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말에서 사용된 단어중 최고는 역시 ‘사랑’이었다. 그 다음을 ‘말’과 ‘사람’, ‘눈물’, ‘때’가 이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15일부터 10월18일까지 기획특별전(<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을 열면서 1920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된 노래 2만6000여곡을 대상으로 노랫말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빈도를 조사한 결과 ‘사랑’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목포의 눈물’ 가사지. 가사 중 ‘삼백연 원안풍’의 원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었다. 300년전 무렵이면 임진왜란(1592~1598년)이 연상된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가사를 바꿨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박물관측이 대중가요 노랫말의 발자취와 노랫말에 담긴 우리말과 글의 묘미를 소개하는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한성우 인하대교수에게 조사를 의뢰해 1920~2010년 사이 90년간 유성기 음반과 <한국가요전집>(1980년·세광출판사), 노래방 업체에 등록된 노랫말들을 전부 분석한 결과다.

1위를 달린 ‘사랑’ 단어는 무려 4만3549회가 나왔고, 그 뒤를 ‘말(2만2049회)’과 ‘사람(1만9559회)’, ‘눈물(16,650회)’, ‘때(15,949회)’, ‘맘(마음)(15,705회)’이 이었다. ‘가슴(1만3980회·11위)’과 ‘세상(1만3581회·12위)’, ‘눈’(1만1354회·13위)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노래 제목이나 노랫말에 ‘사랑, 말, 사람, 눈물, 마음, 가슴, 세상’ 등의 상위 빈도 단어가 들어 있고, 사랑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 19곡을 믹싱하여 소개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사지.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발표됐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이며 노래는 이해연이 불렀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대의 아픔을 담은 노랫말의 의미이다. 

단적인 예로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로 시작되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손목인 작곡·문일석 작사)은 1935년초 오케레코드가사가 개최한 전국 ‘향토 찬가’ 모집에서 당선된 노래다, 임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사랑과 관련된 노래로 알려져있지만 이 노래에는 숨겨진 코드가 있다. 바로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과 ‘임’이라는 가사다. 

가사는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임자최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마음 목포의 노래”로 끝난다. 그런데 이 ‘삼백연 원안풍’의 원래 가사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었다. 300년전 무렵이면 임진왜란(1592~1598년)이 연상된다. 

나훈아의 ‘고향역’이 실린 음반(1972년).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음을 담은 노랫말로 돈을 벌기위해 도시로 떠나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며 큰 인기를 끌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노랫말에 등장하는 ‘임’ 역시 연인이 아니라 ‘조국의 광복’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어로 알려졌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우리말의 표기와 발음을 미묘하게 변형한 노랫말을 슬쩍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일제강점기 백성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코드로 이해됐다(손목인의 <자서전>·1992년). ‘목포의 눈물’은 음반 발매 당시 5만 장 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김미미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간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지만, 대중가요 앨범이나 가수가 아닌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가수 남진씨의 ‘임과 함께’ 음반(1972년).  1970년대 들어 산업화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담은 노랫말이 유행했다. 서구 영화 속 펼쳐진 초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남진의 ‘임과함께’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는 국내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낙화유수’(1929년)부터 진정성 있는 노랫말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IDOL’까지 총 190여 곡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더불어, 각종 대중가요 음반 및 가사지, 노랫말 책, 축음기 등 총 206건 222점의 전시 자료를 소개한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대중을 위해 생산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었다. 따라서 노랫말 속에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와 정서를 담고 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실린 1집 음반. 삶의 고뇌를 아침이슬에 빗댄 노래였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목포의 눈물’에서 보듯 1920~1945년 이전까지는 식민 지배 아래에서 대중이 겪은 설움과 울분을 비유적인 단어들로 표현하는 시 같은 노랫말이 유행했다. 1950년 전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7년 추정)와 미8군 쇼 등을 통해 들어온 이국적인 지명과 리듬을 섞은 ‘늴리리 맘보’(1957년) 같은 노랫말이 인기를 얻었다. 

예컨대 ‘슈샤인 보이’(1954년)의 ‘헬로 슈-샤인 헬로 슈-샤인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라는 경쾌한 노랫말 뒤에는 한국 전쟁의 피난살이 중에 생긴 전쟁고아들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시대상이 감춰져 있다. ‘앵두나무 처녀’(1956년)의 ‘서울이라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라는 노랫말에는 경제 개발에 따른 이촌향도 현상과 녹록치 않은 도시 생활에서의 좌절감이 나타나 있다. 1960~70년대에는 도시의 화려한 성장과 이상을 표현한 ‘임과 함께’(1972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고향역’(1972년) 노랫말이 동시에 유행했다.  

