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남부와 제주도는 왜인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조선인에게는 일본인의 피가 섞여있다…”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1880~1959)라는 인물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의 고구려·낙랑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은 물론이고 전남 나주 반남 고분을 파헤친 역사·고고학자이다. 그런 그가 1920년 <조선과 만주(朝鮮及滿洲)>(1월·151호)에 기고한 글(‘상고시대 일·한 관계의 일부·上世に 於ける 日韓關係の 一斑’)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1500년전 금동관
1917년 전남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확인된 금동관(국보). 국내에서 출토된 금(동)관 가운데 가장 먼저 출토된 완형이다. 꽃봉오리와 구슬, 덩굴풀 무늬 등을 장식한 풀꽃형 금동관이다.|사진 국립나주박물관·그림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조선의 남부에는 왜인 고분이 있다. 즉 전남 나주와 보성에는 <삼국지> ‘동이·왜인전’에 등장하는 여왕국(히미코·卑彌呼)의 영토에 존재하는 왜인의 무덤과 구조가 일치하는 고분(옹관묘·독널무덤)이 보인다.”
야쓰이는 “나주에서 출토된 옹관묘가 지금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면서 기막힌 결론을 맺는다.
“얼마전 민족 자결의 표어를 걸고 조선인이 소요(1919년 3·1운동을 가리킴)를 일으켰다. 그러나 문헌 및 고고학 자료로 볼 때 양국의 혈족적 관계가 그렇게 농밀하다는 걸 알면 조선인들은 깜짝 놀랄 것….”
생생한 보수의 흔적
출토된 금동관은 세움장식을 늘려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아마도 머리가 커져서 관테 장식을 고쳐 활용한 듯 싶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옹관묘와 3·1운동
최근 국립나주박물관이 상설전시실을 새롭게 꾸민 결과물을 일반에 공개했다.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그 어마어마한 독무덤(옹관묘)들을 한 공간에 한가득 전시해놓았다. 3m에 가까운 대형 독널무덤이 즐비한 광경에 압도되고 만다.
그 뿐이 아니다. 길이 30m의 대형벽면에 틀어주는 미디어 아트 영상이 신비감을 자극한다.
또 하나의 독립공간에 마련된 유물은 ‘박물관의 대표선수’인 ‘신촌리 금동관’(국보)이다. 그리고 ‘신촌리 금동관’ 하면 첫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앞서 ‘조선인의 피, 일본인의 피’ 운운한 야쓰이 세이이치이다.
억지로 늘린 금동관모
금동관 안에 쓰는 금동관모 역시 나중에 머리 크기에 맞게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억지로 늘려 좌우가 비대칭이 됐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야쓰이는 왜 그런 망언을 서슴없이 내뱉었을까. 1917년 12월17일로 시공간을 돌려보자.
야쓰이 조사단은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 반남면(신촌리·대안리·덕산리· 흥덕리 일대)에서 확인된 고분의 발굴에 나선다. 전해(1916년) 총독부의 국유림 조사과정에서 발견한 독특한 고분(독널무덤·옹관묘)을 그냥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굴 3일 만이었다. 12월20일 신촌리 9호분에서 대소(크고 작은) 옹관(독널) 2기가 노출되었다. 합체된 두 옹관은 점토를 발라 틈새를 막아둔 상태였다. 야쓰이 팀은 이 옹관을 ‘을(乙)관’이라 했다. 21일과 22일 ‘을관’ 양 옆에서 확인된 두 옹관을 ‘갑관’과 ‘병관’이라 했다. ‘정관’도 드러났다. ‘을관’의 옹관 내부에서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보였다. “옹관의 내부를 조사해보니 유해는 이미 재로 바뀌었다. 머리 부분에서 금동관과 대도(큰칼), 창, 촉 등이 출토됐다…발 밑에는 작은 옥과 금동신발이 나왔다.”(조사단의 발굴일지)
국보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 및 금동신발’이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금동관이 1920년 양산 부부총에서, 첫번째 금관이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각각 수습되었으니, 1917년 당시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금(동)관이었다.
3.1운동 소환된 고분발굴
전남 나주 반남 고분을 발굴한 일인학자 야쓰이 세이이쓰는 “전라도 남부와 제주도는 왜인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조선인에게는 일본인의 피가 섞여있다…”고 주장했다. 야쓰이는 “얼마전 민족 자결의 표어를 걸고 조선인이 소요(3·1운동)를 일으켰다. 양국의 혈족적 관계가 그렇게 농밀하다는 걸 알면 조선인들은 깜짝 놀랄 것”이라 했다.
