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교서는 틀림없는데…’. 지난해 11월 경주이씨 백사공파 종가가 기증한 백사 이항복 관련 유물을 검토하던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자들은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에 특히 시선이 머물렀다.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백사 이항복이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다음 하사받은 초상화다. 후대에 옮겨그린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호성공신 교서가 무엇인가.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증명서다. 이항복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선조는 호성공신 86명 중에 이항복과 정곤수(1538~1602) 등 2명에게만 1등의 작위를 내렸다.
당시 승문원 소속 사자관(문서를 정서하는 실무직)이던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로 쓴 이 교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임금을 수행한 백사의 공적’이 자세히 언급돼있다. 만약 1604년 불세출의 명필인 한호의 글씨로 쓰여진 ‘호성공신교서’, 그것도 1등 교서가 맞다면 국보급 유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기증된 ‘이항복 호성공신교서’와 함께 관련 문헌을 살펴보던 박물관 연구자들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송자대전> ‘백사 이문충공(이항복) 공신녹권 그후를 쓰다’에서 이 ‘이항복 호성공신교서’의 전래후일담을 찾아냈다.
즉 1604년(선조 37년) 공신책록 당시 수여한 ‘이항복 공신교서’는 병자호란(1636~7)으로 잃어버렸다가 이항복의 증손인 이세필(1642~1718)이 교서의 글씨를 썼던 한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부본(副本·원본과 똑같이 작성하여 보관한 문서)을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송자대전>은 “증손인 이세필은 그렇게 찾은 부본을 충훈부(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을 관리하는 부서·지금의 국가보훈처)에 올려 다시 국새를 찍어 보관해왔다”고 소개했다.
<송자대전>에 따르면 1604년 공신작위를 받고 발급받은 ‘이항복 공신교서’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부본’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 1604년 발급된 호성공신 1등 교서이지만 병자호란의 와중에 잃어버렸다. <송자대전>에 따르면 지금 남아있는 ‘이항복호성공신교서’는 이항복의 증손인 이세필이 석봉 한호의 집안에서 전해지는 것을 찾았다 .이세필은 그 문서를 충훈부(지금의 국가보훈처)에 올려 다시 정식으로 국새를 받아냈다. 지금의 교서는 원본이 아닌 부본인 셈이지만 정식으로 국새를 받았으므로 원본이라 해도 무리는 없겠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박물관 관계자들은 공신 교서(두루마리) 뒤에 따로 붙어있는 종이에서 ‘석봉 한호가 이 문서의 글씨를 썼다’는 뜻인 ‘한호서(韓濠書)’라는 내용을 확인했다.
이 ‘한호서’ 내용은 한호의 글씨가 아니라 이항복의 증손인 이세필의 글씨체로 추정되었다. 결국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공신교서는 1604년 발부된 원본이 아니라 17세기말~18세기초 국새를 다시 찍은 부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호의 집안에는 왜 남의 가문 문서인 ‘이항복 공신교서’ 부본이 남아있었다는 것인가.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는 “중요한 문서인 공신교서 등의 경우 한번 발부할 때 여러 부 작성해놓는다”면서 “작성된 여러 부는 담당관청인 충훈부나 혹은 이항복 교서처럼 사자관의 집에 보관해두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을 후손인 이세필이 찾아 지금의 국가보훈처인 충훈부에 가져가 다시 국새를 찍었고, ‘이항복 호성공신교서’는 그렇게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 대우를 받는 문서가 된 셈이다.
‘이항복 호성공신교서’ 두루마리 뒤에 붙은 종이에 적힌 ‘한호서(韓濠書)’ 글씨.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는 내용이다. 병자호란 때 잃어버린 ‘이항복 호성공선교서’의 부본을 한호의 후손 집에서 찾은 이항복의 종손 이세필의 글씨로 추정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재호 학예사는 “이 공신교서는 ‘원본’은 아니라 ‘부본’으로 확인됐지만 조선시대 공신교서의 중요성과 후손들이 보존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산물이라는 점을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49세의 ‘이항복 호성공신 초상’과 58세의 ‘이항복 위성공신 초상’도 같은 의미의 유물들이다. 두 초상화 모두 후손들이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공신상 역시 공신교서와 함께 후손들이 애지중지했으며, 초상이 낡으면 이를 옮겨 그려 다시 모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49세의 공신상은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 1604년(선조 37년)에, 58세의 공신상은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재위 1608~1623)을 호종한 공로로 위성공신 작위를 받은 1613년(광해군 5년)에 각각 그린 것을 18세기에 모사했다. 두 공신상을 비교해 보면 얼굴의 주름이 늘어나는 등 9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유물 중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은 붓으로 쓴 천자문 중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1607년 여섯 살 손자 이시중(1602-1657)에게 써 준 것이다. 한 자씩 공들여 쓴 글씨의 골격이 굳세고 획이 날렵하다. 이항복은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는 당부의 말에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애정이 담겨있다.
또 이항복의 드문 친필로 가치가 높은 ‘이항복이 손수 쓴 제례에 대한 글’은 중국 경전인 <예기>에서 제사의 본질과 관련된 글을 뽑아 쓴 것이다. 이항복은 “요즘 젊은 애들은 제사를 지낼 때 무턱대고 윗사람만 따라할 뿐, 그것이 무슨 의의인 아는 사람이 없어 옛 경전에서 뽑은 글을 병풍으로 만들어 평소에 익히도록 한다”고 친히 썼다.
백사 이항복이 52살 때 6살 짜리 손자에게 직접 써준<천자문>.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만을 생각한 백사 이항복의 삶은 코로나 19로 어려움에 빠진 지금 이 순간에도 큰 울림을 준다”면서 “처음 공개되는 기증품을 감상하며 후손에게 이어져 온 올곧은 정신을 함께 느껴보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객들은 미리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www.museum.go.kr)에서 온라인으로 예약을 한 뒤에 전시관에 입장할 수 있다. 이번 예약제 재개관은 ‘생활 속 거리두기’실천을 위해 관람객 밀집을 피하고자 시간당 300명으로 입장 인원을 제한한다. 대면 전시해설 및 학생단체와 사설해설 단체 관람은 일절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어린이 박물관은 온라인 예약을 통해 회차당 7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며, 박물관 도서관 또한 온라인이나 전화를 통해 사전 예약한 이용자에 한해 개방한다.
온라인 예약자는 상설전시관 입구에서 마스크 착용 및 발열 검사를 받은 뒤 검표대에서 예약 때 받은 QR코드를 스캔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여 전시실로 입장한다. 온라인 예약이 어려운 외국인 관람객과 노약자들은 현장에서 발권할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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