1987년 9월3일 김민기의 ‘아침이슬’ 검열자료. '규제사유'란에 '묘지'를 '대지'로 바꾸라는 지시내용이 선명하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묘지’라는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됐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1970~80년대에는 포크송과 발라드가 유행하면서 ‘아침이슬’(1971년)처럼 삶의 진지한 성찰을 보이거나 ‘사랑하기 때문에’(1987년)처럼 서정적인 노랫말이 대중에게 큰 반응을 얻었다. 특히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삶의 고뇌를 아침이슬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였는데,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모임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금지곡이 됐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묘지’라는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아침이슬’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풀어낸 노랫말로 사랑 노래가 대부분이었던 대중가요의 노랫말에 큰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

1990년대 이후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문화적 표현이 한층 자유로워지고 한류, K-pop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노래가 주목받게 되면서 노랫말의 주제와 성격도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김미미 학예사는 “최근에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표현하라는 자존감과 정체성을 강조한 노랫말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한글박물관은 기획특별전을 열면서 1920~2010년까지 발표된 노래 2만6000여곡을 대상으로 노랫말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빈도를 조사한 결과 ‘사랑’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는 다양한 시대의 노랫말을 보다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노랫말과 어울리는 각 시대의 공간을 연출했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의 노랫말을 보고 듣는 공간은 당시의 음반 가게와 음악다방이 들어서 있던 경성의 거리를 재현했다. 

음악다방에서는 그 당시 다방에서 유행했던 재즈풍의 노래 ‘청춘계급’(1938년)이 흘러나온다. ‘탭댄스’ ‘샴팡’ ‘윗카(vodka)’ 등 서양의 이국적인 문화와 음악을 즐기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모습이 노랫말에 그려져 있다. 전시장에는 작은 무대와 함께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던 1960~70년대 당시의 음악다방을 재현하였다. 탁자가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커피향을 맡으며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와 노랫말을 감상할 수도 있다. 

심동섭 국립한글박물관장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19의 대유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노랫말로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전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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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20.05.20 1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통치 시대는 단순한 암흑 시대는 아니다.인구의 0.0001%도 없었다, 열심인 독립 운동가에게는 암흑이었는지도 모르지만, 99.999%의 일반 국민에게는 스스로 지방 의회 의원을 선거에서 고를 수 있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인생을 즐길 수 있었다.

  2. Abe 2020.05.20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명중 1명은 1%, 천명중 1명은 0.1%, 만명중 1명은 0.01%, 10만명중 1명은 0.001%, 100만명중 1명은 0.0001%,,,, 흠,,,, 1919년 3.1. 만세운동 참여자가 경기도 약 47만명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10만명이었으니까.... kimduhan의 말대로 0.0001%가 되려면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100만 곱하기 110만명은 1조1천억명 !!! 우와 ! 역시 대단한 전문 사기꾼, 프로 거짓말쟁이, 왜인다운 왜곡질을 보여주는구만....

    3.1.운동당시 시위 횟수가 기록에 남은건만 1,214 회 (일본 관헌사상 166건, 경찰헌병 관서 습격 159건 포함)....

    kimduhan 왜구 ! 당신 지능은 도데체 얼마요 ?
    인간을 100으로볼때 붕어는 3, 높아봐야 6, 기억력 3초 라는데,,,,혹시 인간이긴 한거요?

    • kimduhan 2020.05.20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3.1운동이라는 것은 통치 개시 초기의 쌍방의 이해 부족에 의한 충돌.그 뒤 조선인은 일본 통치에 순응했다.시정 개시 20년이 지날 즈음에는 거의 완전히 일본인이 되어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고 영토를 확대하기에 박수 갈채했다.

    • Abe 2020.05.20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쌍방의 이해부족? 순응? ㅋㅋㅋ

      참으로 비열하고 치졸한 왜인다운 수사로구먼.
      사린가스로 지하철 테러한 왜구가 왜국정부에게
      쌍방의 이해부족 때문에 일어난 사소한 일이고
      그 후엔 평화로운 동경 지하철이 되었다는 얘기지요?

      일제강점기 내내 일어났던 저항과 독립운동을 폄하하고싶지요 ?

      저열한 왜구들이 희망사항으로 정신승리 하려고?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혐오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본류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근데, 0.0001% 사기는 건너 뛸거지요? 일본인답게?
      앞선 수많은 거짓말과 왜곡에 더하여...

