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여성 운동가인 로빈 모건(Robin Morgan)이 ‘herstory’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역사(history)가 남성 중심의 이야기, 즉 ‘his-story’라 규정하면서 여성의 역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쓰고 이야기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인 historia, 즉 ‘탐구로 얻어지는 지식’의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모건의 주장은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후 historia는 변모되고 확장되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리한 기록’으로, 다시 ‘인간 공동체 및 사건의 역사’라는 지금의 의미로 바뀌었다. 동양에서 ‘역사(歷史)’는 ‘지나온 발자취(歷)의 기록(史)’이다(歷의 갑골문은 사람의 발이 숲을 지나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히스토리’는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이야기, 즉 ‘스토리’라 할 수 있다.
■ 놈(者)이 쓰는 역사
이러한 분야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연구자를 ‘역사학자’ 혹은 ‘고고학자’라 한다. 요즘엔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연구자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천성적으로 (혹은 훈련을 통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스토리를 풀어갈 수 있는 직분도 있다는 사실을 감히 말하고 싶다.
바로 나와 같은 기자(記者)이다. 기자처럼 ‘놈 자(者)’를 쓰는 직군으로 학자, 과학자, 기술자 등이 있지만 이들의 사전적 의미는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면 ‘기자’ 역시도 ‘글을 능숙하게 쓰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여야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표준대사전이 풀어놓은 ‘기자’는 되게 한정되어 있다.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으로 못박았다.
그렇다면 흥미롭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선비 사(士, 변호사 등), 스승 사(師, 의사, 교사 등), 섬길 사(事, 검사, 판사 등), 부릴 사(使, 대사 등)를 가리지 않고 ‘사’ 자를 쓰고 보는 세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기자는 ‘기사(記師 혹은 記士)’로 지칭하지 않고, 그냥 ‘쓰는 놈’이라고 할까? ‘당선자’도 ‘당선인’으로 바꾸는 판인데…. 필자(筆者, 역시 쓰는 놈)는 이 대목에서 나름의 개똥철학을 갖고 있다. 즉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는 늘 낮은 곳에서, ‘놈’의 자세와 신분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자가 어떻게 남들이 다 쓰는 ‘사’자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기자는 여러 팔자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다. 언제는 정치부 기자가 되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하루아침에 경제부로 발령이 나면 그때는 또 경제전문가가 된 듯이 된 수백 쪽의 경제 및 경영 보고서를 읽고 원고지 4~5장 분량으로 정리해야 한다. 그것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이다. 그러다 사회부나 전국부로 발령을 받으면 현장을 뛰어야 한다. 체육부로 가면 체육전문가로, 문화부로 가면 문화전문가로 얼굴을 바꿔야 한다. 어떤 부서에 가든, 그 날짜로 그 언론사의 얼굴이 되어야 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기사를 쓴다는 것은 순전히 그 기자의 깜냥이다.
■강제로 문이과 통합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정형편 상(스트레오타입의 이유지만) 취업이 잘된다는 이른바 ‘전화기(전기, 화공, 기계)’ 학과를 선택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간직했던 ‘기자의 꿈’은 버릴 수 없었다. 대학신문에서 ‘타고난 문과의 DNA’를 되살린 후 신문사에 입사했다.
의도하지 않은 ‘문이과 통합’을 이룬 셈이다. 그렇게 기자가 된 후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이 부서 저 부서를 돌았다. 1999년 체육부 야구담당기자로서 KBO(한국야구위원회) 사무실에서 취재 중이던 나는 편집국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문화부로 가라”는 인사 발령 통보였다. 몹시 당황했던 나의 첫마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제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었지만 인사 발령을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문화부에서 처음 맡은 분야가 ‘문화재(문화유산)’였다. 당시 풍납토성과 경주경마장 보존문제가 ‘핫이슈’로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문화유산에 관한 한 신출내기였던 나는 속성으로 문화재 공부를 하면서 마치 전문가인 양 기사를 써야 했다. 그 와중에 인연을 맺은 분이 바로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지낸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이다. 단순한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기획기사로 독자들과 호흡하자는 생각으로 그분과 함께 고고학 발굴과 역사를 접목하는 ‘한국사 미스터리’와 ‘한국사 기행’을 기획했다. 이어 고고학자 이형구 교수(선문대 석좌교수)와 함께 한국문화의 시원을 밝히는 여정인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시리즈가 이어졌다. 또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낸 이재 선생과 비무장지대 관련 전문가인 이우형 선생 등과 함께 비무장지대 일원을 답사한 기획(‘분단의 섬 민통선’)이 나왔다. 이 무렵 평생의 은사인 배기동 한양대 교수를 만나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7000건의 실록 검색
나는 그동안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주는 ‘역사 스토리텔러’를 자처해왔다. 은퇴 후에는 ‘히스토리텔러’라 한다. ‘스토리’인 역사를 아주 쉽고 친근하게 풀어준다는 뜻에서 ‘Hi’를 붙였다.
히스토리텔러로서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가는 내 나름의 방식이 있다. 우선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현재의 상황에 걸맞은 과거의 이야기를 다룰 땐 실록 등 문헌 자료를 먼저 찾는다. 그러면 어김없이 비슷한 이야기가 고구마 줄기 엮이듯 나온다. 예컨대 ‘나라의 운명을 바꾼 소주’ 관련 기사를 쓸 때는 고전DB에서 ‘소주(燒酒)’로 검색된 관련 기사가 796건에 이르렀다.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세종대왕의 주량이 소주 반 잔이며, “술은 임금도 막지 못할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은 일화 등 기승전결을 이어갈 고리를 연결해나갔다. 그런데 800건 정도의 기사 검색은 다반사이다. 어떤 기사를 쓸 때는 7,000건이 넘는 사료 및 문헌자료를 찾아 일일이 읽어본 경험도 있다. 그래야 40~50매 정도 되는 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방대한 사료, 즉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미로를 헤매다 보면 언뜻언뜻 환한 길이 보이기도 한다.
