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 올림픽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요. 그런데 올림픽 탁구경기를 바라보면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미국이나 유럽 국적의 선수들인데 동양인 얼굴의 선수들이 많다는 겁니다.
이 선수들이 바로 중국계라는 건데요. 중국이 2.5그램에 불과한 탁구공으로 세계를 제패한 이야기와 함께 핑퐁외교가 상징하듯 미국과의 수교를 끌어낸 역사까지 일러줍니다.
답=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탁구선수가 161명인데 중국계가 20명입니다. 비율로 보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지만 문제는 이 선수들이 실력이 강해서 화면에 자주 비춘다는거죠.
2문=우리 신유빈 선수하고 싸운 룩셈부르크 선수는 58살 중국계 선수잖아요?
답=니시아렌(예하련·倪夏莲) 선수인데요. 1963년생인데 1982년 도쿄세계탁구선수권에서 중국대표선수로 나가 여자단체전과 혼합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더라구요. 이번과 동년배가 누구냐면 안재형 감독과 결혼한 자오즈민(焦志敏), 일본으로 귀화한 허즈리(何智麗),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3문=거의 문화재 수준의 선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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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니시아렌 선수가 워낙 오래 해서 그렇지 각국 대표선수 가운데 중국계 선수가 많죠. 우리나라의 전지희 선수도 실은 중국에서 귀화한 선수잖아요. 전지희 선수와 싸운 선수들 국적이 프랑스, 오스트라이 국적인데 모두 중국계였습니다. 사실 남의 나라 이야기여서 잘 보도되지는 않았는데,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 여자 탁구는 단식에서 9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서울올림픽 이후 한번도 정상을 내주지 않았어요.
4문=우리니라 양궁 단체전과 같은 성적이네요?
답=그렇습니다. 이번에 중국남자도 우승했는데요. 그래도 남자의 경우엔 1988년 유남규, 1992년 얀 오베 발트너, 2004년 유승민 등이 한번씩 우승했죠. 중국 탁구에서 등록 선수만 5000만명 된다고 하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한국 선수들이 대단한 성적을 낸 거죠. 2008년 이후엔 그 조차도 안됩니다.
5문=그런데 중국이 유독 탁구에 그렇게 성적이 좋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답=탁구는 중국의 국기인데요. 중국에게 탁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닙니다. 1936년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이 3년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옌안이라는 곳에 도착하는데요. 장제스의 국민당군 공격에 1만2500㎞를 쫓겨온 건데요. 30만의 병력 중에 3만명이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홍군은 옌안에서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틈틈이 탁구를 치면서 소일했다고 합니다. 당시 공산당군은 밥을 먹고 난 뒤에 식탁을 이어서 탁구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저우언라이 (周恩來) 같은 지도부도 탁구를 즐겼다네요.
6문=탁구가 유일한 소일거리였네요?
답=마오쩌둥이 옌안에서 탁구 즐기는 사진도 있어요. 마오쩌둥이 펜홀더였다가 셰이크핸드로 바꿀 정도로 탁구실력이 뛰어났다고 하고, 저우언라이는 말을 타다 떨어져 오른팔을 다쳤는데, 재활 훈련의 하나로 탁구에 빠졌다고 합니다. 저우안라이의 총리시절 탁구 선수의 개인신상 뿐 아니라 타법까지 꿰뚫고 있었다는데요. 1972년 지병 중에도 탁구를 하다가 악화되어서 해방군 305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답니다.
7문=지도자들이 그렇게 좋아해서 탁구가 국기가 된건가요?
답=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중국이 섰는데, 1950년대 후반들어 중국대륙에 엄청난 위기가 닥쳐옵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완벽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죠. 마오쩌둥은 직업과 성별, 연령, 교육의 차이가 없는 유토피아를 만든다면서 70만개에 이르는 협동농장을 2만개의 인민공사로 통합했습니다. 그 인민공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먹고 자면서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공동으로 수확한다는 거였죠.
8문=마오쩌둥이 꿈꾼 유토피아가 공산주의라는건가요?
답=그렇습니다. 마오쩌둥은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사는 명실상부한 공산주의가 이룩될 것이라 강조했죠. 그러나 신기루였습니다.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진겁니다. 인민공사에서 먹고 자야했으니까. 평등만을 강조한 너무 급진적인 공산주의였던거죠. 더욱이 공산당에서는 각 인민공사에 엄청난 수확할당량을 책정했는데요. 그래야 도시에 사는 인민들을 먹여살리니까. 그렇지만 할당량이 과했습니다. 왜 ‘뭔 일을 조장하지 마’할 때 쓰는 ‘조장’이라는 말 아시죠?