    • kimduhan 2020.05.21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에서는 구미 제국의 식민지와 달리 3.1사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독립 운동이라고 할 만한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다.3.1운동의 지도자들도 대부분 전향하고 일본의 통치를 적극 지지했다.
      조선 민족은 일제의 통치에 얌전히 순응하고 일본이 영미에 패전하면서 졸지에 독립하게 됐다.

    • Abe 2020.05.21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일본 군국주의 정부가 만든 관제 왜곡 교과서의 내용이고... 역사적 진실을 망각, 왜곡하는 왜구들의
      역사인식 방법이지...

      왜인들의 뇌피셜을 누가 수긍하겠나?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기념관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항일투쟁의 증거들이 왜구들에게는 보이지 않을터... 아니, 눈감고 안보는거지.. 그냥 노 라고 짖을뿐

      그당시 한반도 인구 1조1천억명이라는 궤변이나 해명해보게나 사기꾼 왜구 아저씨...

  3. Abe 2020.05.20 2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족해방운동의 모색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강압적 통치로 한반도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어렵게 되자, 독립운동가들은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연해주에서는 이범윤(李範允)이 중심이 된 권업회(1912년)와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가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정부(1914)가 만들어졌고, 북간도에서는 의병장 출신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서간도에서는 신민회 세력이 주축이 된 경학사·부민단 등 항일 민족단체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미주지역에서도 안창호(安昌浩)와 박용만(朴容萬)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인 국민회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규합하려 했다.

    3·1 운동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인을 미개 민족시하여 무단 통치를 실시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쫓는 등 갖은 수탈을 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운동은 시작되었다. 한번 불붙은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시베리아·연해주·미주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무력항쟁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학살·살인·방화·고문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니콜라옙스크 일본 영사관의 불탄 자리 1920년 6월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에 따라 각 지역에 존재한 망명 정부의 통합을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한반도의 한성임시정부, 상해의 상해임시정부 등이 한민족의 광복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3도 대표회의로 결성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 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는 프랑스 조계지로서 당시 세계의 외교의 각축장이었는데 1차 대전 이후 각종 국제회의에 영향을 받아 외교적으로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상하이에 기반을 두었다.

    임시정부는 초반 대통령제를 표방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이미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는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활동에 소득이 없고, 특히 외교론의 이승만의 이러한 위기 속에서 청원한 위임 통치 청원서가 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서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개조파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창조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 채, 대부분의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하게 되었다. 이 이후 항일운동에서 민족의 대표기관이었던 임시정부는 일개 단체로 전락한 체, 이후 김구의 활약으로 부활하기까지 오랜시기가 걸렸다.

    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함경남도 혜산 일대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은 일본군대를 전멸시켰다.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1920년 6월). 또 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6·10 만세 사건(1926년)과 3·1운동 이래 최대의 항일 운동인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년 11월 3일)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만주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조선 내외에서 일본 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투쟁,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공장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 소작농민의 지주를 상대로 한 투쟁,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1개월 동안 전개했던 부산 조선방직 파업투쟁 등이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이러한 노농투쟁은 점차 폭력화되어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의 장풍탄광 노동자 300여 명은 노동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탄광 시설과 사택을 부수고, 총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게 도끼·망치·곤봉으로 맞서 육박전을 벌였다.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의 2,000여 명 농민들이 일제의 산림정책을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습격했다가 여러 명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자·농민들의 투쟁은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한 민중의 투쟁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구조를 반대하는 항일의 성격을 띤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었다.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

    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 널리 퍼져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가 대거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민중들의 계급투쟁을 지도하는 한편,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 건설에 힘을 기울여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으며, 1924년 4월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결성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계열 내에서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개량주의자가 분화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했다. 신간회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 지회가 잇달아 결성되었는데, 1928년 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갖가지 계급투쟁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터지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일제는 민중대회 사건을 빌미로 삼아 신간회의 핵심 간부 40여 명을 체포했다.

    1927년 조선에서는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가 건설되었다. 근우회는 계몽을 주장하는 기독교계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계의 대립이 있었지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주의적 사회구조로 차별과 억압을 받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의미가 있는 단체였다.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운동 편집

    1930년대에 들면서 혁명적 노동 조합·농민 조합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노동 조합 활동가들은 경성트로이카등 조직하여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조직을 결성하고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노동조합, 파업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공장신문·팜플렛·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을 선동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공업 시설이 집중된 흥남·함흥·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전국에 걸쳐 1,759명이나 되었다.

