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들은 보이는가”(정조), “예, 보입니다”(신료들).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재위 1776~1800)는 군왕의 상징그림인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冊架圖·책거리)’ 병풍을 내건 뒤 신료들에게 “이 그림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정조는 신료들이 “보인다”고 하자 ‘놀리듯’ “경들은 진짜 책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그림”이라고 하며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 병풍을 내건 이유를 밝힌다.
‘책가도’. ‘책가도’는 서가(書架)와 같은 가구를 중심으로 책은 물론 각종 고동기물(古銅器物)이나 문방구, 화훼 등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는 군주의 상징인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오로지 책만 잔뜩 쌓아놓은 ‘책가도’ 병풍을 내걸었다. 문체반정의 신호탄으로 책가도를 활용한 것이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북송의 정자(정이천·정명도 형제)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과인은 이 말의 참뜻을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일월오봉도’가 무엇인가. 해와 달, 다섯봉우리, 소나무와 물 등을 그린 일월오봉도는 왕권의 상징이자 군왕의 분신이며 동일체로 여겨져 언제나 조선 임금의 어좌 뒤편에 걸려 있었다. ‘일월오봉도’는 왜 국왕의 상징그림이 됐을까. 연구자들은 <시경> ‘천보’에서 유래를 찾는다. 즉 ‘천보’라는 시에 9가지 자연현상이 묘사되는데, 다섯봉우리는 하늘이 내린 왕을 보호하는 물체를, 나머지 4개, 즉 해와 달, 소나무, 물 등은 통치자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하는 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는 늘 이 ‘일월오봉도’를 어좌 뒤에 걸고 군주가 죽은 뒤에는 같이 묻는다고 했다.
책가도 8폭병풍. 19세기 후반작품이다. 책가도는 정조가 문체반정의 신호탄이었지만 후대에 사대부는 물론이고 민간에서 크게 유행했다. |호림박물관 제공
때문에 군주와 일월오봉도는 늘 세트로 취급되었다. 병풍만 걸려있다고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반드시 군주가 앉아있어야 완성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가 군주의 상징 그림인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冊架圖)’ 병풍을 걸었으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정조는 왜 책가도(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 병풍을 내걸었을까. 정조가 ‘책가도’ 그림을 건 뒤 신료들과 나눈 대화에서 그 속뜻을 찾을 수 있다.
정조는 “독서의 참뜻을 책가도 그림에서 얻었다”고 밝히면서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나와 상반된다”고 장탄식한다. “지금 사람들이 즐겨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바로잡으려 한다. 이 그림을 만든 것은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두기 위함이다.”
책가도 6폭병풍. 민간에서도 풍요와 다산, 출세 등의 의미를 그린 ‘책가도’를 찾았다.|호림박물관 제공
정조가 책가도를 건 것은 바로 ‘후세의 병든 글’을 바로잡기 위해 단행한 ‘문체반정’의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문체의 성쇠흥폐는 정치와 통한다고 했다. 정조는 특히 민간에서 떠도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모은 패관, 잡문 그리고 명말청초의 문집을 ‘사(邪)’로 규정했다. 그래서 이를 배격함으로써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했다. 정조는 책가도 병풍을 내걸고 “책과 학문으로써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천명한 1년 뒤인 1792년(정조 16년) 문체반정을 시작했다.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를 담은 책가도 그림은 이후 사대부는 물론 민간에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규상(1727~1799)의 <일몽고>는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유식한채 했다”고 전했다. 민간에서도 풍요와 다산, 출세 등의 의미를 그린 ‘책가도’를 찾았다. 책가도엔 책만 그린게 아니었다. 고관대작의 상징인 공작과 산호 등은 물론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부처손과 석류·포도·오이·수박·가지 등, 장수와 성공, 부부금슬 등을 뜻하는 잉어·금붕어·나비·호랑이 등까지 책 뿐 아니라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안경, 시계와 같은 서양기물과 중국의 엣 서책과 유물 등이 그림을 장식하기도 했다.
문자도 8폭병풍. 글자를 도안화한 그림이다, ‘효제충신예의염치’ 등 유교적 덕목을 활용한 문자를 그림으로 표현했다.|호림박물관 제공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은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에서 시작돼 사대부와 민간에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가도’ 특별전을 12일부터 7월31일까지 개최한다. <서가의 풍경-책거리·문자도> 특별전이다. 이 특별전에서는 서가의 풍경을 그린 책가도(혹은 책거리) 그림과 유교 이념을 담은 ‘문자도’를 전시한다. 책거리와 문자도는 둘 다 학문, 출세, 유교 문화 등의 상징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문자도 8폭병풍. 유교문자도는 유교적 통치이념이 전시실로부터 국가 전반으로 저변화되면서 민화 속에 투영됐다. 안동지역에서는 충(忠)자에 용 대신 충절을 상징하는 새우와 대나무를 그렸다. 치(恥)자에 위패형식의 비석을 그렸다.|호림박물관 제공
첫번째 전시실에서 선보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 10폭 병풍이 눈에 띈다. 책가를 책으로만 가득 채운 이 병풍은 1791년 정조의 어좌 뒤에 설치되었던 ‘책가도’가 어떤 그림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두번째 전시실에서는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등 8자의 유교문자도와 길상문자도가 전시된다. 유교 문화가 발달했던 안동 지역에서 제작된 문자도는 단순하고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책가도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제주의 ‘문자도’는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수(壽)’와 ‘복(福)’자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백수백복도’에는 오래 살고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오랜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세번째 전시실에서는 화조화가 어우러진 ‘유교문자도’와 ‘혁필문자도’, 그리고 이응노(1904~1989)와 남관(1911~1990), 손동현 등으로 이어지는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다. 표수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서가에서 책 한권을 꺼내 보듯 전시실에서 책가도와 문자도에 담긴 옛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을 살펴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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