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우체국 국제특송과 공항검색대 등을 이용해서 해외로 문화재 밀반출을 시도하던 피의자들이 적발됐습니다. 덕분에 문화재 4종 92점을 찾아냈는데요. 울산에서는 보덕사에서 도난된 불상 한 구를 회수했습니다. 결국 지난 한 주에 문화재 관련 회수사건이 두 건이나 있었네요.
이번 주엔 이 도난문화재의 회수 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감쪽같이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국보와 보물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진품명품의 명암
1995년 시작되어 지금까지 방영되는 장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KBS의 ‘TV쇼 진품명품’입니다.
문화재의 가치를 대중에게 쉽게 알려주기 위해 재미삼아 감정가를 붙인, 이름 그대로 ‘문화재 쇼’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1996년 방영된 45회에서 아주 흥미로운 숫자가 전광판에 찍혔습니다.
중종반정(1506년)에 참여한 공신 류순정(1459~1512)의 영정의 감정가를 표시하는 전광판에 ‘9999만 9999원’이 찍혔지 뭡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했더니 전광판 숫자를 1억원, 즉 9자리 이상 만들어놓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9999만9999원으로 표시했다는 겁니다. 감정가 1억원 이상 되는 의뢰품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러나 이 최고액은 불과 2년 만에 깨집니다. 1998년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1682~1759)의 영정으로 알려진 초상화에 2억5000만원의 감정가를 매겼습니다.
이후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당이나 향교, 서원에 걸린 조상들의 영정 등은 따로 관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아니 어떤 사람이 다른 가문의 영정을 훔쳐갈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걸려있는 영정의 가치가 ‘억대’를 호가한다는 소식에 문화재 절도범들의 눈이 뒤집힌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1990년대말~2000년대초 사이에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가문 영정이 털렸다’는 신고가 문화재사범단속반과 경찰에 들어왔답니다. 보안이 허술한 전국의 사당과, 향교, 서원에 걸린 영정 등의 문화재가 무방비 상태로 절도에 노출된 겁니다.
2018년 무려 18년 만에 회수된 익안대군 이방의(1360~1404·태조의 셋째아들)의 영정(충남 문화재자료 제 329호)이 대표적인 케이스였죠. 2000년 문화재 전문털이범인 서모씨가 영정을 모신 충남 부여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의 잠금장치를 풀고 감쪽같이 훔쳐갔답니다. 이 유물은 해외(일본)에서 문화재 세탁을 거쳐 국내로 반입됐다가 결국 회수되었습니다.
■중국대륙에서 유명했던 안평대군의 글씨
그러나 과정이야 어떻든 일단 돌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1998년 이후 도난당한 문화재가 총 2만2772점(2018년 현재)에 달하는데요. 그런데 아직까지 오리무중인 문화재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 즉 국보와 보물만을 따져도 14건(국보 1건 보물 13건·2021년 6월 현재)에 달합니다.
그 중 돌아오지 않은 유일한 국보가 있습니다. 바로 안평대군(1418~1453)의 진필인 ‘소원화개첩’(국보 238호)입니다. 안평대군이 누구입니까. 당대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 사람들이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작품을 감식해보면 그중 상당수가 안평대군의 글씨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그러나 안평대군의 진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계유정란(1453년·단종 1년)의 희생자였기에 모든 소장품들이 몰수됐고, 이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유독 많은 전란에 시달렸으니 그 사이 어떻게 됐는 지도 알 수 없죠.
남은 것은 일본 뎬리대(天理大) 소장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개인소장)이 있구요. 최근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의 반출품 중 ‘행서칠언율시출’ 등이 진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중 국내에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진필이 바로 ‘소원화개첩’입니다.
‘소원화개첩’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812~858)의 칠언율시(‘봉시·峰詩)’를 필서한 건데요. 비단에 행서체로 썼으며 말미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안평대군 호의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A4용지보다 작은 크기(가로 16.5cm, 세로 26.5cm)의 56자 소품인데요. 1987년 국보 238호로 지정됐습니다.
이 작품의 소장자는 고미술수집가인 서정철씨인데요. 그러나 이 ‘소원화개첩’은 꼭 20년전인 2001년 소장자인 서씨가 집을 비운 사이 행방을 감췄습니다. 경찰은 2010년 이 ‘소원화개첩’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했는데요. 세상이 다 아는 국보이다보니 해외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 거죠.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소원화개첩’의 행방은 오리무중인데요. 국내에 남아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청와대에서 사라진 ‘안중근 보물’
또 한사례, 낯부끄럽게 ‘사라진 보물’이 한 건 있습니다. 바로 안중근 의사(1879~1910)가 1910년 3월 뤼순(旅順) 감독에서 쓴 유묵입니다.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글씨(보물 제569-4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물의 소유자가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 이며, 도난장소 역시 ‘청와대’라는 겁니다.