푸바오로 대표되는 중국의 판다외교와 관련된 사료를 뒤지다가 조선조 태종 때 일본이 외교선물로 보낸 코끼리 관련 기사를 보았다. 그러나 코끼리는 사람을 밟아 죽인 애물단지가 되어 유배까지 떠난 신세가 되었다. “유배지에서 단식투쟁까지 벌인 코끼리가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서 빗나간 동물외교의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세월호와 이태원 사고 등 대형참사와 관련해서는 당 태종이 황충(메뚜기) 떼가 휩쓸자 들판에 나서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면서 황충 두 마리를 삼킨 대목이 눈에 밟힌다. 대형참사가 일어나면 왕조시대 군주들은 저마다 “내 탓이오”를 외쳤다. 최고 5만 대 1의 기록적인 경쟁률을 기록한 정조 시대 과거 시험, 1만여 명에 이른 임진왜란 항왜(항복한 일본인), 어전에서 방귀 뀐 이야기까지 기록했던 조선 시대 사관,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진 무대 붕괴사고…. 이것 말고도 무궁무진한 아이템이 선조들이 남긴 사료와 문헌에 담겨 있다. 그 기록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하나씩 꺼내면 된다.
연구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공부한 연구성과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짐작하다시피 연구자들은 관련 분야에 정통한 학자들이다.
그러나 나는 스토리텔러로서 멀게는 공룡의 시대부터 가깝게는 1960년대(1·21사태)까지의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쉬운 필체로 풀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본디 기자는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게 기사를 써야 한다고 배운다). 혹여 학자들의 연구들을 잘못, 혹은 허투루 다루다가 그들이 피땀 흘려 거둔 성과에 행여 누를 끼치면 어찌 되겠는가?
■똥화석과 진흥왕 낙서
그래서 나는 기사의 아이템 주제가 되는 논문을 최소한 90% 정도는 이해할 때까지 해당 연구자를 들들 볶는다. 논문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주변의 논문과 단행본, 도록까지 되도록 샅샅이 뒤져보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래야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케플러보다 먼저 초신성 폭발을 관측한 조선의 천문관들’과 ‘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 ‘신라에서 유행한 이모티콘과 줄임말, 경산 소월리 출토 사람 얼굴 모양 항아리’ 등은 소위 영혼까지 탈탈 털린 어려운 기사였다. 연구자들이 인용한 구절의 출전을 찾느라 하루 밤낮을 허비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찾지 못하면 그 인용구는 근거가 없으니 버릴 수밖에 없다.
고고학 발굴(인양)과 관련된 이야기도 절대 허투루 넘어갈 수 없다. 나는 고고학 조사단의 분투로 수백 수천 년 만에 발굴, 혹은 인양된 유물에 ‘스토리’라는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발굴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대중의 눈높이에 오를 단서를 샅샅이 찾는다. 물론 발굴단 요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중 8,000년 전 신석기인의 배설물인 ‘똥’ 화석이 화두에 올랐고, 발굴장 인부가 찾아낸 0.05㎜의 금박 화조도, 꿀병과 참기름병으로 쓰인 고려청자, 성류굴의 어둠 속 비밀통로에서 현현한 진흥왕의 낙서, 가야 무덤 속의 경비견과 신라 고분 속의 반려견 등은 발굴단 요원들의 눈썰미를 이야깃거리로 가공한 것이다.
■아는체 하시는 계기가 되길...
이렇게 문화재 전문기자로서 우리 문화재를 대중에 알리는 작업을 오랜 시간 해왔다. 그 일환으로 2011년 8월부터 은퇴 이후인 현재까지 13년 동안 〈경향신문〉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연재하고 있다. 연재횟수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매주 혹은 격주로 다뤘으니 400회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 와중인 2021년부터 3년 가까이 〈주간경향〉에서 ‘이기환의 Hi-story’라는 제목의 역사칼럼도 썼다. 이 책은 그중 일부를 골라 단행본으로 꾸민 것이다. 나는 이 책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역사가 암기과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인식되었으면 한다. 나의 수고로 읽는 이들이 상식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히고 시쳇말로 ‘아는 척’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그간에 다뤘던 연재물을 엮어 시리즈물로 펴내 대중과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이 연재물과 단행본은 나만의 저작이 아니다. 학계에서 혹은 발굴장에서 피땀을 흘리며 공부한 여러 연구자와 함께 만든 것이다. 그분들의 이름자를 기록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지만 혹시 빠지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차라리 생략함으로써 모든 분에게 용서를 비는 게 낫겠다.
마지막으로 요즘은 종이신문을 두고 ‘철 지난 매체’라 폄하하지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나 ‘빅카인즈 고신문 아카이브’ 등에서 검색되는 옛날 신문과 그 기사들을 정식 사료로 인용하는 연구논문을 보면 갖가지 상념이 든다.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 뉴스를 1면, 2면, 3면, 이런 식으로 ‘중요도’와 ‘가치’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사료’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측면에서 종이신문이야말로 ‘현대판 실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사료를 지금도 나와 같은 수많은 기자들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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