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과 화합’. 가야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틈바구니에서도 520여년간 둥지를 틀고 살았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포함되지 않는 등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왔다. 지금까지도 동아시아의 기항지로서 번영을 누렸던 가락국(금관가야)이 왜 주변의 가야소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지 않고 5가야 등의 연맹체에 만족했는지는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말탄 무사모양 뿔잔. 철의 나라 가야의 힘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러한 가야 역사의 핵심을 ‘공존과 화합’으로 개념 정리하면서 3일부터 내년 3월1일까지 가야 역사와 문화를 재인식하기 위한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을 연다. 이번 전시는 2017년 6월 “소홀히 여겼던 가야사를 복원해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과 함께 현 정부의 국정과제가 된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의 차원에서 새롭게 진척된 연구성과를 종합하고 가야사의 역사적 의의를 소개하는 데 그 의미를 두었다.
특별전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가야 역사·문화의 특징이 철(무기)과 가야금(악기)이라는 점을 감안해 ‘가야의 본성(本性)=칼과 현’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야가 보유한 강성한 힘(칼)과,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가야금(현)을 상징했다는 것이다. 가야의 존재방식이던 공존과, 그 공존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을 의미한다.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중 금관(국보 제138호). 높이 11.5㎝, 지름 20.7㎝이며 비교적 넓은 관테에 보주형 풀잎 모양 세움장식 4개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가야 전성기의 금관이다.|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번 전시에는 삼성미술관 리움과 일본 도쿄(東京)국립박물관 등 31개 기관이 출품한 가야 문화재 2600여 점이 총출동한다. 이 중에는 가야 금관(국보 제138호·리움), 말탄 무사 모양 뿔잔(기마인물형 각배·국보 제 275호·국립경주박물관), 고령 지산동 고분 금동관(보물 제 2018호·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함안 말이산 고분 출토 항아리(44㎝·국립김해박물관)와 집모양 토기(두류문화연구원), 김해 대성동 출토 허리띠 꾸미개(대성동고분박물관), 봉황장식 큰 칼(봉황장식대도·경상대박물관), 배모양 토기(주형토기·삼한문화재연구원) 등이 눈에 띈다. 특히 호남지역에서 새롭게 소개된 가야유적과 유물이 전시된다.
함안 말이산 4호분에서 출토된 높이 44㎝의 큰 항아리. 5세기 가야산이다.|국립김해박물관
이양수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관은 “최근 발굴성과를 보면 가라국(대가야)이 남으로는 여수 고락산성, 서로는 지리산을 넘어 전북 장수 삼봉리와 남원 두락리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여러 지역을 규합했다”고 밝혔다. 최선주 학예연구실장은 “남원 운봉고원과 순천 등지에서 발견되는 가야무덤은 가야의 여러세력이 가라국 편에 섰음을 의미한다”면서 “새롭게 발굴한 호남동부지역의 가야 모습은 가야가 추구한 화합과 공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별전은 공존, 화합, 힘, 번영 등의 주제로 프롤로그와 1~4부, 에필로그 등으로 진행된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는 이것이 신화와 설화에서 그칠 게 아니라 어떻게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반추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1부 ‘공존’에서는 북방유목민·왜·신라·백제·고구려 등과 교류했음을 알려주는 각종 유물이 전시된다. 특히 다양한 가야토기로 만든 높이 3.5m ‘가야토기탑’이 눈에 띈다.
역시 함안 말이산 45호묘에서 나온 집모양 토기. 5세기 제품이다.|두류문화연구원
2부 ‘화합’에서는 호남 동부의 남원, 순천 세력을 규합한 가야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위상을 새롭게 하고 우륵의 가야금 12곡을 만들어 화합을 도모했음을 조명한다.
우륵은 음악을 통해 대가야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한 가실왕의 명에 따라 12개 지역의 통합을 상징하는 12곡을 지었다. 제3부 ‘힘’은 무기와 마구(馬具)·제철 기술 관련 유물로 상징되는 ‘철의 나라 가야의 힘’을 보여주는 파트이다. 각종 철 유물들을 전시하며, 새로운 디자인의 ‘가야무사상’을 배치함으로써 가야의 중갑기병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4부 ‘번영’에서는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이룬 가야를 ‘번영’이라는 핵심어로 전시했다. 창원 현동에서 출토되는 배모양 토기는 당시 국제항로를 다니던 외항선의 모습으로 가야인의 해상교역을 증거한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가야는 망했지만 망한 가야의 유산을 안고 살아간 ‘가야의 디아스포라’를 이야기한다. 최근 동해 추암동에서 출토된 가야토기들은 가야 멸망 후 신라 영역인 동해안 지역까지 옮겨와 살아야 했던 가야인의 디아스포라를 보여준다. 망국의 아픈 사연을 안고 이주한 가야인들이 지금까지 남긴 유산은 가야금이다. 가야금이야말로 가야가 남긴 공존과 화합의 상징이며, 그 공존과 화합을 담은 가야금 음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온식 학예연구사는 “가야는 강자의 패권으로 전체를 통합하지 않았고, 언어와 문화의 바탕을 공유하면서 각국의 개별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며 “이것이 가야의 존재방식이었고, 또한 멸망의 원인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가야는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신라에 병합되어 민족사로 편입되었다”면서 “가야의 운명을 보면서 국가란 무엇이고 평화란 무엇인지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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