9문=무리하게 일을 만든다는 뜻이죠?
답=조급하게 뭔가를 키우려 한다는 뜻인데요. 인민공사 때 농민들이 그랬습니다. 공산당에서 재촉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농민들이 아직 자라지 않은 곡식의 뿌리를 살짝 뽑아올려서 자란 것처럼 보이게 만든거죠. 그러고서 거짓으로 보고하기 일쑤였습니다.
9문=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뽑아올리면 곡식이 제대로 자라나요?
답=망치는거죠. 게다가 1960년대 초반 중국대륙에 엄청난 기근이 강타했습니다. 극심한 가뭄이 중국 농경지의 절반을 휩쓸었구요. 가끔씩 불어닥친 태풍은 살인적인 강풍과 홍수를 동반해서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50%가 사망했구요. 전국적으로 약 2000만명이 희생됐답니다.
10문=2000만명이나요? 민심이 흉흉해졌겠네요?
답=그렇죠, 뭐 마오쩌둥이 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힘든 와중이었던 1959년에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벌어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룽궈퇀(容國團)이라는 청년이 헝가리 선수를 꺾고 남자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11문=모처럼 중국에 좋은 소식이 들린거네요?
답=그렇습니다. 룽궈퇀은 홍콩 출신이었는데 중국에서 영입한 선수였거든요. 룽궈퇀은 “세계챔피언이 되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고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왔을 때 반드시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는 구호를 계속 외쳤다는데요. 처음엔 ‘어린 놈이 큰소리 치네’하고 코웃음 쳤다가 단식우승을 차지하니까 중국대륙을 풍미한 구호로 변했답니다.
12문=리우 올림픽 때인가요? 펜싱 박상영 선수의 ‘할 수 있다’는 구호가 생각나네요?
답=그렇습니다. 1998년 아임에프 외환위기 때 박세리 선수의 양말 투혼도 그랬죠. 룽궈퇀의 구호도 도탄에 빠진 중국인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고 하구요. 지금도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일상구호가 됐답니다.
13문=중국에서 난리가 났겠네요?
답=그렇죠.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퍼레이드 벌이고 지도자들이 시사대접하고 난리. 1959년 신중국 건국 10주년을 맞이했는데, 신중국 건국이래 최대 경사라 했답니다. 중국은 그런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196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는데요. 바로 그 61년 대회에서도 남자단체전하고 남녀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답니다. 남자의 좡쩌둥(莊則棟)과 추중후이(邱鍾惠)가 우승했죠.
15문=그런데 그 이후 탁구가 중국과 미국의 국교수립에 가교역할을 했죠? 핑퐁외교라 하죠?
답=역사적인 핑퐁외교의 서막이 1971년 3월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열리는데요. 대회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4월4일이었는데 미국의 글렌 코완이라는 선수가 체육관 앞에서 선수단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답니다. 코완은 ‘히피’라는 별명처럼 장발에 꽃무늬 옷을 입은 19살 청년이었답니다.
당황한 그 앞에 버스 한 대가 멈쳤는데요. 바로 중국선수단 버스였다. 차 안의 어떤 선수가 ‘차를 타라’고 손짓했답니다.
코완이 얼떨결에 버스를 탔구요.
16문=뭐 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같은 참가선수들끼리?
답=그러나 그 때는 살벌한 동서냉전이 최고조였죠. 게다가 적성국가였잖아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탄 거죠.
코완에게 “타라”고 권한 중국 선수는 다름아닌 좡쩌둥인데요, 61·63·65 세계탁구선수권 3연패를 자랑하는 중국의 인민영웅이었죠. 선수단 부단장도 겸하고 있었구요. 좡쩌둥도 ‘미제국주의자 타도’의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성장했던 사람이었는데. 미국선수에게 버스를 타라고 했으니 좀 이해가 안가죠. 본인은 순간적인 호의였다고 하지만...
17문=어느 정도 의도적인 접근이 아니었을까요?
답=좡쩌둥은 나중에 “마오쩌둥 주석도 대장정 시절에 미국 언론인인 에드가 스노와 평생의 친구로 지내지 않았냐”고 했는데요. 아마도 당중앙의 지시였겠죠. 어쨌거나 좡쩌둥은 코완에게 기념 수건을 전했고,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나누던 둘은 버스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었구요. 다음날 코완은 다음 날 평화를 상징하는 3색 티셔츠를 좡쩌둥에게 전달했구요. 티셔츠에는 ‘Let it B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답니다.
