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근 사찰(장의사·승가사)에 다녀가던 임금이 잠깐 쉬어갔던 ‘고려판 카페’인가, 혹은 ‘별서’인가, 아니면….
얼마 전 서울 종로 신영동의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1382㎡)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현재까지 건물터 3기를 비롯해 석축과 진입시설(계단), 담장, 배수로 등이 확인됐다. 중심 건물터는 파괴됐다. 그러나 두번째 건물터도 잔존 면적(길이 20.1×너비 5.5m)만 33.44평에 달한다.
건물의 입지조건과 배치 또한 심상치 않다. 땅을 깎지 않고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조성한 고려 궁궐(만월대)을 빼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유물의 위상 또한 만만치 않다. 건물 기초부에서 확인된 진단구(액막이용 공양물) 중에는 상급품의 고려자기가 확인됐다. 또 염주로 추정되는 수정 구슬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동판이 출토되었다.
무엇보다 유적의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명문 기와(‘승안 3년·承安三年)가 출토됐다. ‘승안’은 금나라 장종(1189~1208)의 연호(1196~1200)이다. ‘승안 3년’은 1198년(고려 신종 원년)을 가리킨다. 발굴단(수도문물연구원)은 이 건물터의 위상이 심상치않다고 본다. 대체로 고려 왕실과 관련된 특수건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다퉈 삼각산에 오른 고려임금들
우선 건물터의 위치가 수상쩍다.
유서깊은 사찰(터)인 장의사(남쪽 350m·세검정 초교 운동장)와,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사>에 고려 국왕이 이 승가사(굴)과 장의사에 행차하는 기사가 속출한다.
즉 “1090년(선종 7) 10월19일 왕(선종·1083~1094)이 승가굴과 장의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9년 뒤인 1099년 9월28일 선종의 뒤를 이은 숙종(1095~1105)의 삼각산 행차도 눈길을 끈다.
“왕이 왕비 및 원자 등과 우세승통(대각국사 의천·1055~1101)을 데리고 삼각산에 왔다”는 것이다.
의천은 문종(1046~1083)의 넷째아들이자 숙종의 동생이다.
며칠 뒤인 윤9월5일 숙종 일행이 승가굴에 행차해서 재를 올렸다는 기사가 특별하다.
“임금이 재를 올린 뒤 승가굴에 은으로 만든 향완(향로)과 수로(손난로) 각 1벌, 금강자(모감주 나무로 만든 염주)와 수정염주 각 1관, 금허리띠 1개, 금화과(金花果)를 수놓은 깃발, 차, 향, 옷한벌, 비단을 시주했다.”
5년 뒤인 1104년(숙종 9) 8월5일에는 “남경에 행차한 숙종이 측근을 보내 어의와 차, 향을 가지고 승가굴에서 기우제를 지내도록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숙종은 17일 뒤인 22일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궁과 함께 승가굴에 직접 들러 재를 올리고 속옷을 바치면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다.
이후에도 예종(1105~1122))이 1108·1110·1117년에 승가굴과 장의사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어 1167년에는 의종(1146~1170)이 승가사와 장의사는 물론 문수사까지 들렀다는 기사가 보인다.
■고려판 ‘세종대왕’이 있었다
왜 고려 임금들이 개성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삼각산(북한산)까지 행차했을까.
우선 삼각산이 고려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현종(1009~1031)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산이다.
현종이 누구인가. ‘세종대왕’ 하면 만고의 성군인 조선조 세종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보다 200년 앞선 고려시대에 ‘세종대왕’ 소리를 들었던 군주가 있었다. 바로 현종이다.
1254년(고종 41) 10월19일 몽골의 계속된 침략에 고달파진 고종(1231~1259)은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태묘에 나가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달라”는 재를 지냈다.(<고려사> ‘세가·고종’) 그중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는 지혜와 용맹스런 자질을 겸비하고 큰 난리를 평정하여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워….”
본래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거나 중흥시킨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왕의 사후에 붙이는 호칭)이다.
물론 고려 현종이 정식으로 ‘세종’의 묘호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려시대 내내 위기에 빠진 나라를 중흥시키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세종대왕’으로 추앙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숱한 업적 가운데 거란의 2·3차 침입을 물리친 공이야말로 으뜸이다.
특히 강감찬 장군(948~1031)의 귀주대첩(1018) 당시 살아남은 거란군의 수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볼 수 없었다. 이때 불심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으려 했던 ‘초조대장경’의 간행도 크나큰 문화적 업적이다. 고려는 이후 인종(17대·1122~1146) 때까지 130여년간 전성기를 구가한다.
■사생아로 태어나 승려로 성장한 임금
그러나 고려판 ‘세종대왕’ 현종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996)은 태조 왕건(918~943)의 8남이었다.
그런데 왕욱이 승하한 경종의 부인(헌정왕후)과 사통해서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대량원군(훗날 현종)이었다.
