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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독서휴가'는 세종의 또다른 업적…"죽어라 책만 읽으라" 했다

1531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독서당계회도’의 부분. 임금의 명에 따라 독서휴가를 받은 관리 12명이 두모포(동호대교 북단)인근에 조성된 독서당 앞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 시대에 ‘셰익스피어 휴가(Shakespeare Vacation)’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관리들에게 3년에 한번씩 유급휴가를 주는 대신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이끈 군주가 독서를 나랏일의 으뜸으로 쳤다는 얘기다. 그러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빅토리아 시대보다 무려 400년 이상 앞선 조선의 세종대왕이 그와 같은 제도를 시행했으니 말이다.
1426년(세종 8) 세종이 집현전 관리인 권채(1399~1438)·신석견(1407~1459)·남수문(1408~1442) 등에게 특명을 내린다.
“나이가 젊고 전도양양한 너희를 집현관에 임명한 이유는 글을 익혀서 실제 효과를 나타내라고…. 하지만 직무 때문에 독서에 힘쓸 겨를이 없으니, 이제부터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라.”(12월11일)
임금이 ‘책 읽을(讀書) 겨를(暇)을 하사(賜)했다’고 해서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한다. 쉬운말로 ‘독서휴가제’라 할 수 있다.
독서휴가자의 자격은 ‘통훈(정3품) 이하 문신으로서 문학이 뛰어난 자’(<대전회통>)로 규정됐다. 
이 제도는 1773년(영조 49)까지 48차례나 이어졌으며, 총 320명이 혜택을 받았다. 독서휴가제는 정조 즉위(1776)와 함께 규장각이 설치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명 황제에게 몽둥이 매질당한 사신
조선왕조는 왜 그렇게 ‘독서에 진심’이었을까.
세종이 맨처음에 특별히 ‘젊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독서휴가를 준 이유는 분명했다. 
세종은 1420년 학문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집현전의 업무가 너무 과중했다.
국왕과 세자에게 강의하는 업무는 물론이고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사관·시험관·지제교(임금의 교서 작성)·사신 등의 역할까지 겸해야 했다. 세종은 그 때문에 촉망받는 집현전 관리들을 업무에서 해방시켜 ‘책만 읽으라’고 명한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474년(성종 5) 4월8일 영사 신숙주(1417~1475)의 언급이 함축적이다.
“모든 학자들이 과거급제 후에는 출세만을 생각하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 지경이니 누가 학문에 힘쓰겠습니까.”
신숙주는 급제 후에는 책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죽기 살기로 출세만 좇는 풍토를 지적한 것이다.
또 하나 ‘독서휴가제’의 으뜸 이유가 있었다. ‘중국과의 외교에서 절대 꿇리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판 ‘중꺾마’일까. 
개국(1368)한지 30년도 되지 않았던 명나라는 역시 새롭게 왕조가 바뀐 조선(1392)의 기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개국초(1392~97년)부터 “조선이 명나라에 올린 표전문(외교문서)에 황제를 조롱하는 문자가 섞여있다”면서 조선 조정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 뿐이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권신인 이인임(?~1388)의 사돈이니 아들이니 하면서 ‘조선왕의 자격이 없다’고 끈질기게 괴롭혔다. 
아주 기분 나쁜 수모도 겪었다. 1394년(태조2) 명나라를 방문한 사신 이염(?~1403)이 명태조(주원장·재위 1368~1398)으로부터 초죽음에 이를 정도로 몽둥이 매질을 당한 것이다.
“황제가 꿇어앉은 이염의 모습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꾸짖고 머리를 숙이게 한 뒤 몽둥이로 쳐서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약을 마시고 겨우 살아났다.”(<태조실록> 1394년 8월15일)
명 황제는 이염이 귀국길에 타고 갈 말(馬)도 주지 않았다. 결국 이염은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명 황제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사신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1442년 독서휴가자 명단을 보라!
중국과의 사대외교를 펼쳐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이런 수모를 견뎌야 했다. 
또한 조선에 파견되는 명나라 사신들이 내세우는 조건이 있었다. “조선의 뛰어난 문사들과 시를 읊으며 화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사람이 시를 읊으면 곧바로 화답하는 것을 ‘창화(唱和)’라 한다. 
당시 ‘중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국한 명나라는 ‘나름 문교(文敎)에 일가견이 있는’ 조선인들에게 한수 지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 역시 꿀릴게 없다고 생각했다. <성종실록>에는 “우리가 그들(명사신들)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짐하는 내용(1476년 5월15일)이 나와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시작한 독서휴가제, 즉 사가독서제가 실제로 효과를 얻었을까. 그랬다. 
세종 연간에 독서휴가의 혜택을 받은 인물은 9명이다. 그중 앞서 거론한 3명(권채·남수문·신석조)은 1426년 첫번째로 선발된 이들이다. 세종은 16년 후인 1442년(세종 24) 새롭게 6명을 ‘독사휴가자’로 선발했다. 신숙주(1417~1475)·박팽년(1417~1456)·성삼문·1418~1456)·하위지(1412~1456)·이개(1417~1456)·이석형(1415~1477) 등이다.
24세(성삼문)~30세(하위지) 등 전도가 창창한 젊은 인재들이었다.