■“필시 왜인의 피가 섞여있다”
그 해의 발굴은 10일 만인 12월27일 일단 끝낸다. 조사를 마친 야쓰이의 약보고서가 심상치 않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덕산리·대안리 등에 수십기의 고분이…봉토 안에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옹관을 묻었다…금동관, 금동신발, 큰칼…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이 고분들은 매장법과 관계 유물로 보아 왜인(倭人)의 것일게다.”
대형 독널(옹관) 무덤의 현현
1917년 12월 신촌리 9호분 발굴 때 노출된 옹관묘. 신촌리에서만 모두 11기의 대형옹관묘가 엮여 나왔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면서 야쓰이는 “다음에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라는 제목의 특별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야쓰이는 이듬해인 1918년 10월 다시 신촌리 9호분을 조사한다. 이때 새롭게 발굴된 옹관에 ‘무(戊)’·‘기(己)’· ‘경(庚)’·‘신(辛)’·‘임(壬)’·‘계(癸)’ 등 10간의 명칭을 이어갔다.
이상한 일이다. “왜인의 고분임을 입증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야쓰이가 끝내 ‘특별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대로 1920년 총독부 발행 잡지(<조선과 만주>)에 해괴한 칼럼만 발표했을 따름이다.
그리곤 1년 뒤 아버지의 병을 핑계로 일본으로 내빼고 만다.
백골은 진토됐지만…
모습을 드러낸 신촌리 9호분 을관. 백골은 진토되었으나 금동관과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m 넘는 옹관에 묻힌 사람들
야쓰이가 ‘반남고분군=왜인의 무덤’으로 본 것은 ‘독널무덤(옹관묘) 때문’이었다.
높은 봉분을 쌓고 얕은 곳에 옹관(독널)을 매장한 것 등이 북규슈(北九州)와 닮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문헌으로도, 고고학 자료로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왜인조’는 “왜는 구야국(금관가야)에서도 바다 건너 1000리 이상 떨어져있다…”고 분명히 기록했다.
고고학 자료는 어떤가. 옹관묘는 ‘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도 청동기시대~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이어진 매장풍습이다. 예컨대 1963년 기원전 1~기원후 1세기 생활유적인 광주 신창동에서 유·소아의 무덤인 옹관묘 53기가 확인된 바 있다.
유례없는 대형옹관묘의 정체
초대형 옹관과 너비 30~40m의 특대형 고분이 세트를 이루는 수장 무덤은 규슈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국립나주박물관 제공
3세기 무렵부터 영산강 유역 등 전라도 지역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옹관묘가 등장한다. 이전까지 어린아이나 평민의 무덤으로 쓰였던 옹관묘가 지역 수장의 무덤으로 발전한 것이다.
매장 전용으로 대형 항아리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나주 복암리 옹관묘의 경우 284㎝(큰 항아리·152㎝+작은 항아리 136㎝)에 이르는 것도 있다. 하나의 옹관으로 이뤄진 묘가 194㎝에 달한 것도 있었다.
3세기 무렵부터 영산강 유역 등 전라도 지역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득특한 옹관묘가 등장한다. 이전까지 어린아이나 평민의 무덤으로 쓰였던 옹관묘가 지역 수장의 무덤으로 발전한 것이다.|이정호 동신대 교수 제공
나주 공산면 화정리 마산 고분에서는 3m가 넘는 옹관묘(큰 항아리 209㎝+작은 항아리 117㎝)가 확인했다.
이런 초대형 옹관과 너비 30~40m의 특대형 고분이 세트를 이루는 수장 무덤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같은 시대 일본 북규슈에서는 이렇게 지역 수장을 묻은 옹관묘의 전통은 찾아볼 수 없다.
백제와는 전혀 다른 묘제?
마한론자들은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와는 전혀 다른 장례묘제의 전통이 이어진 것을 들어 이곳에서는 ‘옹관묘’로 대표되는 전혀 다른 문화가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마한은 800년 독립국?
