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칠십이오. 쑥스럽지만 얼마나 걱정되면 나섰겠어요?”(한영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장)
노학자가 허허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쑥스럽다”고 운을 뗐지만 음성은 단호했다. 지난 24일 한영우 위원장을 비롯한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 15명이 ‘풍납토성 보존을 위한 우리의 의견’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엔 한영우·정영화·지건길·주보돈·고혜령·최광식·김원·손영식·배기동·이형구·장헌덕·최기수·안병욱·김성구·전형택씨 등 사적분과 위원들이자 문화유산 분야 원로들이 빠짐없이 서명했다.
풍납토성 발굴현장 및 유물 | 경향신문DB
왜 ‘60, 70고개’를 넘긴 문화유산계 어른들이 깃발을 들고 나섰을까. 한 마디로 백제왕성이 틀림없는 풍납토성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으면 천추의 한을 남겨 100년 뒤, 200년 뒤 후손들에게 원망을 듣는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요구는 두 가지입니다. 풍납토성 일대를 정부가 보상 매입하든지, 재건축을 허용해 고층 건물을 짓도록 하든지…. 주민들의 거센 민원에 밀려 문화재위원회는 사면초가입니다. 언제까지 민원에 시달려야 할까요.”
현재 풍납토성 내에서는 터파기는 2 이하로 하고, 5층 이하 건물만 재건축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백제왕성의 유적·유물층이 2 이하에서 그대로 남아있기에 불가피한 조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민들 입장에서는 보상 및 이주대책도 없고, 희생만을 강요하라는 것이기에 불만이 충만할 수밖에 없다.
“500년 도읍지(BC 18~AD 475년)를 이렇게 홀대하는 법은 없습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정부가 특별법을 만들어 주민들의 보상 및 이주대책을 빨리 마련해야 합니다. 예컨대 주변 신도시로 이주시키는 방안을 포함해서….”
요즘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서울시가 한성백제박물관을 풍납토성이 아닌 몽촌토성 내에 세운다는 방침에 대해 풍납동 주민들이 좌절감을 느낀 것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희생만 강요하면서 아무런 인센티브도 주지않는 무대책의 보존이라는 것이다.
노학자들이 이번에 머리띠를 두르고 나선 이면에는 차기 정부의 지나친 개발 드라이브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실제 노학자들이 중심이 된 풍납토성 보존 TF팀은 대선이 끝난 뒤 삼삼오오 모여 차기 정부의 개발 정책에 걱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주민들은 차기 정부의 개발정책에 기대를 걸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민원에 밀려 고층 건물의 재건축을 허용할지 모른다”(성명서의 내용)는 위기감 때문에 깃발을 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개발독재’라는 말을 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것에도 정치적인 해석이 따라붙기도 하지만, 어떻든 발굴 현장이나 문화유산 현장을 찾아다니던 박전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학자들이 많다. 백성들이 한끼를 걱정했던 시대였는데도…. 아무리 경제살리기가 화두라지만, 언필칭 문화의 시대라는 21세기 정부라면 문화유산의 가치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유산계 노학자들이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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