■조·명 학자간의 시문배틀
이 독서휴가의 진가가 발휘된 순간이 있었다.돇
즉 1450년(세종 32)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명나라 사신 예겸(1415~1479)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였다. 
세종은 접반사(사신 맞이 총책임자)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인 공조판서 정인지(1396~1478)를 내세웠다.  
물론 당대 54살의 노련한 정인지만으로도 예겸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장의 카드를 더 내놓는다.
30대 초반의 신숙주(33)와 성삼문(32)을 합류시킨 것이다. 세종은 독서휴가로 공부한 신숙주·성삼문의 문장을 믿었다.
과연 불꽃튀기는 시문배틀이 벌어졌다.
“예겸이 시 한 편을 지어 정인지에게 주니 정인지도 즉시 운을 따라 지었다. 이때부터 매일같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이 예겸과 시를 주고 받았다.”(<세종실록> 1450년 윤1월3일) 
과연 정인지는 예겸과의 ‘창화’ 대결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발휘했다. <세종실록>은 “예겸이 정인지에게 ‘그대와 나누는 하룻밤 대화가 10년 동안 글을 읽어서 얻는 소득보다 낫다’고 했다”(1450년 윤1월8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두 젊은 선비인 신숙주·성삼문의 실력은 어떠했을까.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두 선비와 시를 주고받은 예겸은 그들을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었고, 귀국할 때에는 눈물을 닦으며 이별했다”고 전했다. 
또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는 “신숙주가 예겸에게 전한 화답글은 초나라 애국시인인 굴원(기원전 343~기원전 278)의 ‘초사’와 비견된다”면서 “예겸의 문장 실력과 백중세”고 극찬했다. 
독서휴가제의 성과가 이러했으니 후대의 임금들이 어찌 계승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세종연간에 독사휴가를 받은 9명. 젊고 전도 양양한 집현전의 젊은 관리들이었다.

■필독서 없는 독서휴가 기간이 10년?
그렇다면 임금이 내려준 독서휴가의 기간이 어느 정도였을까.
1474년(성종 5) 4월8일 대사헌 이예(1419~1480)는 “10여년 동안 독서휴가를 준다면 박학능문(博學能文)의 학자가 배출될 것”이라고 건의했다. ‘10년 휴가’라면 너무 긴 것이 아닐까. 그렇지도 않았다. 
1557년(명종 12) 9월14일 예조판서 홍섬(1505~1585)은 “소신이 중종조에 독서당(독서휴가를 보낸 장소)에 뽑혀 거의 10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러나 10년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그래도 3년 이상 책을 읽었다는 실록 기사가 보인다.
즉 1426년 12월 독서휴가의 명을 받은 권채가 3년6개월 뒤인 1430년(세종 12) 5월18일 세종에게 그동안 읽은 책을 보고한 내용이다. 권채는 이때 “<중용>과 <대학>을 읽은지 3년이 되었고, 지난해 봄부터 <논어>와 <맹자>, <오경>을 읽었다”고 했다.
세종 때의 독서휴가는 3년 정도가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대에 갈수록 3개월~1년까지 신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럼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있었을까. 또 읽은 내용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러나 성종 때 만든 ‘사가독서 문신의 권장 사목(규칙)’을 보면 정해놓은 필독서는 없었다. 
또 읽은 책의 권수를 3개월마다 보고서로 올리고, 한달에 3번은 글을 지어 제출하고 채점하도록 했다. 하지만 친구간 주고받은 전별시나 흥에 겨워 읊조린 풍류시를 제출해도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로지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관원이 참석해야 하는 국가적인 행사 외에는 참석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성종실록> 1476년 6월27일)
한마디로 독서휴가가 요즘으로 치면 자기주도학습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나올만큼 자발적이었다는 뜻이다.

독서휴가의 혜택은 과거 성적이 좋은 이들에게 돌아갔다. 독서휴가자 300명 가운데 72.3%인 217명이 당상관의 지위에 올랐다.(출처: 서범종의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2호, 안암교육학회, 2003)에서

■고위관리의 보증수표
그럼 어떤 이들이 ‘독서휴가자’로 선발되었을까. 
독서휴가를 즐긴 300명을 대상으로 정리한 연구논문(서범종의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2호, 안암교육학회, 2003)에 잘 정리되어 있다.

