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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가요속 '사랑' 단어, 90년간 4만3000번이나 사용됐다…국립한글박물관 특별전 집계

노랫말에서 사용된 단어중 최고는 역시 ‘사랑’이었다. 그 다음을 ‘말’과 ‘사람’, ‘눈물’, ‘때’가 이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15일부터 10월18일까지 기획특별전(<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을 열면서 1920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된 노래 2만6000여곡을 대상으로 노랫말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빈도를 조사한 결과 ‘사랑’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목포의 눈물’ 가사지. 가사 중 ‘삼백연 원안풍’의 원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었다. 300년전 무렵이면 임진왜란(1592~1598년)이 연상된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가사를 바꿨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박물관측이 대중가요 노랫말의 발자취와 노랫말에 담긴 우리말과 글의 묘미를 소개하는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한성우 인하대교수에게 조사를 의뢰해 1920~2010년 사이 90년간 유성기 음반과 <한국가요전집>(1980년·세광출판사), 노래방 업체에 등록된 노랫말들을 전부 분석한 결과다.

1위를 달린 ‘사랑’ 단어는 무려 4만3549회가 나왔고, 그 뒤를 ‘말(2만2049회)’과 ‘사람(1만9559회)’, ‘눈물(16,650회)’, ‘때(15,949회)’, ‘맘(마음)(15,705회)’이 이었다. ‘가슴(1만3980회·11위)’과 ‘세상(1만3581회·12위)’, ‘눈’(1만1354회·13위)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노래 제목이나 노랫말에 ‘사랑, 말, 사람, 눈물, 마음, 가슴, 세상’ 등의 상위 빈도 단어가 들어 있고, 사랑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 19곡을 믹싱하여 소개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사지.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발표됐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이며 노래는 이해연이 불렀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대의 아픔을 담은 노랫말의 의미이다. 

단적인 예로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로 시작되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손목인 작곡·문일석 작사)은 1935년초 오케레코드가사가 개최한 전국 ‘향토 찬가’ 모집에서 당선된 노래다, 임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사랑과 관련된 노래로 알려져있지만 이 노래에는 숨겨진 코드가 있다. 바로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과 ‘임’이라는 가사다. 

가사는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임자최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마음 목포의 노래”로 끝난다. 그런데 이 ‘삼백연 원안풍’의 원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었다. 300년전 무렵이면 임진왜란(1592~1598년)이 연상된다. 

나훈아의 ‘고향역’이 실린 음반(1972년).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음을 담은 노랫말로 돈을 벌기위해 도시로 떠나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며 큰 인기를 끌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노랫말에 등장하는 ‘임’ 역시 연인이 아니라 ‘조국의 광복’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어로 알려졌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우리말의 표기와 발음을 미묘하게 변형한 노랫말을 슬쩍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일제강점기 백성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코드로 이해됐다(손목인의 <자서전>·1992년). ‘목포의 눈물’은 음반 발매 당시 5만 장 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김미미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간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지만, 대중가요 앨범이나 가수가 아닌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가수 남진씨의 ‘임과 함께’ 음반(1972년).  1970년대 들어 산업화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담은 노랫말이 유행했다. 서구 영화 속 펼쳐진 초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남진의 ‘임과함께’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는 국내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낙화유수’(1929년)부터 진정성 있는 노랫말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IDOL’까지 총 190여 곡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더불어, 각종 대중가요 음반 및 가사지, 노랫말 책, 축음기 등 총 206건 222점의 전시 자료를 소개한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대중을 위해 생산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었다. 따라서 노랫말 속에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와 정서를 담고 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실린 1집 음반. 삶의 고뇌를 아침이슬에 빗댄 노래였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목포의 눈물’에서 보듯 1920~1945년 이전까지는 식민 지배 아래에서 대중이 겪은 설움과 울분을 비유적인 단어들로 표현하는 시 같은 노랫말이 유행했다. 1950년 전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7년 추정)와 미8군 쇼 등을 통해 들어온 이국적인 지명과 리듬을 섞은 ‘늴리리 맘보’(1957년) 같은 노랫말이 인기를 얻었다. 

예컨대 ‘슈샤인 보이’(1954년)의 ‘헬로 슈-샤인 헬로 슈-샤인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라는 경쾌한 노랫말 뒤에는 한국 전쟁의 피난살이 중에 생긴 전쟁고아들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시대상이 감춰져 있다. ‘앵두나무 처녀’(1956년)의 ‘서울이라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라는 노랫말에는 경제 개발에 따른 이촌향도 현상과 녹록치 않은 도시 생활에서의 좌절감이 나타나 있다. 1960~70년대에는 도시의 화려한 성장과 이상을 표현한 ‘임과 함께’(1972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고향역’(1972년) 노랫말이 동시에 유행했다.  

1987년 9월3일 김민기의 ‘아침이슬’ 검열자료. '규제사유'란에 '묘지'를 '대지'로 바꾸라는 지시내용이 선명하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묘지’라는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됐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1970~80년대에는 포크송과 발라드가 유행하면서 ‘아침이슬’(1971년)처럼 삶의 진지한 성찰을 보이거나 ‘사랑하기 때문에’(1987년)처럼 서정적인 노랫말이 대중에게 큰 반응을 얻었다. 특히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삶의 고뇌를 아침이슬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였는데,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모임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금지곡이 됐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묘지’라는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아침이슬’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풀어낸 노랫말로 사랑 노래가 대부분이었던 대중가요의 노랫말에 큰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

1990년대 이후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문화적 표현이 한층 자유로워지고 한류, K-pop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노래가 주목받게 되면서 노랫말의 주제와 성격도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김미미 학예사는 “최근에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표현하라는 자존감과 정체성을 강조한 노랫말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한글박물관은 기획특별전을 열면서 1920~2010년까지 발표된 노래 2만6000여곡을 대상으로 노랫말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빈도를 조사한 결과 ‘사랑’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는 다양한 시대의 노랫말을 보다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노랫말과 어울리는 각 시대의 공간을 연출했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의 노랫말을 보고 듣는 공간은 당시의 음반 가게와 음악다방이 들어서 있던 경성의 거리를 재현했다. 

음악다방에서는 그 당시 다방에서 유행했던 재즈풍의 노래 ‘청춘계급’(1938년)이 흘러나온다. ‘탭댄스’ ‘샴팡’ ‘윗카(vodka)’ 등 서양의 이국적인 문화와 음악을 즐기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모습이 노랫말에 그려져 있다. 전시장에는 작은 무대와 함께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던 1960~70년대 당시의 음악다방을 재현하였다. 탁자가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커피향을 맡으며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와 노랫말을 감상할 수도 있다. 

심동섭 국립한글박물관장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19의 대유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노랫말로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전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