이 유묵은 1976년 3월17일 이도영 당시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한 보물인데요. 한데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답니다. 언제 사라졌는지 그 시기도 알 수 없답니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담당관청이지만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 소장품이었기에 ‘감히’ 관리·감독하겠다고 나설 수 없었던 겁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 유묵은 분명히 청와대 집무실에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청와대가 어수선해졌을 때 사라진 것 같다는 추정도 있구요. 그 이후 정권 교체기에 누군가 슬쩍 가지고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 문화재청 인터넷 사이트의 도난문화재 정보란에는 이 유묵의 소유자와 도난장소가 ‘청와대’라 기록돼있습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안중근 의사의 손끝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유묵이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에서 도난되었다니 말입니다.
■사찰 벽 구멍뚫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보물 가운데 전남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보물 1043호)이 있습니다. ‘송광사 16조사 진영’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 등 고려 후기에 활약한 고승 16명의 초상화를 가리키는데요. 1995년 1월 16국사 영정 중 보조·진각·정혜국사의 영정 3점만 남고 13점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경찰은 영정이 걸려 있던 국사전 뒤쪽 흙벽에 지름 1m 가량의 구멍이 난 것으로 보아 절 내부사정을 아는 문화재 전문절도범의 소행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근(1549~1627)의 영정(보물 제 566호) 역시 도난된지 22년이 지났지만 오리무중입니다. 이 영정은 충북 괴산 소수면 사당에 보관됐다가 1999년 3월 사라졌습니다.
이뿐입니까. 1985년 2월 경기 여주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7호)의 상륜부 중 보륜과 보주 부분이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36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경북 상주 정기룡 장군(1562~1622)의 유물 중 ‘유서’ 1점(보물 669호·1985년 도난),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보주’(보물 40호·1989년), ‘황진(1550~1593)가 고문서 2점’(보물 942호·1993년),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전적-만국전도 1점’(보물 1008호·1993~4년), ‘익산 현등사 연안 이씨 종중 고문서’(보물 651호·1999년),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불 복장유물’ 중 전적(보물 959-1호·1993년), ‘예천 대동운부군옥책판’(보물 878호·1990년), ‘강화 백련사 철아미타불좌상’(보물 994호·1989년), ‘유희춘 미암집목판’(보물 260호) 6점,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보물 767-2호) 등이 돌아오지 않는 보물입니다.
■문화재 사범의 공소시효는 없다
딱한 생각이 듭니다. 거래가 원천봉쇄되는 도난 문화재를 왜 갖고 있으려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불안에 떨면서 말입니다. 도굴 및 절도 유물을 몰래 갖고 있다가 공소시효(도굴 및 절도범의 공소시효는 10년)가 끝난 이후에 거래하면 되는거 아니냐구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냐면 현행 문화재보호법 등은 지정문화재든 비지정문화재든 도난문화재를 은닉하거나 사고 파는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도난 및 도굴 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했다’고 주장하면 되는 거 아니냐구요. 소용없습니다. 2007년부터는 비지정이든 지정이든 도난공고가 난 문화재를 사고 파는 행위 자체가 불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절도 및 도굴범의 공소시효(10년)는 있지만, 문화재 은닉과 거래의 공소시효는 사실상 없는 셈입니다.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도난 및 도굴 문화재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불안에 떨면서 수십년 수백년 잘 감춰두었다 칩시다. 그러다 언젠가 거래를 시도하게 되면 그때부터 범법자가 되는 겁니다.
■‘택배, 전화 한통’…반환사례가 있다.
문화유산을 한자로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하고, 영어로는 ‘priceless’라 하죠. ‘값어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돈으로는 매길 수 없는 그런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문화유산을 돈으로 따지는 그런 천박한 풍토가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문화재사범단속반이 사라진 문화재가 어디 있는지 대충 감은 잡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랍니다. 문화재사범단속반에 ‘도난 및 도굴품이 어디 있는 줄 안다’고 연락해놓고 지정해놓은 곳에 고이 갖다놓는 방법입니다. 터무니없는 얘기라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도난문화재를 찾은 사례가 제법 된답니다. 일례로 앞서 인용한 익안대군 영정도 그렇게 찾았거든요. 도난-해외문화재세탁-국내반입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결국 도난문화재의 매매가 원천봉쇄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영정 소지자가 제3자를 통해 반환했습니다. 문화재단속반의 끈질긴 설득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네요.
그리고 저는 이런 제안도 해봅니다. 자진신고 기간을 두는 방법은 어떨까요. 예전에 ‘도난 도굴품인지 모르고 구입한’ 이른바 선의취득의 케이스도 분명 있을텐데 처벌이 두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케이스도 있겠죠. 예전에 보면 ‘총기류 자진신고’ 기간을 두던 것이 기억나는데, 문화재의 경우도 어떻습니까.
처벌도 처벌이지만 무사히 회수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피해를 본 분들이 분명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무사 귀환이 차선책이라면 그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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