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오성과 한음(이덕형·1561~1613)’ 설화로 유명한 분이다. 한음과 함께 실무능력이 탁월한 관료학자로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알려졌다.
백사 이항복이 52살 때 6살 짜리 손자에게 직접 써준<천자문>.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 백사가 52살 때 6살 손자(이시중·1602~1657)에게 손수 써준 <천자문>이 있다. 백사는 이 천자문을 써준 뒤에 “50살 노인이 힘들게 쓴 것이니 할아비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직접 손으로 쓴 천자문 가운데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것이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백사가 쓴 친필 중에는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이 있다. 백사가 유교경전 <예기> 중 제사와 관련된 ‘제의’, ‘제통’, ‘예기’ 편을 써서 병풍으로 만든 것인데, 백사의 9대손이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첩으로 제작했다. 백사는 “나이 어린 학도나 아이들이 제사를 지낼 때 무턱대고 윗사람만 따라할 뿐, 그것이 무슨 의의인 줄 전혀 모르고 있음을 걱정해서 엣 경전에 나온 제의(祭儀)를 직접 써서 병풍으로 남긴다”고 기록했다.
백사가 <천자문>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의 15대 종손인 이근형씨(47·사업가)는 21일 400년 넘게 종가에서 간직해온 조선의 명재상인 오성부원군 이항복 관련 유품 1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유물 중에는 백사가 자손교육을 위해 쓴 <천자문>과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에 받은 <호성공신 교서>와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등이 있다. 14대 종부 조병희씨(74)는 “백사 할아버지 유물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면서 “박물관에서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종손 이근형씨도 “백사 할아버지 유품이 국가 기관에 보존되어 다음 세대에도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교서로 보물급 문화재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작위를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증품 가운데는 <천자문>,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 외에도 백사가 임진왜란 직후 호성공신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인 <호성공신 교서>가 눈에 띈다.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교서이다. 백사는 37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이항복이 쓴 <백사선생 수서 제병 진적첩>. <예기>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써서 병품으로 남겼다. 백사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병풍을 제작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선조는 호성공신 86명 중에 이항복과 정곤수(1538~1602) 등 2명에게만 1등의 작위를 내렸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가 바로 그 유물이다. 이 교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임금을 수행한 백사의 공적’이 자세히 언급돼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한 것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忠勤疇衛予於顚越備嘗終始艱險孰逾鄕之賢勞).”
교서에는 공신호(功臣號)와 공적, 특권(공신 초상화, 품계, 토지·노비·은자)과 공신 명단이 적혀 있다. 백사는 호성공신을 포함, 모두 5차례나 공신에 임명되었다. 35살 때인 1590년(선조 22년) 정여립(1546~1589)의 난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1613년(광해군 5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재위 1608~1623)을 호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임해군(1572~1609) 역모사건 처리 공로로 익사공신 2등에, 김직재(1554~1612) 옥사처리의 공로로 형난공신 2등에 각각 임명된 바 있다.
백사 이항복이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다음 하사받은 초상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보통 공신의 후손들은 하사받은 초상화를 가문의 영광으로 귀하게 보존한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백사의 가문도 초상화가 낡으면, 베껴 그려서 후모본(後模本)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계승했다”며 “이번에 기증된 이항복 초상화 2점 모두 1604년 호성공신 초상과 1613년 위성공신 초상을 18세기에 모사하여 보존한 것”이라 설명했다.
이항복 관련 유물들은 후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보존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전쟁 때도 후손들이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피난가면서 이 유물들을 모시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평소에도 정기적으로 초상화나 글씨를 햇볕과 바람에 말려 포쇄하며 보관에 힘썼다”고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항복 종가 기증 기념 특별전을 2020년 3월부터 7월까지 상설전시실 서화관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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