관과 무관을 모두 아우르는 노래를 불렀답니다.
“제나라(문관)도, 초나라(무관)도 대국인데, 소국인 등나라(소춘풍)가 그 사이 끼었으니 제나라도, 초나라도 섬겨야죠.”
소춘풍은 문무 양반을 다 섬기겠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늘 같은 임금 앞에서 문관과 무관을 마음껏 희롱하면서 마침내는 연회를 화목한 분위기로 이끄는 대담함과 재치라니….
그 모습을 지켜본 성종 역시 감탄사를 연발했답니다. 무엇보다 소춘풍은 임금 앞에서 고상한 궁중음악이 아니라 민간에서 유행된 속요(대중가요)를 불렀답니다. 성종은 소춘풍에게 비단(금단)과 견직물(견주), 호랑이·표범가죽(호표피), 후추 등 푸짐한 상급을 내렸습니다. 이후 소춘풍의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차천로의 <오산설림>)
연산군을 휘어잡은 장녹수(?~1506)의 특기 역시 노래와 춤이었는데요. 특히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노래가 맑았고요.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얼굴은 16세 아이 같았답니다. 장녹수는 천하의 연산군을 어린아이같이 조롱하고 노예같이 욕했는데요. 그래도 연산군은 장녹수만 보면 웃었답니다.(<연산군일기> 1502년 11월25일)
■조선의 가왕 ‘이세춘 밴드’
그뿐이 아닙니다. 10년간이나 가요계를 휩쓸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18세기 가왕’이라 할 수 있는 이세춘입니다.
문인 신광수(1712~1775)의 <석북집> ‘증가자 이응태’조를 볼까요.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 기방을 드나드는 왈자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
이세춘은 허투루 볼 수 없는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통용되는 용어인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는 말을 만들어낸 분이거든요.
‘일반 시조(時調)는 장단구를 배열한 것이나 장안의 이세춘에서 시작된 것이로다.’(신광수의 <관서악부>)
새 장르의 노래를 뜻하는 ‘시조’는 기존의 노래를 뜻하는 고조(古調)와 구별되는 개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세춘은 기존의 노래법과 전혀 다른 레파토리를 구사한 가수였던 거죠.
이세춘은 ‘솔로’가 아니라 ‘밴드가수’였습니다. 이름 붙이자면 ‘이세춘 밴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심공(沈公)이 남자가객 이세춘과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여성가객, 그리고 금객(琴客) 김철석이 초당에 앉아 거문고와 노래로 밤이 이슥해 갔다.”(<청구야담> ‘유패영풍류성사’)
그러니까 남성 보컬(이세춘)을 중심으로, 거문고 주자(김철석), 여성보컬(추월·매월·계섬) 등이 그룹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세춘 같은 전문 아티스트들과 같이 언급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18세기 연예기획사
이세춘 그룹과 활동했던 ‘심공(沈公)’ 같은 인물인데요. ‘심공’은 문사 심용(1711~1788)을 가리킵니다.
심용은 가수나 거문고 연주자 같은 전문 아티스트는 아니고요. 이른바 ‘풍류남아’를 자처했던 인물입니다.
특히 이세춘 같은 가수들을 돌봐주는 일종의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시쳇말로 스폰서 혹은 연예기획사 대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세춘 밴드의 멤버였던 여가수 ‘계섬’도 대단한 보컬가수였습니다.
계섬은 황해도 송화현의 계집종이었는데요. 당시 대제학을 지낸 이정보(1693~1766)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은퇴 후 많은 가수(명창)들을 문하에 두었는데요. 계섬은 그 가운데서도 ‘원톱 연예인’이었답니다.
계섬은 이정보의 보살핌 아래 노래연습에 전념했습니다. 처음엔 일종의 연습생 신분이었던 겁니다.
심노숭(1762~1837)의 시문집인 <효전산고> ‘계섬전’은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짜랑짜랑, 집안에 울려퍼졌다”고 전했습니다. 계섬의 명성은 조선 전역에 떨쳤답니다.
지방 기생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울 때는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계섬은 가수 지망생들의 ‘보컬트레이너’가 된 겁니다. 계섬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오프닝’을 장식했답니다.
계섬의 의리 또한 인구에 회자됩니다. 훗날 세상을 떠난 이정보를 잊지못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답니다.
이후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섬의 마지막 주인은 심용이었습니다. 심용 역시 계섬의 노래를 워낙 좋아했거든요,
그 때 심용의 ‘기획사’에서 이세춘과 인연을 맺었을 겁니다.
이세춘 그룹의 또 다른 멤버인 추월은 춤과 미모로 유명한 ‘댄스가수’였답니다. 추월은 공주 기생 출신이었는데요.
궁중의 상방(尙方·임금의 의상을 책임지던 관청)에 들어갔는데 풍류객들 사이에서 수십년간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제3의 멤버인 매월은 종친인 이익정(1699~1782)의 문하에 있다가 이세춘 그룹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철석(1724~76)은 당대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로 명성이 자자했답니다. 별명이 ‘철돌(鐵突)’이었답니다.
■이세춘 밴드의 평양 게릴라콘서트
어느 날, 기획사 사장격인 심용이 이세춘 그룹 멤버들에게 “평양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답니다.
“평양감사가 대동강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평안도 모든 수령들과, 이름난 기생들, 명가수들이 다 모인다는구나.”
긴가민가 하던 멤버들이 심용의 다음 한마디에 모두 손뼉을 치며 호응했습니다.
“심회(心懷·스트레스)를 크게 발산할 수 있고, 전두(纏頭·개런티)로 비단과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니….”