훗날 왕위에 오른 목종(997~1009)에게 후사가 없게 되자 후계구도를 두고 암투가 벌어졌다.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964~1029)가 내연관계인 김치양(?~1009)과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밀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핍박했다.
대량원군, 즉 현종은 결국 천추태후의 강압 속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1006년(목종 9) 현종이 삼각산 신혈사(진관사로 추정)에 머물렀을 때부터 천추태후의 암살기도가 시작됐다.
“삼각산에 (천추)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 해치려 했다. 신혈사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그를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설치했다”(<고려사> ‘세가·현종 총서’)는 것이다.
결국 강조(?~1010)의 정변(1009년)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목종을 시해한 뒤 현종을 옹립했다.
<고려사>가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고사를 전한다.
대량원군, 즉 현종의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는데 술사가 기막힌 해몽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닭 우는 소리는 ‘꼬끼요(고귀위·高貴位, 높고 귀한 자리)’이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임금 자리가 가깝다)’이니 왕위에 오를 징조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바로 이 삼각산과의 인연을 잊지 못했다.
승가사 뒷편의 석굴에 조성된 등신좌상(승가대가상)의 광배(불상의 뒤에 조성한 원형장식물·부처의 빛 상징)에는 ‘태평4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태평’은 요(거란) 성종(야율융서·재위 982~1031)의 연호(1021~1031)이다. ‘태평 4년’이면 1024년(현종 15)에 해당된다.
현종이 승가굴에 조성되어있는 승가대사상에 화려한 광배를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종 이후 승가사, 장의사 등에 임금들이 자주 행차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현종의 후손인 덕종(1031~1034)·정종(1034~1046)·문종(1046~1083)·선종(1083~1094)·숙종(1095~1105)·예종(1105~1122)·인종(1122~1146)까지 모두 명군 소리를 들었다. 이 또한 현종의 음덕이다. 그러니 삼각산은 고려를 태평성대로 이끈 현종의 숨결이 숨쉬고 있는 성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임금의 삼각산 행차는 일종의 성지순례로 여겼을 것이다.
이번에 성지 순례의 길목에서 그 비슷한 시기의 고려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니 그 성격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는 것이다.
■남경건설기념으로 상여금까지 지급
이번 발굴 성과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장의사-발굴지역-승가사 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자하문(창의문) 고개를 넘어서면 청와대와 경복궁에 닿는다.
그런데 지금의 청와대·경복궁 인근 지역이 어디냐. 고려왕조가 건설한 궁궐인 ‘남경’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남경 건설을 주도한 군주는 다름아닌 현종의 아들·손자인 문종과 숙종이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문종이 1067~1068년 경기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킨 뒤 새 궁궐의 창건을 모색한다”고 썼다.
그러나 실제로 이 궁궐공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30여 년 후인 1099년(숙종4) 9월부터 남경 건설 계획을 본격 논의한다. 숙종의 명을 받은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1036~1115)가 1101년(숙종6) 유력 후보지를 답사한 결과를 보고한다.
“노원역과 해촌(도봉산 아래), 용산 등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지만 도읍을 세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삼각산(북한산) 면악(북악산)의 남쪽이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 문헌에 부합합니다.”(<고려사> ‘세가·숙종)
이듬해인 1102년(숙종 7) 중서문하성이 ‘동으로는 대봉(낙산), 남으로 사리(한강대교 부근), 서로 기봉(무악재), 북으로 면악(북악)을 긋는’ 남경의 도시계획도를 완성했다.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궁궐이 완공됐다.
1104년(숙종 9) 임금은 남경을 친히 찾아와 10여일 머무르며 정전(연흥전)에서 백관의 축하인사까지 받았다. 숙종은 남경 건설 기념으로 신료·군사들에게 상여금(관전·나랏돈)을 지급했다.(7월27일)
숙종 일행이 삼각산 승가굴에 행차해서 기우재를 지낸 것도 바로 이때 였다.
■4개월씩 머물면 36개국이 조회
그러나 이렇게 남경을 조성했지만 고려 조정은 정식으로 천도하지는 않았다.
1096년(숙종 원년) 김위제(생몰년 미상)가 올린 상소문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위제는 지리도참서인 <도선기>를 인용해서 “임금이 해마다 중경(개경)과 서경(평양), 그리고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조회한다”고 아뢰었다.(<고려사> ‘열전 김위제’)
“고려개국 160년 후에는 목멱양(남산 북쪽)에 도성을 건설하고 1년에 4개월 동안 머무르시면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이후의 임금들은 풍수지리에 따른 ‘순주(巡駐·돌아가며 머뭄)’와, 현종의 자취를 찾는 ‘성지 순례’ 차원에서 남경을 찾았다.