    농민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의 기존 청년동맹·여성동맹·소년동맹을 혁명적 농민조합에 편입해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로 만들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도하에 농민들은 격렬한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동지탈환대·규찰대·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등 투쟁을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고, 1931~35년에 경찰에 적발된 혁명적 농민 조합 사건은 43건, 검거된 사람은 4,121명에 이르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더욱 엄혹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도하의 독립 운동은 1920년대 중반 대체로 침체 되었으나, 김구의 주도하에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왕을 암살하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해외의 동포들이 격려 편지와 자금을 보내왔다.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에게 일본 총독의 암살을 지시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또한 윤봉길은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 겸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 행사에서 단상 위 일본 수뇌부들을 향해 수통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두 사건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숨어다녀야 했으나 난징으로 거처를 옮긴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로 임시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를 보호하였다. 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간 상해에서 피신하여 1933년에는 장제스와 항일전선협력에 합의하였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10월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재직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함과 함께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난징과 창사를 거쳐 1940년에는 충칭(重慶)으로 그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서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태평양 전선에서 확대된 1941년 12월 10일에는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 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말기 국외 독립운동

    광복군 청년공작대.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하여 그해말까지 전(全)만주를 점령하자,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은 즉각 무장을 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먼저 양세봉(梁世鳳)·이청천(李靑天)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끌었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일제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차츰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에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던 동만주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유격대를 결성하고 반일 투쟁에 나섰다.

    중국 관내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김학무(金學武) 등 130여 명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심리전, 적후방에서 벌이는 첩보 및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1941년 봄에 황허 강(黃河)을 건너 조선인이 많이 사는 화베이(華北)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에 쫓겨 자싱·항저우·창사 등지로 전전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했는데, 그 해 9월 17일 간부 12명으로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1942년 화베이로 가지 않은 조선의용대의 잔류부대를 흡수하여 대열을 늘리는 한편, 1943년 8월 구(舊) 조선의용대원 출신 광복군 8명을 선발대로 심리, 선전전 특수요원을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을 도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중국 주둔 미국 전략첩보기관인 OSS와 합작하여 조선 진입작전을 추진했다. 광복군과 OSS 사이에 "광복군 대원들을 선발하여 첩보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적 후방 공작을 전개한다."는 내용의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매개로 하여 1945년 5월부터 4개월 과정으로 훈련이 실시되었던바, 이무렵 서안에 있던 제2지대와 부양에 있던 제3지대가 훈련을 받아 제1기생 훈련이 8월 4일 완료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제가 일찍 항복하여 조선 진입작전이 좌절되었다.

    1940년대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한반도의 반일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의 비중이 커져가는데, 이는 1940년대에도 나타났다. 당시 사상범 검거 상황을 보면 1941년 경우 공산주의자들이 전년이 668명에서 대폭 줄어 158명인데, 민족주의자는 72명 ~ 176명으로 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시체제였고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수 많은 이들이 강제 징집, 징용 등등 끌려가는데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유포, 태업, 공출 기피, 징용 및 학병 기피 거부 등등 소극적인 반일 움직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 조동호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간략했다.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제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반추축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저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것.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행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세우면서 건국동맹은 치안대와 군사단체 조직,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제휴 활동을 벌였다. 조동호 등으로 군사위원회 조직하여 후방 교란 활동을 벌이게 하였고, 박승환 등 만주군 장교들을 규합했으며 북경을 거점으로하여 화북 조선의용군과 연결했고, 충칭 임시정부와도 연락하고자 했다.

    이어 1944년 10월에는 농민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국동맹의 우군이었다. 여운형은 학생, 교사, 철도원, 여성 등도 조직하였고, 징용, 징병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요청에 따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만난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요구하였고, 엔도 정무총감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운형의 5가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전국의 옥문이 열리고 정치범(독립운동지사들)이 석방되었다.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기구를 확대 개편하여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이 되면서 일본과 식민지 주종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한국의 모든 독립 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0년대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1942년 이홍장 등 중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지하단체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만주로 망명하려다 적발되어 체포된 이홍장은 1944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육군 형법 위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소년원에서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정체 모를 주사 등 고문 후유증으로 8·15 광복을 3일 앞두고(1945년 8월 12일) 순국했다.

    • kimduhan 2020.05.21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컨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러한 긴장관계의 국제질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발언권을 확보한 조선인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부속 영토였습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09/06/26/2009062600058.html

    • Abe 2020.05.21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수준하고는 ....
      기껏 찾아낸게 뉴데일리 기사 이구만....
      답 않할래요 쪽팔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