이러한 영산강 유역 옹관묘 주인공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까지 가열찬 ‘국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앞서 밝혔듯 ‘왜인’설은 철지난 이야기가 됐다. 요즘에는 각 지역의 색깔을 강조되는 트랜드 속에서 ‘마한론’이 그럴듯하게 제기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백제의 전통적인 돌무덤(돌방무덤)과는 전혀 다른 문화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옹관묘로 대표되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고, 그것이 마한의 문화라는 것이다. 마한론자들은 “영산강 유역에서 마한은 기원전 3~2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를 유지하며 존속했다”고 주장한다.
마한 800년사?
마한론자들은 “영산강 유역에서 마한은 기원전 3~2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를 유지하며 존속했다”고 주장한다.|나주복암리고분 전시관·김낙중 전북대 교수 논문 지도 인용
■마한을 보는 각각의 시선
과연 그럴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마한’ 기록이 한·중·일 삼국의 문헌에서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먼저 <삼국사기>(한국사료)는 “마한은 기원후 1세기에 완전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즉 “기원후 8년(온조왕 26) 백제가 마한의 국읍을 병합했고, 이듬해(9년) 완전히 멸망시켰다”(<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는 것이다. 또 “16년(온조왕 34) 마한 잔당의 반란이 진압됐고, 61년(신라 탈해왕 5) 마한의 장수가 복암성을 신라에 통째로 바쳤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는 등의 기사까지…. 이것이 끝이다.
기원후 1세기에 멸망한 마한
<삼국사기>는 “마한은 백제가 기원후 1세기에 오나전히 멸망시켰다”고 기록했다. 중국측 사서는 “마한을 비롯한 삼한은 280~290년대에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백제와 신라에 병탄했다”고 썼다. <일본서기>에는 ‘마한’ 관련 기사가 아예 없다.
중국 문헌은 어떨까. <진서> ‘제기·무제’조는 “태강 2년(282) 9월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동이 마한 신미제국 사절단이 20여국 대표와 함께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통전> ‘동이·변한’조는 “진 무제 함령 연간(275~279)에 마한왕이 내조한 이후 삼한은 백제와 신라에 병탄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국사서에 따르면 마한은 282년 이후(3세기 말)부터 4세기 사이에 멸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마한’의 ‘마’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신공기’에 반설화적인 기사가 눈길을 끈다.
“369년 (왜가) 침미다례(전남 지역)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다. 왕 초고(肖古·근초고왕)와 왕자 귀수(貴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이끌고 맞으니….”
이 기사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해석하는게 보통이다. 즉 백제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 지역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했다는 것이다.
백제의 ‘선물 정치’
간접지배방식을 택한 백제는 각 지방 세력에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을 하사하는 ‘선물정치’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백제의 선물 정치
정리해보면 ‘마한’은 아무리 늦어도 4세기 중·후반이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때는 백제의 ‘리즈 시절’인 근초고왕(346~375) 연간이다. 그 유명한 칠지도를 369년(근초고왕 24) 무렵 왜왕에 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칠지도의 하사 같은 문물 교류는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배했을까. 마한은 원래 54개 소국으로 이뤄진 연맹체였다. 마한을 병합한 백제 역시 직접통치 대신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396년 백제를 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는 <광개토대왕 비문> 기록은 백제가 성과 촌 단위로 조직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백제 중앙정부는 지방세력을 품에 안으려고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 ‘위세(신)품’을 내려주는 이른바 ‘선물 정치’를 펼친 것 같다. 충남 공주 수촌리와 서산 부장리, 전북 고창 봉덕리 및 익산 입점리, 전남 고흥 길두리, 나주 정촌 및 복암리 등에서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같은 백제계 위세(신)품이 출토되는 이유이다.
백제+대가야식 제품
신촌리의 금동제품은 백제식과 대가야식을 절충한 현지식으로 보인다. 금동신발은 바닥판과 좌우 측판을 따로 만들어 결합한 백제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 고리자루큰칼은 대가야 것과 제작방식과 문양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금동관은 왜 보수했을까
나주 반남고분군은 신촌리(9기)와, 대안리(12기)와 덕산리(10기) 등까지 30여기의 고분을 아우른다.
그런데 이 반남고분 세력의 존재는 상당히 독특하다. 단적인 예로 9호분 을관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 그리고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등의 정체성이 모호하다. 물론 ‘백제중앙정부가 내린 하사품’이라는 설도 그럴듯하게 제기됐다.