예컨대 예종과 인종은 이곳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연회를 베풀었다. 1128년(인종 6) 남경 궁궐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 게중에는 남경 나들이를 주색잡기의 기회로 삼은 임금도 있다. 훗날(1170년) 무신란을 부른 의종은 “남경을 방문한 임금과 신하들은 아침부터 다음날 샐 때까지 흠뻑 취해있기 일쑤였다”(<고려사절요>)고 비판한다.
1285년(충렬왕 2) 9월 충렬왕과 그 부인인 제국대장공주(1259~1297)가 남경에 행차했다는 <고려사절요> 기사가 보인다.
“남경부사 엄수안(?~1298)이 삼각산 문수굴에 충렬왕 부부의 행차를 권하면서 새로운 길을 뚫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했다.”
남경행차 기록은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도 보인다. “왕이 견주(양주)에서부터 남경을 순행하고 돌아왔다”는 <고려사> 기사가 그것이다.
■경복궁터에서 쏟아져 나온 고려기와의 정체
그렇다면 북악산의 아래에 조성했다는 남경 궁궐터는 어디인가.
<태조실록>은 “1394년(태조 3) 9월9일 고려 숙종 때 경영했던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궁궐터(경복궁)를 정했다”고 기록했다. 남경의 궁궐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증거자료는 이미 2007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즉 경복궁 흥복전지의 도랑유구에서 고려시대 기와 및 전돌이 속속 출토(39점)된 것이다. 이 가운데 ‘관(官)’ 혹은 ‘궁(宮)’자가 찍힌 명문기와는 이 일대에 고려의 궁궐인 남경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최근 남경터와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만한 논문(오동선·김동희의 ‘고려시대 남경 궁궐의 위치 비정’, <한국중세사연구> 71권71호, 한국중세사학회, 2022)이 발표됐다. 이 논문은 흥복전지 등 경복궁 일원에서 확인된 17점의 일휘문(평평한 면에 새긴 원형돌기문양) 막새의 양식을 개성 고려 궁지 등 다른 곳의 출토유물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경복궁 흥복전지 등에서 확인된 고려 기와는 대개 12세기 전반~14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1104년 완공되었다는 남경의 조성연대와 맞아 떨어진다.
고려기와가 출토된 흥복전(외국사신 접대 공간)이 경복궁 중건 당시, 즉 1865~68년에 조성된 전각이다.
즉 1390년대 경복궁을 처음 조성했을 때는 궁궐의 영역에서 벗어난 후원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고려 숙종 때 조성한 궁궐터가 좁아 그 남쪽에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마련했다”는 <태조실록> 기사가 눈에 밟힌다. 고려 기와가 확인된 흥복전지 권역이 1102~1104년 조성된 고려 궁궐터에 속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남경 궁궐터는 향원정~청와대 상춘재 사이?
논문은 개성 만월대(궁성)와 현 경복궁터(고려 남경 궁궐터를 포함) 등의 입지를 비교해보았다.
조선전기 경복궁 조성 때 고려 궁성의 입지와 배치구조를 참조했을 테니까….
주목할 부분은 하천~궁 정문까지의 거리이다. 개성 만월대의 경우 하천~궁 정문까지의 거리가 1.5㎞이다. 그런데 이것을 경복궁에 대입시켜보면 청계천에서 1.5㎞ 지점은 향원정 중앙부에 해당된다.
또 개성 만월대의 경우 남대문~궁궐 정문 사이의 거리가 1.8㎞ 정도된다. 현 경복궁의 경우 남대문(숭례문)에서 1.8㎞의 거리는 흥복전지 쯤이 된다. 남대문에서는 고려시대의 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
남대문(숭례문)은 고려 남경의 관문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해보면 어떨까. 현 경복궁의 흥복전지와 향원정의 어디 쯤에 고려 남경 궁궐의 정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개성 고려 궁성의 남북길이는 대략 400m 정도된다. 그렇다면 남경의 궁궐은 남으로는 향원정(혹은 흥복전)에서 북으로는 상춘재(청와대)까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려판 세종대왕’인 현종의 숨결이 담겨있는 고려의 성지인 삼각산과, 영원한 태평성대를 꿈꾸며 조영한 남경….
그 사이의 길목에서 현현하고 있는 900년전 고려 건물터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36개국의 조회를 꿈꿨던 고려의 흔적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제 청와대 속 고려 궁궐의 자취를 찾아봄이 어떨까.(이 기사를 위해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 정요근 서울대 교수,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 오동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오동선·김동희의 ‘고려시대 남경 궁궐의 위치 비정’, <한국중세사연구> 71권71호, 한국중세사학회, 2022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신영동(248-32번지 일원) 도시형생활주택 신축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2023
남동신, ‘북한산 승가대사상과 승가사상’, <서울학연구> 제14호, 서울시립대서울학연구소, 2000
국립문화재연구원, <경복궁 흥복전지 발굴조사보고서>, 2008
대통령경호실, <청와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2019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백악산의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종합학술보고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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