18문=이걸 언론이 알았다면 빅뉴스였겠네요?
답=당연하죠. 둘의 만남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코완은 “중국 방문을 원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안가 본 나라에 가고 싶다”며 “물론”이라고 코멘트했는데요. 이것은 1년 뒤 중·미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킨 한마디였습니다.
19문=이 발언이 어떻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나요?
답=이 발언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보고됐는데요. 처음에는 “지금은 시기상조다. 정중하게 거절하라”고 했다는데요. 그래도 마오쩌둥 주석에게 보고는 했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저우언라이의 입장에 마오 주석도 ‘동감’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당시 마오쩌둥은 폐렴과 심장이상 등으로 위중한 상태였는데요. 그날 밤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을 자던 마오 주석이 수간호사를 불러서 전했답니다.
“미국 선수단, 초청하라고 하게. 즉각!”
20문=아니 꿈결에 그런 말을 한게 아니었을까요?
답=그렇지않아도 수간호사 우쉬진(吳旭君)이 귀를 의심해서 몇 번이나 “미국선수단을 초대하라는 말이냐”고 물어봤는데, 마오 주석이 잠결에 빠져가면서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는 겁니다. 곧바로 잠들었구요.
21문=그 한마디에 역사가 바뀐거군요?
답=그렇습니다. 꿈의 계시와도 같은 마오 주석의 지시로 중국은 미국선수단을 초청했습니다. 속전속결이었죠. 마오주석이 승낙한지 4일만인 4월10일 미국선수단이 베이징에 도착해서 국빈대접을 받는데요. 코완은 수만명의 인파 속에서 “나야말로 요원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며 으쓱댔답니다. 마오 주석이 요원의 불길이라고 했다는 것을 인용한거죠.
22문=그 말이 적확한 표현 같네요? 요원의 불길?
답=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핑퐁외교의 서막이었는데요. 핑퐁외교 이후 미·중간 외교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라켓을 이어받은 저우언라이와 키신저가 긴밀한 물밑작업을 벌였구요. 이듬해인 72년2월21일 닉슨 미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고, 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미·중간 국교가 정상화했습니다.
23문=진행 과정을 보면 핑퐁외교와 중미 수교는 뭔가 우연이 아닌 필연 같아요?
답=당대의 국제 정치상황을 보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실 미국과 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였잖아요. 한국전쟁 때 직접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죠. 그런데 그런 양국에게 새로운 주적(主敵)이 생겼습니다.
24문=소련이죠?
답=그렇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원래 주적이었구요. 한때는 사회주의 맹방이었던 중국과 소련도 최악의 상황으로 빠졌습니다. 소련은 사회주의 동지였지만, 53년 흐루시초프 체제가 등장하면서 중국과 결별하게 됩니다.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은연중 비판한거죠.
25문=중국도 가만있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답=그렇습니다. 1965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맹비난하죠. 급기야 69년 중·소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2차례에 걸쳐 무력충돌이 벌어집니다. 전쟁 일보직전까지 갑니다. 이제 중국의 주적(主敵)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된 거죠.
26문=뭐 그렇다면 ‘적(소련)의 적(미국)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답=그렇죠. 게다가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 닉슨 대통령도 중국에 잇단 화해제스처를 보내죠. 2월 외교교서에서 ‘중공(中共)’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호칭했구요. 3월25일에는 미국 시민의 중국 여행을 허락했습니다. 글렌 코완-좡쩌둥 사이에 벌어진 ‘우연한’ 접촉은 이런 바탕에서 이뤄진 겁니다.
27문=어쨌거나 탁구가 세계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스포츠네요?
답=저우언라이 총리의 말이 있어요.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를 흔든다.(小球轉動大球)”라 했습니다.
28문=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중국의 탁구를 꺾기가 쉽지 않은 거군요?
답=그렇습니다. 이와같은 역사를 갖고 있는 중국탁구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죠. 저는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현장취재해서 남북한이 단일팀을 이뤄서 중국을 꺾고 우승한 장면을 보았는데요. 당시 그런 느낌이었어요. 남북한 합해 7000만명의 염원이 우승시킨거다 라는 생각에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46일간 한솥밥을 먹으며 호흡을 맞춘 결과였는데요. 2.5그램에 불과한 탁구공의 무게가 그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저우언라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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