즉 금동관의 경우 무령왕릉 출토 관장식과 전체적인 외형 및 연화문 모티프 등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금동관모도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에 사여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고, 금동신발도 바닥판과 좌우측판을 따로 만들어 결합한 백제적인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백제 손바닥에서…
476년 공주 천도 등으로 위기에 빠진 백제에 탐라사신이 방문했다. 기뻐한 문주왕은 탐라사신에게 ‘은솔’의 관직을 내렸다. 22년 뒤인 498년 동성왕은 탐라가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자 무진주(광주)까지 친정했다. 그러나 탐라가 진사 사절단을 보내자 군대를 돌렸다.
이와는 달리 영산강 세력이 백제 및 대가야 양식을 섞어 현지에서 제작한 제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금동관의 풀꽃형 세움장식이 경남 고령 출토 대가야산 금관 및 금동관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또한 봉황이 장식문 고리자루큰칼도 그렇다. 자세히 보면 둥근 고리 속 봉황머리가 별도로 제작되어 끼워져 있다. 또 철로 만든 재료에 은판을 덧씌워 장식했다. 이런 점은 가야 큰칼(대도)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금동관이나 고리자루큰칼 등이 가야에서 ‘직구’한 제품은 아닌 것 같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무산된 홀로서기
중흥을 이룬 백제는 잠시 홀로서기를 꾀한 신촌리를 중심으로 한 반남세력 대신 복암리나 송제리 세력을 키운다. 복암리와 송제리에서 확인되는 백제 하사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세히 보면 양자간 차이점도 만만치 않다. 금동관의 경우 대가야 제품과 사뭇 다르다. 고리자루큰칼의 경우도 그렇다. 가야 제품은 둥근 고리 내 봉황(혹은 용)의 재질이 청동이고, 표면을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다. 하지만 신촌리 제품은 둥근 고리는 물론 철로 만든 봉황의 머리를 은판으로 씌웠다. 무엇보다 신촌리 제품의 제작기술이 떨어진다. 금동신발의 경우 각 부품의 조립이나 조금(彫金·정을 이용해서 문양을 새김) 수준이 낮다. 관모의 경우도 좌우 문양이 비대칭인데다 새김의 수준도 낮다.
금동관의 경우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금동관의 좌우 세움장식(입식·立飾)을 조금씩 옮겨 새롭게 붙인 흔적이 보인다. 관모 역시 폭을 넓히려고 해체한 후 다시 조립한 것 같다. 왜 다시 조립했을까. 주인공의 머리에 커져서 세움장식을 다시 조정했다는 얘기다. 또 금동관의 경우 관테가 뒷부분까지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다. 끝에 직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양 끝단에 붙은 띠로 머리 뒤쪽에서 묶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촌리 9호분 ‘을관’의 금동관과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은 현지 기술자가 백제와 대가야 제품을 모델로 삼아 나름대로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공방에서….
옹관쇼
최근 새롭게 꾸민 상설전시실을 공개한 국립나주박물관.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36곳의 고분에서 출토된 옹관묘를 한가득 전시해놓았다.|국립나주박물관 제공
■실패로 끝난 ‘홀로서기’
그렇다고 신촌리 9호분 세력을 백제와는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정치체(이를테면 마한)로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한성함락-웅진천도’(475)라는 백제 역사의 충격파를 증언해주고 있는 고분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476년(문주왕 2) 4월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여 탐라 사신을 은솔(恩率·16관등 중 3품)로 삼았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눈길을 끈다. 476년이면 고구려의 남침으로 개로왕이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공주로 천도한 직후였다. 백제의 국력은 실추될 대로 실추된 때였다. 그럴 때 멀리 탐라(제주 혹은 전라도 남부) 사신이 알현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탐라 사신의 방문은 백제의 간접지배가 유효했다는 것을 증거해준다. 반대일 수 있다. 탐라는 과연 이 시점에서 백제에 충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지 탐지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을 수도 있다.
옹관 피노라마
30m 벽면을 활용하여 ‘영원한 안식’을 주제로 구현한 미디어 아트 영상도 관람객들에게 신비감을 안겨준다.|국립나주박물관 제공
이때다. 신촌리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의 반남고분 세력도 암중모색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신촌리 9호분 ‘을관’의 주인공이 착장한 금동관과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이 바로 5세기 말의 ‘파동’을 시사해준다.
백제가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바로 그 때를 틈타…. 반남세력은 백제중앙정부가 하사한 것이 아니고 대가야 냄새가 풍기는 그런 현지산 위세(신)품을 쓰고, 신고, 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조를 보라.
