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94년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각종 대형 사건 사고들이 터진 때였습니다, 구포역 열차전복(1993년 3월28일),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7월26일), 서해 페리호 침몰(10월10일),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21일), 충주호 유람선 화재(10월24일) 등 온갖 참사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자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관저 뒤편에 있던 불상을 치워버려서 각종 사고가 줄을 잇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호주 신문인 ‘파이낸셜 리뷰’가 “사고가 잇따르자 김영삼 대통령이 치워버린 불상을 제자리로 갖다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자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에게 이 불상을 공개하는 자리까지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이 불상이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관저를 신축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100m쯤 올라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미남석불’로 통하는 이 불상은 청와대 경내에 떡하니 앉아있답니다. 아무튼 이상한 생각이 드시죠. 청와대 경내에 사찰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 웬 불상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까.
■경주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불상
109년 전인 1912년 11월8일로 돌아가봅니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가 수행원 30여명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경주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수상쩍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석굴암과 첨성대, 성덕대왕 신종, 분황사탑, 월성 등을 둘러보던 데라우치의 시선을 잡아당긴 석조물이 있었습니다. 아주 잘생긴 석불좌상이었습니다.
이 불상의 출처는 알 수 없었습니다. 데라우치는 바로 이 잘생긴 석불좌상을 몇 번이나 살펴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답니다. 그런 데라우치를 유심히 지켜본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주 금융조합 이사라는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였습니다. 고다이라는 ‘총독 각하께서 저 불상을 보고 저토록 감탄사를 연발하실 줄이야…. 분명해. 저 불상을 갖고 싶으신 게 틀림없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혹은 데라우치나 그 측근들이 고다이라에게 ‘저 불상을 상납하라’고 귀띔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죠. 여하간에 이 불상은 어느 순간 경성의 총독관저로 자리이동했습니다. 당시의 총독관저는 남산 왜성대, 즉 지금의 중구 예장동(옛 안기부 자리)에 있었습니다.
■미남불상은 왜 총독관저에서 나왔을까
그러나 데라우치가 꿀꺽한 그 석불좌상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것 같습니다. 최근 정인성 영남대 교수가 ‘데라우치가 1913년 총독관저의 계곡으로 옮겨온 불상의 개안식(불상 등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을 열고 절을 올리는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데라우치가 몇몇 승려와 관계자들만 불러 아주 사적인 예배를 올린 것 같습니다. 아마 데라우치가 본국의 총리대신으로 영전해서 귀국한 1916년 이후 이 불상의 존재는 잊혀졌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22년이나 지난 1934년이 되어서야 불상의 존재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알려집니다. 3월29일자 매일신보는 일단 총독관저로 옮긴 석불좌상을 ‘미남석불’이라 소개합니다. 신문은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이 즐풍욕우(櫛風浴雨·거센 비바람) 참아가며 총독관저 대수하(大樹下·큰 나무 밑)에-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경주의 보물’ 등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이…자취를 감춰서 총독부박물관도 수소문했지만…이틀 전인 27일(1934년) 왜성대 총독관저에 있다는 말을 듣고…달려가 보니 총독관저 대기소 위 언덕 큰 나무 아래 천연덕스럽게 좌정하고 있으나….”
신문은 “미남석불은 적어도 시가 5만원 이상 된다”면서 “지금은 금으로도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다”고 높이 평가합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쯤 되었다니 이 석불의 가치는 기와집 50채 값 정도로 매길 수 있죠. 지금의 기와집 시세대로 계산하면 어떻습니까. 어마어마하죠.
그렇게 데라우치에게 상납된 ‘미남석불’은 1939년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집니다. 이 무렵 경주 현장에서 ‘미남석불’을 조사한 총독부 기사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는 “데라우치의 1912년 경주 방문 때 금융조합이사 고다이라가 문제의 불상을 서울로 옮겼다”는 공식보고서를 올립니다. 아무튼 지금의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미남석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1974년)’는 등의 단편적인 근황만 알려왔을 뿐 잊혀진 존재가 됐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갖가지 대형사건이 터지자 ‘괴담의 주인공’이 되어 인구에 회자된 겁니다.
■사내초와 데라우치 풀꽃
그런데 미남석불 뿐인줄 아십니까. 일제강점기에는 이렇게 데라우치에게 식물의 이름까지도 ‘상납한’ 케이스도 있답니다. 1922년 식민지 조선에서 자라는 식물을 샅샅이 조사해서 펴낸 일본어 식물서적 <조선식물명휘> 부록에 등장하는 ‘사내초(寺內草)’가 그것인데요. 이 꽃 이름은 일본의 저명한 식물 분류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이 붙였습니다.
이중 ‘사내초’는 ‘데라우치(사내·寺內)’의 이름을 딴 꽃입니다. 백합과에 속하는 이 꽃은 ‘조선화관(朝鮮花菅)’ 혹은 ‘평양지모(平壤知母)’라 하는데요. 그러나 이 꽃의 학명은 ‘데라우치(Terauchia)’와 ‘나카이(Nakai)’가 포함된 ‘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이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유미 국립세종식물원장과 손동찬 국립수목원 임업연구사(박사) 등 전문가들에게 문의했는데요. 나카이가 붙인 ‘데라우치아 아네마르 헤나폴리아 나카이’라는 학명은 요즘 공식적으로는 쓰지 않는다네요. 왜냐면 1831년 먼저 발표된 ‘지모’(학명 Anemarrhena asphodeloides Bunge)와 같은 풀꽃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랍니다. 식물분류상 먼저 발표된 학명이 ‘우선’이라네요.