이때의 평양 이벤트는 예조판서를 지낸 신회(1706~?)의 평양감사 시절(1765~66년) 연 대동강 잔치로 추정됩니다.
실은 초대받지 않은 평양공연이었습니다. 일종의 ‘게릴라 콘서트’였죠.
이세춘 그룹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다고 소문내고 종적을 감춘 뒤 평양에 잠입했습니다.
잔칫날 아침 심용은 배 한 척을 빌려 차양막을 치고, 좌우에 주렴을 드리웠습니다. 멤버들을 태운 그 배는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숨겨두었습니다.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풍악이 울리고 돛배가 강물을 뒤덮었습니다.
평양감사는 층배에 높이 앉아 잔치를 즐겼습니다. 공연을 곁들인 잔치를 구경하느라 성머리와 강둑은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심용이 노를 저어 평양감사의 층배가 보이는 곳에 배를 멈췄습니다. 그리곤 저쪽 배에서 검무를 추면 이쪽에서도 검무를 추고, 저쪽 배에서 노래를 부르면 이쪽 배에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치 흉내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히든싱어’라 할까요. 그 모습을 보던 평양감사 등이 이상하게 여겼죠.
“저 배를 바라보니 검광이 번쩍이고 춤과 노랫소리가 구름을 가로막는구나. 범상치않구나. 저 배를 끌고 오라.”
끌려온 심용이 평양감사의 층배 머리에 이르자 주렴을 걷고 껄껄 웃었습니다.
사실 심용과 평양감사는 친분이 깊던 사이였습니다. 정체를 알게 된 평양감사는 넘어질듯 놀라며 반가워했는데요.
이후 이세춘 밴드와 현지의 평안도 그룹이 치열한 공연배틀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배틀의 승자는 이세춘 밴드였습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활약중인 이세춘 밴드의 공연이 서도(평안도) 그룹과 수준차가 났겠죠.
개런티도 깜짝 놀랄만큼 받았습니다. 평양감사가 1000금을 주었고요. 다른 벼슬아치들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상금을 내놓았습니다. 합쳐서 거의 1만금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답니다. 이세춘 밴드는 10일 넘게 평양여행을 즐긴 뒤 돌아왔습니다.
■송귀뚜라미, 천상의 목소리
‘심용-이세춘’과 쌍벽을 이루는 조합이 서평군(이요)-송실솔 콤비였습니다.
부자였고, 협객이었던 서평군은 음악을 유독 좋아했는데, 송실솔의 노래에 흠뻑 빠졌답니다.
송실솔이 노래할 때마다 서평군은 직접 거문고를 연주했답니다.
‘서평군-송실솔’은 ‘심용-이세춘’과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송실솔은 이세춘과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할 정도로 친분을 유지했다네요. 하루는 이세춘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송실솔이 조문을 했는데요.
문에 들어서면서 상주(이세춘)의 곡소리를 듣고 이렇게 응수했답니다.
“이건 계면조일세. 평우조로 곡(哭)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상주가 계면조로 곡을 했으니까요. 문상객은 평우조(일반 노래)로 받아 넘겨야 한다는 겁니다. 이 일화가 장안에 널리 퍼져서 듣는 이들마다 모두 웃었답니다.(이옥의 <문무자문초> 중 ‘가장 송실솔전’)
송실솔은 어릴적 노래를 배울 때 폭포수 밑에서 날마다 연습 했답니다. 1년을 그렇게 하자 노랫소리만 남고 폭포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답니다. 송실솔의 노래는 구슬처럼 맑았고, 연기를 날리듯 가냘프고 구름이 가로걸리듯 머물렀으며, 철맞은 꾀꼬리 같이 자지러졌다가 용이 울듯 떨쳤답니다. 송실솔의 ‘실솔(실솔)’은 귀뚜라미와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조선판 얼굴없는 가수
‘얼굴없는 가수’도 있었습니다. 남학이 대표적인데요. 당대 사람들은 남학의 노래는 벽을 사이에 두고 들었다는데요.
생김새가 추했기 때문이랍니다. 얼굴은 귀신, 눈은 단춧구멍, 코는 사자, 수염은 늙은 양, 눈은 미친개, 손은 엎드려 있는 닭발 같았답니다. 하지만 남학의 노래는 아주 맑도 곱고 부드러웠고요. 타고난 미성이 특기였습니다.
그래서 벽너머에서 들으면 여인들의 혼이 흔들리고, 마음이 격동했답니다. 그러나 얼굴이 드러나면 기생들이 멍하니 앉아있고, 때로 깜짝 놀라 울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답니다.(이옥의 <청남학가소기>)
금향선이라는 여가수도 외모는 추악했지만 애절하고 원망하는 듯 처절한 목소리로 구름을 멈추게 했답니다.
금향선의 노래를 듣는 이들은 “끓어오르는 춘정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안민영의 <금옥총부>)
섹시한 목소리가 못생긴 금향선의 단점을 가린 겁니다.
절대고음을 자랑하는 모흥갑(1822~1890)도 유명합니다. 모흥갑은 판소리 8명창 가운데 한사람인데요.
모흥갑은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한다’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의 목소리는 ‘고동상성(鼓動上聲)’이라 했는데요. 평양감사로 초청받아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를 할 때 10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요즘 세계를 풍미하는 k-팝의 원조들입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종군, ‘조선시대 가인들의 활동고찰’, <판소리연구> 제21집, 판소리학회, 2006
허경진, <악인열전>, 한길사, 2005
신경숙, ‘조선후기 가곡 향유 범위와 그 의미’, <시조학논총> 34권 34호, 한국시조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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