“498년(동성왕 20) 8월 탐라가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자 동성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광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동성왕의 침략 소식에 급히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동성왕이 군대를 돌렸다.”
이 기사에 여러가지 착안점이 있다. 한성함락-웅진천도라는 위기에서 겨우 국력을 추스린 백제가 다시 영산강 유역에 눈길을 돌렸다는 것, 그러자 백제의 국력 약화 때 ‘홀로서기’를 꾀하던 신촌리 등 반남세력이 다시 주저앉았다는 것, 또 무진주까지 남진한 동성왕이 탐라의 사죄만 받아내고 돌아감으로써 간접 지배 방식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나주 대표선수
박물관 전시장 한편에는 나주 영산강 유역의 대표 유물인 신촌리 금동관 전용공간을 마련했다.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9호분 을관을 배경으로 배치했다.|국립나주박물관 제공
■백제의 손바닥?
이후 백제는 동성왕(479~501)에 이어 무령왕(501~523)이 등장하여 고구려를 여러차례 격파하고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백제는 이때 475년 이후 눈치를 보며 홀로서기를 꾀한 반남 세력 대신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는다. 영산강 유역의 중심세력이 나주 반남면에서 나주 다시면 복암리와 세지면 송제리 쪽으로 바뀐다.
백제가 금동신발과 은제 장식 등 위세(신)품을 새로운 세력에게 사여한다. 복암리 3호분 96석실(금동신발)과 송제리 1호분 출토품(은제관식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후 백제는 사비 천도 이후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그 하부에 군-성을 편제하여 직접 지배를 실현하게 된다. 이때부터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같은 화려한 사여품은 사라진다.
반남고분군에는 30여기의 옹관 고분이 집중되어 있다. 영산강 유역 가운데 반남고분 세력의 존재는 특별하다.|국립나주박물관 제공
대신 “6품 이상 관리의 관은 은화(銀華)로 장식했다”는 <북사>와 <주사> 등의 기록처럼 은제관장식이 나솔(6품) 이상 고급관리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런 은제관식은 사비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다.
어떤가. 신촌리 9호분의 주인공은 1917년 발견 당시 ‘왜인’으로 여겨졌고, 어느 순간부터 ‘마한인’으로 특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백제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제의 지방세력’일 가능성이 더 짙다. 그럴 경우 지금 호남지방에 부는 거센 ‘마한 바람’과 관련한 어떤 연구자의 언급이 귓전을 때린다.
“마한이 정말 존재했고, 강했다면 한성백제가 멸망했던 그 어수선한 시기에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독립을 선언했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었습니까.”(이정호 동신대 교수) (이 기사를 위해 이정호 동신대 교수와 이한상 대전대 교수, 국립나주박물관의 김상태 관장·구문경 학예연구실장·오연숙 학예연구관사,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 김낙중 전북대 교수, 정인성 영남대 교수, 이병호 동국대 교수, 이훈 공주대 연구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나주 신촌리 9호분>, 2001
이한상,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2009
이한상, ‘고대 나주의 위세품’, <천 오백년전 나주의 기억>,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엮음, 2023
강봉룡·최성락·노중국·김낙중·오동선 등, <천 오백년전 나주의 기억>,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엮음, 2023
국립나주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나주의 문화유산>, 2016
국립나주박물관, <신촌리 금동관, 그 시대를 만나다>, 2017
정인성, ‘1917년 나주 반남면 고분 발굴이야기’,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재조명>(학술총서 1), 국립나주박물관, 2019
이정호, ‘영산강유역 옹관묘 연구 현황과 과제’, <고대 아시아의 독널문화>, 국립나주박물관, 2020
이훈, ‘금동관을 통해 본 백제의 지방통치와 대외교류’, <백제연구> 55권, 충남대 백제연구소 2012
신정훈, ‘나주 신촌리 9호분과 백제의 정치 변천―백제·대가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학연구논총> 32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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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의 왕비’, 233년만의 '복위'에 538명중 537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130) | 2024.02.10 |
"뼈가 가루가 되도록 싸웠다’…사료 만으로 따져본 양규의 7전승 신화 (16) | 2024.02.01 |
'고려도경' 서긍은 간첩단 두목이었다…송나라 사신단의 ‘넘버4맨' (1) | 2024.01.28 |
200년전 14살 소녀, 58살 여인, 금강산 여행을 결행하다 (0) | 2024.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