그러나 ‘사내초’, 즉 ‘평양지모(조선화관)’가 1831년 발표된 ‘지모’라는 식물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데라우치아 아네마르헤나폴리아 나카이’라는 학명을 쓸 수도 있다네요. 손동찬 박사는 “공식적으로 통하는 학명을 ‘정명(正名)’이라 하고, 통합 분류에서 빠진 학명은 ‘이명(異名)’으로 일컬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각설하고 나카이는 왜 평양 인근에서 채집된 이 식물에 하필이면 데라우치의 이름을 붙였을까요. 나카이가 1913년 발간된 <식물학 잡지>’에 그 사연을 자랑스럽게 밝힙니다.
“조선은 아직 식물상의 정밀조사가 없어…안타까웠는데 데라우치 총독 각하 덕분에 (식물조사를 벌였으니) 가장 감복하는 바이며, 이에 본 식물을 각하에게 바쳐 길이 각하의 공을 보존하여 전한다.”
대단한 충성다짐 아닌가요. 그런데 충성의 대가가 괜찮았습니다.
조선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나카이는 “일본이 식민지를 다스림에 있어 학술적으로도 힘을 쏟고 있음을 알리라”는 데라우치의 독려 속에 조선의 식물을 연구했다고 자랑합니다. ‘사내초’ 즉 ‘데라우치꽃’은 이처럼 식민지 조선을 다스리던 총독에게 바치는 ‘충성맹세의 꽃’이었던 겁니다.
이 나카이라는 자는 지금은 ‘금강초롱’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한국고유종의 꽃에 ‘화방초(花房草)’라는 기막힌 이름을 붙이기도 했죠. ‘금강초롱’은 전 세계에 2종이 있는데 모두 한국에 자생한답니다.
8~9월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데, 청사초롱 모양으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피어 있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런 꽃에 화방초라니요. ‘화방초’는 조선 주재 초대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1~1917)의 ‘하나부사(花房)’에서 따왔답니다. 이꽃의 학명 또한 ‘하나부사 아시아타카 나카이(Hanabusaya asiatica Nakai)’입니다.
■데라우치가 한국문화재를 사랑했다?
일각에서는 데라우치를 일부 긍정 평가하는 측도 있습니다.
무단정치로 악명높기는 하지만 ‘한국 문화유산과 관련해서 몇 가지 긍정적인 일화를 남기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으로 무단반출해간 경천사 10층탑의 반환사례가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힙니다.
즉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 해체 반출해간 천인공노할 사건이 터지는데요. 3년 뒤 초대 조선 총독이 된 데라우치가 이것을 문제 삼죠. 데라우치는 “다나카가 불법반출한 석탑을 원위치로 돌려보내라”고 맹비난하면서 다나카를 궁지로 몰아넣었구요. 결국 다나카는 국내외의 거센 반환 여론에다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밀려 1918년 경천사탑을 돌려주고 맙니다.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반환건도 비슷합니다. 1911년 9월 강원 원주 부론면의 폐사지에 서있던 탑이 몇단계를 거쳐 일본 오사카의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 손에 넘어가는데요.
이때 데라우치가 “국유지에 있던 현묘탑을 개인간에 매매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면서 “당장 조선총독부로 반환하라”고 촉구합니다. 결국 이 탑 역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데라우치는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1902~1910년 사이 중앙아시아를 돌며 약탈한 문화재 1400여점을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른바 ‘오타니 수집유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 역사학자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1892~1960)는 “조선의 역사상 또는 미술상 중요한 물건은 모조리 반도에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한 총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조선을 영영 식민지로 여겼기에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시 데라우치는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총독이었습니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겠죠.
따라서 조선의 문화재가 굳이 사사로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때문에 데라우치로서는 자기 관할(조선)에 있던 문화재가 내지(일본)로 허락 없이 반출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을 겁니다. 그래서 경천사탑도, 지광국사 현묘탑도, 오타니 유물도 웬만하면 조선에 남아 있는 게 좋았겠죠.
데라우치가 그렇게 ‘한국문화재의 한반도 보존’을 외쳤다고요. 그런 데라우치는 조선총독 시절, 즉 1910~1916년 사이 엄청난 양의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조선의 서예와 고적, 규장각 자료 등을 정리하는 총독부 직원을 개인자료 수집에 동원했답니다. 1916년 일본 총리대신으로 승진한 데라우치는 귀국길에 수집자료들을 몽땅 일본으로 실어갔는데요. 1만8000여 점에 달하는 데라우치 문고의 장서 중 한국 관련 자료는 1000여종 1500여점에 달합니다. 이중 유일본이 70점에 이릅니다.
데라우치는 1910년 육군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제3대 한국통감을 겸임했고, 일본군의 무력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멸망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장본인이었습니다.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6월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탈취하고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차단했구요. 그런 데라우치가 강제 한일병합 당일 만찬에서 읊었다는 시가 기분 나쁩니다.
“(임진왜란 때 출병한)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旱川隆景),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세상에 있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청와대 경내에 앉아있는 ‘미남석불’에서, 그리고 ‘평양지모’(조선화관)에서 풍기는 ‘데라우치’의 냄새를 잊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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