즉 300명 가운데 과거(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인원이 52명(17.4%)에 이르렀다. 
과거합격자 중 상위권인 갑과(2~3등)까지 포함하면 113명(37.7%)에 달했다. 아무래도 과거 성적이 좋은 이들이 독서휴가의 혜택을 더 받았다는 얘기다. 또한 300명 가운데 훗날 정3품 이상의 당상관에 오른 이가 217명(72.3%)에 이르렀다. 
‘독서휴가는 고위관직으로 가는 보증수표’였던 셈이다. 이 가운데 상신(삼정승) 37명, 문형(대제학) 52명을 배출했다. 
특히 학문와 도덕을 겸비한 선비만이 맡을 수 있다는 대제학은 반드시 ‘독서당(독서휴가자들이 책을 읽은 곳) 출신’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예컨대 1604년(선조 37) 10월16일 대제학의 물망이 오른 좌참찬 류근(1549~1627)은 “제가 적임자라서가 아니라 일찍이 사가독서를 했다는 이유로 전례에 따라 후보가 된 것에 불과하다”고 극구 사양했다. 
‘독서휴가자’들은 세종 연간의 신숙주·성삼문처럼 외교관으로도 ‘발탁’되었다.
세종 이후 문종~인조조 사이에 외교접대사신이 된 18명 가운데 절대 다수인 16명이 ‘독서휴가자’ 출신이었다.
역시 선조대에 접반사(명 사신의 접대를 책임진 임시 관직)로 임명된 대제학 류근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종사관(정 5~6품)의 경우 본래 독서휴가자 출신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관례”(1606년 1월4일)라고 밝혔다. 

■사육신 6명 중 4명이 독서휴가자 출신 
독서휴가자들이 짧게는 몇개월에서 길게는 10년 동안 책을 읽고, 학문에 전념한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관리로서 쓰임 받기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여겼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극적인 예가 있다. 
1442년(세종 24) 세종으로부터 독서휴가의 혜택을 받은 6명의 행보가 그렇다. 
6명 중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 등 4명이 누구인가. 쫓겨난 어린 임금(단종)의 복위(1456)에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명단에 올랐다. 나머지 2명은? 신숙주는 수양대군(세조·1455~1468)의 편에 섰다. 이석형은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라감사였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석형은 평소 가깝게 지냈던 ‘독서휴가’ 동기생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익산 동헌에 그들을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이 때문에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그를 총애한 세조의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 
사육신 중 유성원(?~1456)은 다른 4명이 독서휴가를 받은 1442년 보다 2년 뒤(1444년) 급제했다. 또 한사람인 유응부(?~1456)는 독서휴가를 받을 수 없는 무신 출신이었다.  
어떤가. 세종이 선발한 ‘제2대 독서휴가자’(1442년) 중 4명은 대의명분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고, 두사람은 과정이야 어떻든 현실정치에 몸을 담았다. 신숙주는 세조를 도와 조선의 기틀을 쌓은 인물이고, 이석형 역시 세조의 환대 속에 조선의 문치에 도움을 주었다. 이석형은 세조가 서거하자 그 자초지종을 명나라에 설명하는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를 방문했다. 역시 ‘독서휴가’에서 닦은 문장과 학문을 외교분야에 활용한 것이다.   

■보물로 거듭난 독서휴가자들의 모임도
최근 문화재청이 사가독서, 즉 독서휴가와 관련된 그림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중종 때인 1516~1530년 “공무에 신경쓰지 말고 책만 읽으라”는 명을 받은 독서휴가자들의 모임을 그린 ‘독서당계회도’이다. 
이 작품은 본래 일본 교토(京都)박물관장을 지낸 간다 기이치로(神田喜一郞·1897~1984) 소장품으로 전해진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간다의 사망 후 유족들로부터 작품을 입수한 다른 소장자가 미국 경매에 내놓은 것을 재단측이 구입 환수했다.
현전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독서당계회도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두모포(서울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 근처) 일대의 자연 풍광과 사가독서의 공간이었던 독서당, 사가독서했던 주인공들이 한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 아래에는 계회 참석자 12명의 명단이 보이는데 이들의 호와 이름, 자(字), 본관, 생년, 사가독서 연도, 과거 급제 연도, 부친이나 형제 등의 인적사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연 주세붕(1495~1554)과, 가사 ‘면암정가’로 유명한 송순(1493~1582), 성리학의 대가인 송인수(1499~1547)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강에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린 ‘독서당계회도’를 보면서 ‘독서휴가제(사가독서제)’를 공부하다 보면 왠지모를 부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누군가 “기사 신경 쓰지 말고 책이나 읽으라”며 선뜻 유급휴가를 내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이 기사를 위해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강혜승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 최수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주임, 차미애 국외소재연구재단 특임연구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서범종,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2호, 안암교육학회, 2003
안휘준, <국보 10-회화>, 웅진출판사, 1992
최선경, ‘조선시대 사가독서(賜暇讀書)제를 모델로 한 대학 독서교육 프로그램의 성과와 과제’, <사고와표현> 11권1호, 한국사고와표현학회, 2018
이종묵, ‘16세기 한강에서의 연회와 시회, <한국시가연구> 9권, 한국시가학회, 2001
허겸, ‘독서당의 건축공간에 관한 연구-독서당계회도(1570년)를 중심으로’, 명지대 석사논문, 2002
김중권, ‘조선시대의 독서제도-사가독서와 독서당’, <문화재사랑>, 문화재청,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